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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31. 2017

모 베터 블루스의 밤

뉴욕 영화 여행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일행을 보스턴으로 보낸 후 시차 부적응으로 인한 지긋지긋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아무래도 저녁 일정은 무리인 걸까,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해야 오후 5시 반이다. 이대로 숙소에 돌아갈 경우 놓치게 될 뉴욕의 밤이 아쉽다. 누더기 같은 몸만 간신히 지탱하며 펜스테이션을 떠나지 못하다 문득 영화 모 베터 블루스의 풍경이 떠올랐다.


낮에 들렀던 브루클린 브리지나 다시 가볼까. 
싱그러운 오후에 걸었던 그 다리, 까만 밤에도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간신히 브루클린 브리지(시티 홀) 스테이션까지 찾아왔다. 출발할 때는 남색에 물든 것처럼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역에서 나오자 어느새 완연한 밤의 하늘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는 굳이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이 밤을 보니,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OST. 바로 셀린 디온과 클라이브 그리핀의 When I Fall In Love 선율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통 그 음악이 눈송이처럼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경우 열에 아홉은 그 장소만의 음악이 되고 만다.

이곳에서 만난 When I Fall In Love가 브루클린 브리지만의 테마곡이 되었듯이.


브루클린 브리지


이 음악만 반복해서 들으며 브리지를 걷기 시작했다. 사실 몸은 무거웠지만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뉴욕의 밤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브리지를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과 교차했다. 오른쪽으로는 뉴욕의 본격적인 야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간에 따라 서서히 그늘을 물리치는 햇살과도 같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밤은. 특유의 적적함이 있었다. 아마 이런 공기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겠다. 나는 이 다리를 세 번째로 걷고 있다. 처음엔 친구들과 걸어 즐거웠고, 두 번째는 연인과 걸어 편안했으며, 세 번째는 혼자 걸어 쓸쓸하다. 그런데 그 쓸쓸함에 기분 좋은 외로움이 깃들었다고 해야 하나. 밤의 감성에 촉촉이 물들고 있는 느낌이다.


춤추는 대뉴욕(1949)에 등장하는 브루클린 브리지. 낮에 찍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밤에 찍게 되어 양질의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 한이다.


첫 번째 전망 포인트에 이르렀다. 
그래 봤자 다리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브리지의 중간까지는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늘 다리 위로 지나는 광적인 바람에 못 이겨 서둘러 사진만 찍고 쫓기듯 돌아서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이깟 추위라는 장해가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나에겐 따뜻한 음악이 있었기 때문에. 

추는 대뉴욕에서도 브루클린 브리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고전 뉴욕 예찬 영화라는 점 외에도 약 70년 전의 뉴욕을 볼 수 있다는 장점에 있다. 진 켈리와 프랭크 시나트라, 줄스 먼신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브루클린 브리지라는 장소를 즐기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걸었던 곳을 나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같은 장소에서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듯한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뭐, 이 맛에 영화 여행을 하는 것 아니겠나.



When I fall in love

It will be forever

Or I'll never fall in love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 사랑은 영원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난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드디어 뉴욕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셀린 디온의 목소리 위로 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야경이 포개지면서 순간의 광휘가 보이는 듯했다. 행복이라는 말은 남발할수록 빛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의 이 감정은 그에 가장 가깝게 이른 듯한 느낌이었다고 표현을 해야겠다. 음악이 풍경과 절묘하게 뒤섞여 환상을 자아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에 빠진 듯 다색의 감정이 고동친다.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차오르고 쓸쓸한데 기쁨이 떠오르는 것처럼.



the moment I can feel that

You feel that way, too

Is when I fall in love with you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끼는 순간,

바로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에요.


한참 나만의 시공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어느 커플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사진을 부탁했다. 하필 눈시울이 붉어 있을 때 말을 건 바람에 그들의 눈빛에서 당황스러움이 읽혔다. 실연이라도 당하고 우는 줄 알았나 보다. 아니야, 살아있음을 실감해서 그래.



모 베터 블루스
Mo' Better Blues


다리의 절반 정도까지 걸어왔을 때. 모 베터 블루스의 덴젤 워싱턴이 보였다.
외로운 예술가의 인생이 잔잔한 블루스를 타고 선율처럼 흘렀던 영화. 때로는 예술가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오직 예술밖에 모르는 블릭(덴젤 워싱턴)의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를 떠나게 되는데,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그는 괴로움에 가까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사랑도 우정도 놓친 그는 곁에 있어주는 유일한 음악과 함께 밤의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쓸쓸한 연주를 한다.  


모 베터 블루스 (1990)

이건 모 베터 블루스의 테마곡이다. 그 밤 브루클린 브리지와 기어이 하나가 되었던 음악.

모 베터 블루스 (1990) /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홀로 연주하는 외로운 예술가, 블릭(덴젤 워싱턴)


사실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이 훌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말 부분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아쉬움이 따르기도 하는 영화이지만 다만 블릭이 모 베터 블루스를 연주한 후 "블루스."라고 한 마디를 내뱉던 그 장면과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음악과 자신 단둘뿐이라는 듯 고독한 연주를 이어가던 장면만큼은 무엇보다도 완벽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모 베터 블루스 (1990)


이제 들어왔던 방향으로 돌아 나간다. 누더기 같은 숙소에서 황량하게 보낼 뻔했던 오늘 밤은 충만한 뉴욕의 빛으로 채워졌다. 블릭처럼, 지금 이 순간 세상에는 음악과 나 단둘뿐인 것만 같다.


오른쪽: 이건 아무래도 아쉬워 다시 찍은 춤추는 대뉴욕 장면. 전 사진보다 더 망했다.


오늘의 마지막 남은 불꽃은 이렇게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활활 태우고 간다.

아직 제대로 된 저녁도 못 먹었는데 자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머릿속에는 맥도날드의 햄버거와 숙소의 침대 생각이 절실했는데 결국 침대가 이기고 말았다. 숙소로 들어가야겠다. 이제 겨우 저녁 8시인데.


낡아도 낡은 티가 나지 않고 시간의 고풍이 느껴지는 뉴욕의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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