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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r 31. 2017

레퀴엠의 코니아일랜드에서

뉴욕 영화 여행

뉴욕 영화 여행에서 두 개의 축이 된 장소가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기만큼은 가야 한다고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했던 곳. 바로 코니아일랜드와 몬탁이다. 하나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의 테마가 된 장소다. 두 작품 모두 일생의 인연으로 사랑하게 된 영화이니 뉴욕까지 와서 그들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이번 여행이 다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싶다. 사실상 색채가 쪽 빠진 흑백의 여정이 되었을지도.


로컬 NYC에서 인접한 지하철역인 코트 스퀘어 스테이션 Court Sq으로 가는 길


뉴욕에서 세 번째로 묵은 숙소는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로컬 NYC(The LOCAL NYC)라는 곳이다. 여기는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중에서 유일하게 체크아웃을 미루고 싶었던 곳이다. (후기는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운 좋게 이른 시간에 체크인을 마쳐서 숙소 1층 카페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가뿐하게 테이크 아웃하고 코니아일랜드로 비장한 출발을 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외출인데, 싶었을 때 문득 보조배터리를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미 돌아갈 수도 없는 거리까지 와버려서 현재 반 정도 남은 배터리가 과연 코니아일랜드 여정을 마칠 때까지 버텨줄 수 있을 것인가 그 점이 가장 걱정이었다. 레퀴엠 음악을 들으며 걸어야 한다는 소소한 계획이 있었는데. 이것 참, 한낱 배터리 때문에 마음이 조이고 있는 꼴이라니.


롱아일랜드의 코트 스퀘어 스테이션 Court Sq Station에서 코니아일랜드까지는 지하철로 약 5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에 찍은 뉴욕의 전경.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코트 스퀘어 스테이션(Court Sq Station)에서 코니아일랜드(Coney Is - Stillwell Av/Surf Av)까지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웬일인지 지하철도 한 번만 갈아타면 된단다. 먼저 Brooklyn-Queens Crosstown 방향의 그린 라인(G 방향)을 타고 Church Av 역에서 내려서 이곳에서 다시 오렌지 라인(F 방향)의 Queens Blvd Express로 갈아타 Coney Is - Stillwell Av/Surf Av 역에서 최종 하차하면 된다.


평일 오후라 그런가 사람이 없어도 기이할 정도로 없었다. 하긴, 누가 월요일부터 코니아일랜드를 찾겠나. 

정작 나는 이 외딴 브루클린의 어디쯤에서 상당히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였다. 처음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아련한 꿈의 잔상을 좇듯 심상으로만 재생해보았던 레퀴엠의 그곳을 마침내 현실에서 찾아가고 있는 사실이 여간 실감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이거이거 허벅지라도 꼬집어봐야 하나 모르겠다. 레퀴엠의 세계관으로 생각해보자면, 나는 그 장소를 찾아감으로써 영화와 하나가 되는 쾌감을 잊지 못해 절박하게 여행만 계획하는 일종의 중독자나 다름이 없었다.


중간 역 처치 애비뉴 Church Av. 텅 빈 코니아일랜드행 지하철. 지하철에서는 포켓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서 오랜만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여행을 했다.




음악만 들으며 창 밖을 주시하다 보니 50여 분이라는 시간이 인연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 레퀴엠 OST만 반복해서 들었다. 이건 내겐 영화적 경험을 준비하는 일종의 의식, 혹은 예열의 과정이었다고 해야겠다. 드디어 코니아일랜드 스테이션 도착. 누구도 내리지 않는 텅 빈 개찰구를 유령처럼 흘러나와 Stillwell Avenue & Mermaid Avenue 출구로 속히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거리를 비추는 무용의 태양.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순화하는 파스텔의 색감.

삶의 끝자락을 연상시키는 허무하면서 무력했던 기괴한 공기.


코니아일랜드의 첫인상이다. 레퀴엠만 생각하다 보니 그 이미지에 도취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상 런 것은 아니었다. 레퀴엠은 코니아일랜드의 색감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유독 코니아일랜드가 환상적인 이미지로 담긴 것이 아니라 코니아일랜드를 꿈의 장소로 선택함으로써 레퀴엠이 곧 환상이 되어버린 경우였다고 할까.


역에서 바다를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시그니처, 파라슈트 점프를 따라가면 된다. / 가는 길에 핫도그로 유명한 네이선스 페이머스(Nathan's Famous)가 바로 보인다. 무려 1916년부터 운영한 곳이라는 문구가 당차게 적혀있다. 그 말은 100년 동안 이 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흘러온 시간도, 지나온 사람들도 이 작은 뇌로는 도통 가늠이 안 된다.

코니 아트 월


저 멀리 이정표 역할을 해준 파라슈트 점프(Parachute Jump) 덕분에 산책가로 수월하게 이를 수 있었다.

시야에 파라슈트 점프가 들어온 순간부터 머릿속은 이미 레퀴엠뿐이었다. 드디어 왔다, 코니아일랜드에 이렇게 오고 말았다.


코니아일랜드 브라이턴 비치 산책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보이는 사람이란 노인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힘없이 산책로를 돌고 있거나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요양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 속 장면과도 그대로 일치하기에 스리슬쩍 전율마저 돋는다. 웃고는 있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는 (광대 같은) 그림은 또 어떻고. 코니아일랜드의 시그니처인 파라슈트 점프를 포함하여 길게 이어진 유원지는 사실상 네이선스 페이머스처럼 100년 정도는 기본으로 역사를 간직한 장소가 대다수다. 그 시간의 위엄과 사람의 풍경에 한차례 기가 꺾인다.


장소의 분위기를 입어 평범한 팝아트 벽화도 기묘하고 섬뜩했다.


바다 갈매기 떼가 한 방향을 향해 우르르 몰려간다.

지나가면서 혼까지 쏙 빼가고 만다. 이쯤 되면 영화적 경험을 준비하자고 굳이 OST만 줄기차게 들을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코니아일랜드 역에서 바다를 향해 걸어오기까지의 10분. 이 장소 특유의 기이함에 취하는데 그 시간이면 이미 충분했던 것이다.


히치콕의 '새'만큼이나 무서웠던 바다 갈매기 떼


레퀴엠
REQUIEM


여느 장소가 다 그렇듯이, 코니아일랜드도 어떤 영화를 테마로 들고 오느냐에 따라서 그 장소의 색채가 선명하게 달라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연히 레퀴엠이었다. 원제는 레퀴엠 포 어 드림(Requiem For a Dream)이다.


이 영화를 본 순간부터 주인공 해리(자레드 레토)가 마약을 주입한 후 보게 되는 환상에 홀린 듯이 사로잡혔었다. 코니아일랜드 시퀀스는 그가 이루고자 하는(혹은 이룰 수 없는) 꿈의 잔상이다. 그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가질 수 없어 쓸쓸한 환상에 도취되어 저 장소만큼은 반드시 찾아가야겠다고 몇 년을 틈나는 대로 생각했었는데,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을 걷고 있는 나를 의식하게 되긴 하더라. 시크릿의 주문 같은 건 들이는 에너지에 비해 허망함이 클 수 있어 일상에서는 맹신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럴 때 보면 원하는 바는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희망 어린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받게 되는 고통과 상실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경우에만 한해서다. 만일 견디지 못한다면. 그 결말은 레퀴엠의 해리(자레드 레토)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될 텐데 이건 정말이지 끔찍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퀴엠은 일종의 환각제를 주입하고 보게 될 법한 환상과도 같은 영화다. (물론 주입해본 적은 없으나 느낌상 비슷하지 않을까 가늠만 해본다.) 영화는 사회가 허용하는 유일한 마약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표현을 이미지로 구현한 영화가 바로 레퀴엠이다. 보는 내내 정신이 없고 악몽을 꾼 것처럼 우울한데 그처럼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감정을 대리 체험해봄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이라는 것이 상당한 영화다. 여기에 맥주까지 곁들여 보게 되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온전한 환시적 체험이 되고 만다.


사실 줄거리보다는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

레퀴엠은 중독을 말하고 있는 영화다.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상적인 꿈이 있는데 그들은 꿈과 현실의 간극을 견디지 못해서 무언가에 중독이 됨으로써 그 괴리를 좁혀보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현실이 괴로울수록 중독은 깊어지고 그것이 이유가 되면서 꿈과 이상은 어그러져 오히려 현실에서는 파멸을 향해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중독이 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현실의 고통이라는 것. 그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위험한 영화라고 해야 하나. 가짜라고 하더라도 꿈의 이미지를 보고 싶어 기어이 환각제에 집착하는 인물들을 보면 마음 한편에 통증이 스민다. 영화에서는 그 수단을 마약으로 대신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솔직히. 이 세상에서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 않나.


레퀴엠 (2000) / 해리가 코니아일랜드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


코니아일랜드 환상의 장면은 해리(자레드 레토)가 마약을 주입한 후 창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이미지다. 그곳엔 그가 사랑하는 여자, 메리온(제니퍼 코넬리)이 있다. 그녀는 코니아일랜드 부둣가의 끝에 선 채로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리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데 이때 창문으로 작게 보이던 환상은 어느새 가상의 현실이 되어 해리를 집어삼키고 만다.


레퀴엠 (2000) / 해리가 코니아일랜드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

부둣가
드디어. 파라슈트 점프 Parachute Jump


파라슈트 점프를 등진 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있는 부둣가를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해리가 환상 속에서 걸었던 길이다. 기분이 묘하다. 그가 자신만의 환상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 역시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듣고 있는 레퀴엠 OST Summer OvertureConey Island Dreaming이 그런 감정의 늪으로 더욱 바짝 밀어 넣는 중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으로든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내가 영화와 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이란, 지금처럼 그 장소로 걸어 들어와 간접 체험해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레퀴엠 (2000) / 코니아일랜드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 자레드 레토 뒤로 파라슈트 점프가 보인다.

레퀴엠 (2000) / 코니아일랜드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


해리의 환상은 이루고 싶은 꿈의 이미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고 이름을 부르면 그녀 또한 그 소리에 반응할 수 있는 완벽한 세상. 이것은 아직까지는 해리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붙들고 있던 영화의 초반에 먼저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같은 환상이 종반부에 다시 한번 나오게 되는데, 그때 이르러 초반의 상황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보는 사람은 비극과 처절함으로부터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꿈의 테마곡. 인물들이 환상을 볼 때마다 배경으로 흘렀던 음악이다. 그 이름도 코니아일랜드 드리밍.

레퀴엠 (2000) / 해리가 코니아일랜드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

햇살이 너무 강해서 휴대폰에 담아 간 이미지가 예쁘게 담기지 못했다. 울고 싶었던 순간.


메리온(제니퍼 코넬리)이 서 있던 부둣가의 끝자락까지 걸어가는 동안 기묘한 감정을 체험했다.

어떤 고독감도 아니고 외로움도 아니었다. 요양하는 노인들이 하나 건너 벤치나 휠체어에 앉아 일제히 같은 방향의 바다를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정경이 차마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무거웠다. 아마 무기력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모든 기력이 쇠진하여 몹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의 생각 속으로 불쑥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지날 때마다 그 기운마저 내게 전이되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가끔 노인들을 기괴하고 섬뜩한 이미지로 담아내는 영화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레퀴엠이 그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그랬다. 여기서 등장하는 노인은 (때로는 광대처럼) 피하고 싶을 정도로 무섭고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무력하며 잔혹하리만치 섬뜩하게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노인이 그런 사람들이야, 라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그저 죽음에 근접한 외로우면서도 기계적인 존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레퀴엠 (2000) / 이 영화에 담긴 기묘하고 기계적인 노인의 이미지는 코니아일랜드의 풍경과 가장 유사했던 것 같다.


마침내 부둣가의 끝에 이르렀다.

그런데 영화에는 없었던 받침대 같은 것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마치 전망 포인트라는 듯이 가운데만 우뚝 솟아 있었다. 없었으면 사실 더 좋았으련만. 그래도 경치 하나는 좋았다. 극 중 메리온(제니퍼 코넬리)이 서 있던 가운데 자리에 서서 그녀가 보았을 바다를 내다보았다. 바다의 흐름이 두터운 융단이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탄력적인 물의 흐름은 처음 본다. 그야말로 바다마저 레퀴엠이다.


부둣가 끝에 있던 전망 포인트에 올라 찍은 사진. 그렇게 높지 않다. 봉긋하게 솟아 있는 언덕 높이 정도. 이 끝에 메리온(제니퍼 코넬리)이 서 있었다.


바다의 생김새가 장소마다 다르다는 건 여행하는 입장에선 아무래도 축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코니아일랜드의 브라이턴 비치도 그 특징이나 색감이 전례 없는 다른 것으로 보인 덕분에 바다 특유의 질감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게 되었다.


전망 포인트에서 왼쪽을 보았을 때의 풍경 / 조용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을 수도 있는 하늘. 여기서 보았다.

지나고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날은 코니아일랜드 여행을 위해서 날씨와 상황이 이상적으로 맞아떨어진 최상의 날이었다. 그다음 날은 건들거리는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축축한 코니아일랜드라니. 만약 그랬다면 이곳의 감흥이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겠지 싶다. 바랐던 레퀴엠의 환상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 마크 발레 감독의 데몰리션의 이미지는 떠올릴 수 있었겠지.



데몰리션
DEMOLITION


어디까지나 비가 내리는 상황을 가정해봤을 때.

그런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는 상실을 들려주는 영화, 데몰리션과 어울린다.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눈앞에서 아내를 잃었다. 그는 충격적인 사고를 겪었음에도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드러나는 슬픔이나 절망, 분노가 아닌 오히려 모든 감정이 마비된 사람처럼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자신이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내면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데이비스는 어느 날 망가진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 직원인 캐런(나오미 왓츠)에게 불만을 적은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데몰리션 (2015)


사랑인 줄 몰랐던 사랑


극 중 코니아일랜드는 데이비스가 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간직한 장소로 나온다.

평소에는 소중한 지조차 몰랐던 아내이기에 그녀를 잃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낼 수 없었던 데이비스는 캐런을 알게 되면서 의식하지 못했던 고통을 마주하며 조금씩 치유의 과정을 걷게 된다.


데이비스는 코니아일랜드에서 캐런을 만나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녀의 환상을 본다. 곧이어 아내가 바다를 좋아했다고 추억하며 캐런과 함께 그 바다를 뛰어다니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한다. 캐런은 데이비스에게 아내가 그립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음 이어지는 장면에서 데이비스는 샤워를 하다 문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터뜨린다.


데몰리션 (2015) / 코니아일랜드에서 아내의 환상과 함께하는 데이비스. 코니아일랜드는 상처를 드러내 비로소 극복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잠시 생각했던 데몰리션은 한편으로 밀어 두고, 다시 레퀴엠으로 돌아온다.


이제 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정반대 방향에서 떼 지어 몰려오는 구름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미처 뿌리치지 못한 채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실 진드막히 구름을 기다려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영화에서만큼은 파라슈트 점프 위로 흰 구름들이 뭉게뭉게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구름 한 점이 없었다. 그야말로 티 없이 맑은 블루다. 구름이 떠있는 풍경까지 기어이 눈에 담고 싶은 집착에 가까운 바람으로. 저 구름들이 이곳까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이미지를 두 눈으로 확인만 하고 돌아가야겠다.


저 멀리서부터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오던 구름들

기다리다 바닷가에 영화 제목도 끄적거려 보고.

한 곳에 몰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바다 갈매기들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통통한 배를 깔고 앉아 일광욕 중이거나 뒤뚱뒤뚱 주변을 깔짝이고 있거나.

왼쪽: 코니아일랜드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던 몽환적인 벽화. / 오른쪽: 벤치마다 한 명씩 앉아 먼 바다를 보고 있다. 이곳에 앉아 바다만 보고 있으면 어느새 시간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구름이 파라슈트 점프 위에 몰렸다.

이게 뭐라고, 소박하지만 원하던 풍경을 움켜쥐니 기쁨이 차오른다.



브루클린
BROOKLYN


조금 다른 이미지의 코니아일랜드는 존 크로울리 감독의 영화 브루클린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쓸쓸이고 적막이고 기괴고 다 떠나서 생기로운 코니아일랜드의 풍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50년 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당시의 코니아일랜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영화라고 할까. 사실 영화에서 이곳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소라고는 할 수 없다. 그저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가 토니(에모리 코헨)와 주말 데이트를 즐기던 장소였을 뿐이니까. 에일리스는 뉴욕 브루클린으로 건너와 정착한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다. 영화는 그녀의 삶을 통해서 고향의 의미와 더불어 지나온 과거를 미화하는 인간의 실수, 그리고 솜사탕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까지 얹어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쓸쓸한 이민자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브루클린 (2015) / 사람 복작 이는 코니아일랜드는 직접 보고 온 풍경이 아니지만, 같은 장소의 다른 분위기라는 것. 이런 걸 영화로나마 간접적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즐거운 경험이 된다.

영화 브루클린에서 볼 수 있는 대관람차


극 중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가 주말에 남자 친구와 코니아일랜드로 놀러 갈 예정이라고 하니 같은 하숙집에 사는 속물 같은 여자들이 그녀에게 수영복은 있니? 선글라스는 있니? 온갖 질문을 쏟아낸다. 이때 둘 다 없다고 대답하자 그녀들은, "선글라스는 꼭 있어야 해. 해변가에서 안 쓰고 있으면 다들 쳐다본데,"라는 말을 한다. 한창때의 코니아일랜드가 어떤 분위기의 장소였는지 얼추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브루클린 (2015) / 그들 뒤로 파라슈트 점프가 희미하게 보인다.

오래전, 잘 나가던 때의 코니아일랜드 사진이 이정표에 붙어 있었다.


이제 역으로 돌아간다.

옆으로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유원지 점포들을 보니 그 시간의 축적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곳곳에 운영을 시작한 연도가 적혀 있었다. 어떤 곳은 1934년, 어떤 곳은 1916년 등등. 이런 것만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100년 전의 광경을 상상해봄으로써 이미지화된 시간이라는 관념이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굳게 닫혀 있는 놀이공원을 철망 사이로 들여다봤다.

사람 한 명 없는 텅 빈 유원지. 아무래도 기괴하고 기이하다. 꿈에서나 볼 법한 이미지처럼. 혼자만 남은 디스토피아 같은 느낌도 든다. 오직 남은 건 회한뿐인 세상. 대니 보일의 28일 후를 보면, 초반에 킬리언 머피가 아무도 없는 런던을 혼자서 돌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느낀 감정과 지금의 것이 유사했다. 고립된 느낌 혹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


왼쪽: 멀리서도 보이는 광대 캐릭터. 저 그림 때문에 몇 번을 흠칫했는지 모른다.


역을 보니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출구로 나올 때는 멀리 보이는 파라슈트 점프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느라 역의 외관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새롭다. 나는 역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 맞은편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이거 하나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캬라멜 프라페를 테이크 아웃했다.


코니아일랜드 스테이션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건 이곳을 다녀간 것만으로 레퀴엠은 전보다 더 사적인 영화가 되었고, 그 영화와 나 사이에 연결의 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목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취한 셈이었다. 이제 레퀴엠을 보게 되면 이곳에 찾아와 묘한 꿈을 꾸었던 지금의 장면이 포개지면서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독특한 영화적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캬라멜 플랩 2.82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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