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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un 17. 2017

9일간의 도쿄 다이어리

여행을 다녀온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지금
9일간의 도쿄 이야기를 서서히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일부러 미뤄왔던 건 아닌데 여차저차 일 핑계를 앞세워 하루 이틀 흘려보내다 보니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벌써 31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의도치는 않았지만 여행과 글 사이 적당한 시간이 숙성되면서 누적된 기억이 잘 정리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는 지금, 두툼한 중심 기억은 그 존재감이 더욱 선명해지고 잔 기억은 슬며시 가라앉은 듯한 좋은 느낌도 듭니다.



이번 여행에는 큰 계획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도쿄는 어디 어디 가야 한다는 세세한 일정보다는 그 장소만의 분위기와 흐름이 저를 즉흥적으로 움직인 게 더 주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후지산이나 가마쿠라처럼 미리 염두에 두고 떠난 장소들은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와 같은 디테일은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거든요.



다만, 도쿄행 티켓을 구입한 그날부터 꾸준히 쌓아둔 것은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느끼고 싶은 어떤 특별한 정서라고 해야 할지. 도쿄가 제게 주는 정서를 놓치지 않고 잘 건네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는 게 아무래도 적절한 표현인 것 같네요.

처음으로 일본 드라마라는 걸 보기 시작하면서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구분 없이 찾아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간을 거쳐온 덕분에 제게 고독한 미식가라는 좋아하는 드라마가 생겼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한 편의 인생 영화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행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여행이든 항상 분명한 존재감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동네와 동네 사이를 지칠 때까지 걸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기쿠보 역에서 사기노미야 역까지 무작정 걷는 식입니다.
이건 여행을 다니면서 굳어진 습관과도 같은 건데 그 장소는 걸을수록 보이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날씨든 뭐든 가리지 않고 걷는 이런 융통성 없는 고집으로 인해서 저는 5월의 싱그러운 도쿄를 여행하고도 시꺼먼 얼굴이라는 훈장을 달고 돌아왔습니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 중입니다 ㅠ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등장하는 장소도 몇 군데 다녀왔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가보고 싶었던 곳, 바로 수도 고속도로 비상계단입니다.

소설의 시작점과도 같은 장소로 주인공 아오마메는 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달이 두 개 뜨는 평행의 세상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현실 세상과 평행 세상의 통로가 되는 중요한 장소인 셈이라고 할까요. 아마 그런 의미 때문인지 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이 계단을 두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부야에서 산겐자야 방향의 수도 고속도로 비상계단.


고독한 미식가를 따라 여행하던 중
어느 조촐한 이자까야에서 제 옆자리에 고독한 미식가의 감독이 앉아 그와 이야기까지 나누는 우연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당신의 드라마로 즐겁게 도쿄를 여행하고 있다고, 어쩌다 보니 이런 말까지 건네면서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저녁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고독한 미식가의 감독 미조구치 겐지 (KenJi Mizoguchi)와.

시즈오카의 온천 바닷마을, 아타미


도쿄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 시즈오카도 다녀왔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후지산의 흰 정수리를 보고 오겠다는 소기의 의지!


시즈오카 가와즈


결국, 시즈오카에서 머문 이틀 동안 비가 내리는 바람에 후지산의 장관은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계획에도 없었던 후지산 국립 공원의 드라이브 코스를 달려 산 정상 부근까지 올라보는 분에 넘치는 경험을 다 했습니다.

사실 목표라고 해봤자 후지산이 잘 보이는 어느 자리에 걸터앉아 저를 짓누르는 생각을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곰곰이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이날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 바람을 이루고 돌아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후지산

후지산 드라이브 트레일에서 내려다본 빼곡한 구름. 이 구름들 때문에 지상 가까이에서는 후지산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오감을 자유롭게 열어둔 여행이었습니다.
바람 타고 코 끝에 내려앉는 꽃향기의 기쁨이라든지 맑은 물에 한 손을 집어넣고 휘휘 저어 보는 즐거움이라든지. 꼭 사진만이 아니어도 몸에 남아서 변치 않는 그런 경험을 종종 즐겼습니다.


후지노미야의 명물, 야끼소바


기차 혹은 역에 관한 소소한 추억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일본 영화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역에 대한 낭만이 있었습니다. 역이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그 공간만의 색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건지, 장소와 시간에 대한 철학적인 감상으로 빠져들게 하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도쿄 여행은 여행과 일상이 절묘하게 혼합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일만 하고 하고 또 하고. 그러니까 낮에는 여행, 밤에는 일. 이런 식의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백 퍼센트의 도쿄를 여행했다기보다는 60의 여행과 40의 일상이 얽혀 있는 독특한 여정이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때문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많은 장소들 중 일부는 포기도 해야 했는데 이건 지금까지도 어쩔 수 없이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가장 많이 보았던 장미꽃. 향을 맡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기념품도 장미 향수를 골랐습니다.


도쿄에서는 꽃길만 걸었습니다.
말 그대로 꽃길 말이죠. 그곳은 집집마다 거리마다 종류별 꽃을 심어놓아 눈을 두는 그곳에 반드시 한 송이의 꽃이라도 피어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어이 가는 장소마다 꽃이 피어있는 걸 확인하면서 이건 어느 동네만의 특징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꽃의 감성이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촬영 장소에도 다녀왔습니다.
바로 가마쿠라인데요, 영화의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바닷마을이라 생각했던 것보다도 배로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가마쿠라에서

도쿄 스카이트리 / 이번 도쿄 여행의 동반자이자 가이드나 다름이 없었던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고로


이번 도쿄는 두 번째 여행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여행 때 가본 장소는 웬만하면 겹치지 않게 돌아다니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이상하게도 도쿄 타워만큼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때는 밤이었으니 이번엔 낮에 보자! 라는 생각으로 찾아가 처음으로 붉은 도쿄 타워를 보았습니다. 도착한 순간, 첫 여행의 기억에 거센 화력이 붙어 그만 걷잡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신주쿠


그리고 마지막 인천행 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번 여행은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신주쿠 여행으로 매듭을 지었습니다.

정확한 촬영 장소도 알지 못하면서 마냥 캡처해 온 장면들만 돌려보며 헤매기도 엄청 헤맸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결국엔 이렇게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이 남긴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그 자리에서 함께 경험하고 돌아왔지만 말이죠.


신주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촬영 장소에서


밀린 여행기만 해도 깔려 죽을 만큼 쌓여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제가 경험한 도쿄를 끝까지 남겨볼까 합니다. 어쩐지 그때를 처음부터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데 그럼에도 즐거움이 앞서는 걸 보면, 이번 도쿄 여행이 확실히 좋긴 좋았던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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