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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31. 2017

고스트 버스터즈의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뉴욕 영화 여행

대학을 졸업한 지 5년인데 여전히 학교를 좋아하고 있다.

사실 학원이든 학교든 배움의 에너지가 쏠려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좋다. 이건 당시의 자유라는 특권을 장소가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과거의 호시절을 그리며 앨범을 들춰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가끔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지금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았지,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사회로 나간 선배나 주변 어른이 좋을 때다, 마음껏 누려야 해. 라며 부러움 펴 바른 충고를 시시때때로 던질 때도 그런가 보다 받아 들기만 했을 뿐 정작 즐기는 방법은 알지 못해 세월아 네월아 길 위에 시간만 뿌리고 다녔다. 지나고서야 이런 경험 자체가 그 시간을 누리던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고 보면 사람은 현재는 보지 못 하고 과거만 그릴 수밖에 없는 가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콜롬비아 대학교
COLUMBIA UNIVERSITY



커뮤니티 푸드 & 주스에서 분에 겨운 좋은 식사를 마친 후 건너편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교로 여유 있게 걸어왔다. 일광욕하기에 이상적인 햇살이다. 자연스레 턱을 치켜들고 만면에 볕을 담게 된다. 옆구리에 대학 교재를 낀 채 바지에 손을 넣고 걷고 있는 사람, 군더더기 없는 일상 대화가 오가고 있을 나무 밑의 단 두 사람, 그리고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지 땅만 보며 홀로 앉아 있는 남학생까지. 학교라는 영역에 들어왔음을 풍경이 나지막이 일깨워준다. 미래는 손을 뻗는 그만큼 닿을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과거에겐 그런 행위가 파도의 포말만큼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대학이라는 곳만 찾아오면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들과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 차로 서로 다른 운명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조금씩 씁쓸해지는 기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 벌써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는 나이가 된 건가?


콜롬비아 대학교 도서관 / 가운데에는 시각 예술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의 작품, Alma Mater 상(아테나 여신)이 특유의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콜롬비아 대학교로 들어오면 눈에 익은 도서관의 풍경이 먼저 게스트를 반겨준다.

배움의 단계를 표현한 듯한 계단 위로 학생들이 띄엄띄엄 앉아 더할 나위 없는 대학의 정경을 완성한다. 솔직히. 이런 풍경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 한 번쯤 해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 아닌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그들을 보고 있으니 마치 한 장의 엽서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또렷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1900년의 콜롬비아 대학교 도서관. 무려 117년 전의 모습이다. 시간의 포스에 입이 쩍. / 위키피디아





스파이더맨 2
SPIDER MAN 2


내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면 아직까지는 토비 맥과이어다. 그 선하고 어벙한 눈빛 속에 깃든 강단이라고 해야 하나. 영웅의 면모에서 허당기를 찾는 것보다 어째 허당의 인생에서 영웅의 기를 찾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를 지켜보고 있으면 기묘하게도 현실의 위안을 받게 되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 파커에게서 일상의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복합적인 스토리 구조를 느슨함과 긴장감으로 탄력 있게 오가는 샘 레이미 감독의 기찬 연출력 덕분에 당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잘 만들어진 히어로물이 되었다.

그런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콜롬비아 대학교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2에서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영웅으로서의 스파이더맨과 평범한 대학생이라는 신분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니까 슈퍼 히어로와 보통의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고민하며 심각한 내면의 위기(더불어 옥타비우스와 해리와의 외적인 갈등도 포함하여)를 맞이하게 된다고 할까.  


스파이더맨 2 (2004) / 피터 파커가 다니는 대학교가 콜롬비아 대학교다.


스파이더맨이 되어 뉴욕 곳곳의 범죄를 소탕하랴, 학생으로서 학업도 따라가랴, 남자로서 메리 제인도 사랑하랴 그야말로 정신이 없는 피터 파커. 그는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본인의 허리만큼이나 두꺼운 대학교재를 한가득 들고 캠퍼스를 뛰어가다 다른 대학생과 부딪쳐 모조리 책을 떨어뜨리고 만다. 사람들은 허리를 숙이고 책을 줍는 그가 마치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물건을 밟고 지나간다거나 심지어 백팩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퍽퍽 치기까지 한다. 한껏 두들겨 맞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영혼이 빠져나간 눈을 치켜든 채 거리를 살펴보는 피터 파커. 사실 난 그의 표정이 정말 좋다. 일상에 차이는 나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아서.


스파이더맨 2 (2004) / 지나다니는 백팩에 사정없이 머리를 맞고 어안이 벙벙해진 피터 파커. 난 이 표정이 그렇게 좋다. 어이는 없는데 달리 행동은 취하지 못하는 그 특유의 표정.


그렇게 짐을 챙기다 교수와 마주쳐 인사를 한다.

교수가 어디 가는 거냐고 묻자, 교수님 수업에 간다고 대답하는 피터 파커. 그러자 교수는 그 수업 이미 끝났는데 나더러 다시 수업을 하라는 거냐고 도리어 되묻는다. 본인의 일상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히어로의 어벙한 모습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다시 보아도 즐겁고 때로는 뭉클하기까지 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시리즈.


스파이더맨 2 (2004)


우리는 도서관 앞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다 학교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뉴욕의 모든 햇살이 이 대학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만 같다. 꼭 무대 한가운데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일행의 관심을 따라 비즈니스 스쿨을 따라갔다. 이제는 익숙한 한국말이 배경음처럼 들렸다. 대학 건물 내부로 들어오니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은 것처럼 학생 때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들이쳤다. 때로는 후각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기억의 단서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사진보다도 선명한. 학교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가 잊고 지냈던 단편의 기억들을 현상했다. 엑스맨의 프로페서 X가 타인의 일생을 한 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


고스트버스터즈의 콜롬비아 대학교를 볼까. (2016년에 개봉한 고스트버스터즈의 오리지널 버전)

피터 밴크맨(빌 머레이)과 레이몬드 스탠드(댄 애크로이드)는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초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괴짜 교수다. 이렇다 할 성과조차 없이 말도 안 되는 유령 연구만 늘어놓고 있으니 대학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들어가는 연구 지원에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벽에 부딪쳐 피터와 레이몬드는 대학을 나가 자신들만의 사업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는데, 바로 이때 나눈 대화의 장소가 콜롬비아 도서관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이었다.


피터는 사업을 시작하길 원하고 레이몬드는 편하게 지원금을 받아 연구만 이어갈 수 있는 대학교를 선호한다. 그런 레이몬드에게 피터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며 궤변에 가까운 설득을 이어가고 결국 두 사람은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고스트버스터즈라는 유령 잡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고스트버스터즈 1 (1984) / 오프닝에 등장하는 도서관의 Alma Mater

고스트버스터즈 1 (1984) / 영화 초반, 콜롬비아 대학교 정원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유독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빌 머레이가 난간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 특유의 자유로운 정서였다. 여기서 주된 이유는 술이 아니라는 점.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흠. 그 장면의 자유로움은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몸소 느꼈던 여유로운 정서와 가장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던 사람, 높은 난간에 혼자 앉아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고 있던 사람, 오로지 목적은 햇살뿐인 것처럼 멍하니 앞만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 등등. 학교를 집처럼 누리는 대학의 분위기가 선명해서 고스트버스터즈의 콜롬비아 대학교에 유독 마음이 간다고 해야 하나. 비록 그들이 나누던 대화는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모순적인 주제였지만.  


고스트버스터즈 1 (1984)

콜롬비아 대학교 도서관 / ALMA MATER 상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HITCH


사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콜롬비아 대학교란 브루클린 브리지까지는 아니고, 퀸즈보로 브리지만큼의 지분은 차지하고 있는 배경처럼 보인다. 그 장엄하면서도 탁 트여있는 이상적인 대학가의 이미지 때문인지 유독 영화 속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으로 자주 설정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뭐, 이건 내가 뉴욕 영화만 찾아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윌 스미스의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도 예외는 아니다.
남의 연애에만 빠삭한 데이트 컨설턴트 히치(윌 스미스)에게 흑역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대학생 시절이다. 한참 새내기 티를 내며 씩씩하게 걸어 다니다 도서관 계단에서 사랑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준 첫사랑의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의 뼈아픈 사랑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연애 박사로 거듭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2005) / 콜롬비아 대학교

Mr. 히치 -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2005) / 콜롬비아 대학교


방학을 앞둔 시기의 한산하고 나른한 공기가 대학을 겉돌고 있었다.
그런 느낌들이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끄집어내는 집요한 무기력함이라고 해야 하나.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과 비슷하다. 하고 싶은 것, 혹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기어이 축 처지고 마는. 어느 일요일 오후 시골 할머니 댁에서 느끼곤 했던 권태감. 내게는 우연이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정서가 바로 그런 무기력함이었다.

그리고 양지바른 도서관을 벗어나 그늘진 대학 건물을 돌아다닐 때 그런 무력의 냄새가 코 끝을 간질였다. 활기를 기대한 곳에서 끝물의 저주가 느껴진 것이다.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무기력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끌어내는 영화, 스틸 앨리스를 이야기해볼까.
주인공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콜롬비아 대학교의 언어학 교수로 등장한다. 단순히 이 대학교의 교수로 등장하기 때문에 언급한다기보다는, 극 중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는 그녀에게서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장소가 이곳이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었다. 스틸 앨리스는 나를 이루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잃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깅을 하다 도서관 앞에 멈춰 서서 문득 이곳이 어디인지를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대학가의 풍경은 아웃포커스로 맞춘 채 길을 잃은 듯한 앨리스의 표정에만 오랜 시간 집중한다. 나 자신의 영혼이 눈빛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그녀는 한참을 서서 자신의 학교, 그리고 도서관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


스틸 앨리스 (2014)

스틸 앨리스 (2014)

도서관 Alma Mater 뒤에서 본 대학교

폐에서 숨이 빠져나오듯. 학교를 벗어났다.

여기까지 올라온 거 할렘까지 가보자 했다. 학교에서 5-10분만 걸어 올라가면 할렘이었다. 할렘은 아직까진 혼자가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와 함께일 때 가보고 싶었다.



걸어 올라갈수록, 할렘에 가까워질수록. 느낌 탓인지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것처럼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여행자가 까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고 하면 표현이 되려나. 선입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멀리서 응시하던 할렘 언니의 시선을 받고 기가 눌린 우리는 긴말할 것 없이 눈앞에 보이던 125 스트리트 스테이션으로 직행해 타임스퀘어로 일정을 틀었다. 때로는 빠른 포기가 득이 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이번엔 꺾이고 돌아가지만, 다음번 뉴욕 여행 때는 제대로 할렘을 여행해주겠다. 라고 속으로만 다짐을 해본다.


할렘 - 125 스트리트 스테이션으로 들어와 곧바로 타임스퀘어 역으로 향했다





남은 여행 시간 동안 타임스퀘어는 줄기차게 방문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저 지나가는 수준으로만 들렀다. 일행이 곧 있으면 보스턴으로 떠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임스퀘어를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시위가 일어났는지 빨간 계단(TKTS)은 막혀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무리가 보였다. 삼엄하게 돌아다니는 NYPD까지 보이기에 테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지 덩달아 경계하게 되어 결국 겉만 돌다 펜실베이니아 스테이션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타임스퀘어 하드락 카페


함께일 때 더없이 행복하게 누렸던 것 같다.

그 장소가 타임스퀘어여서 만족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펜실베이니아 스테이션까지 걸어가는 길에 암트랙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를 이것저것 골라주었다. 주스와 샌드위치와 알토이드까지. 배고플 겨를이 없도록.



단 두 블럭을 걷는 사이 하늘색의 하늘은 푸른색의 하늘이 되었고, 저 멀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촛대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단하기도 하지. 모든 에너지가 장렬하게 소진되었다. 아침에 예상했던 그대로, 당장 어딘가에 드러눞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펜실베이니아 스테이션 (aka 펜 스테이션)


공항만큼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펜실베이니아 스테이션.
이곳은 이틀 후에 이터널 선샤인의 몬탁으로 향할 때에도 다시 한번 들를 예정이다. 이제는 일행과 헤어져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 보스턴으로 함께 가지 못 하는 지금의 사정이라는 것이 죽도록 미웠다. 기어이 일행과 헤어지고 뒤돌아 울컥하는 마음 감출 수가 없었을 정도로.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몰랐을 고통이 둘이었다 하나가 되자 선명하게 돌아왔다. 이제야 사랑하는 뉴욕의 밤이 찾아왔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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