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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un 26. 2017

최악의 하루로 서울을 여행한 날

영화 최악의 하루를 따라 서울을 여행한 날.
워낙 영화 자체가 서울의 서촌과 남산 일대를 기이한 분위기로 예쁘게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야기도 그 흐름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굳이 하게 만들 정도로 묘하게 매력적인지라.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함께 서서 바라본 걸 같이 보고 싶고, 생각한 걸 그대로 공감해보고 싶은 마음, 그 감정이 나를 주저없이 서촌과 남산으로 향하게 했다.   

서촌


친구와의 약속시간에서 두 시간쯤 먼저 도착해 서촌 일대를 걷기 시작했다.
사실 어디에서 이 영화가 촬영된 건지 정확한 장소는 알지 못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이 골목에서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 보면 눈에 익은 장면들이 스스럼없이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한 게 전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촌

이전 개미 둥지라는 일본식 가정집이 있던 자리다. 영화에서도 개미가 건물을 기어 다니는 독특한 외관으로 등장했다. 영화에서 한예리는 이 건물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긴다. 그리고 그때 이와세 료가 그녀에게 길을 물었다. (지금은 지도에서 갤러리 자인제노를 찾아가면 된다.)


어젯밤 고향 루모이의 꿈을 꾸었다. 오래된 벽돌과 낡은 집들 틈에서 꽃들이 피어올랐다. 인적 드문 황폐한 도시가 순식간에 꽃들로 메워졌다. 여행지에서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꿈 덕분에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도 막연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면 분명한 시작점은 하나 있는 것이 좋았다. 그곳이 바로 갤러리 자인제노(구 개미 둥지)다.
은희(한예리)는 이 앞에서 료헤이(이와세 료)를 알게 된다. 그녀는 류가헌이라는 곳을 찾고 있던 료헤이에게 길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와 동행에 나선다.


료헤이와 서촌을 걸으며 류가헌을 찾고 있는 은희.


이야기는 두 사람이 서촌을 걷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 오프닝의 자연스러움이 물 위로 조약돌을 던졌을 때 퍼지는 파동처럼 잔잔해서 좋았다. 어떤 거창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은희가 료헤이에게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함께 걷는 과정을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데 뭐랄까, 그 이미지가 하나씩 포개지면서 서촌의 아름다움은 물론 영화 전체를 떠다니는 향이 담백하게 우러나 그만 한 잔의 차를 음미하는 느낌처럼 다가왔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걸었던 서촌은 마땅한 명소가 아니라 주로 숨은 골목이 그 배경이다. 그래서 여기엔 집 주소를 올릴 수는 없을 것 같아 사진만 올린다.


갤러리 자인제노를 시작으로 집집의 골목을 파고들기 시작하니 생각했던 대로 은희와 료헤이가 걸었던 그 장소들이 하나둘씩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걸었던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오늘처럼 무덥지도 않았다. 그저 긴팔을 입고 걸어도 적당히 따뜻하고 선선함이 살갗에 닿아 충실히 영화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그런 날이었다.



스스로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을 만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을 즈음
한낮의 서촌이란 최악의 하루에 담긴 그 정서 그대로였다는 것, 그러니까 조용하면서도 고즈넉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동네였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가 끄덕끄덕.  



서촌에서 가장 찾고 싶어 한 장소가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검색을 해도 비슷한 내용조차 나오질 않는 거다. 도대체 어떤 장소를 찾아 걸어야 하는 건지 그저 막막해져 걸음을 뚝하고 멈춰버렸다. 꼭 배터리가 다 된 사람처럼 말이지. 이 단어 저 단어 조합해 온갖 참신한 말로 검색을 해보아도 결과가 떠오르질 않는 걸 보니, 이 장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지극히 드문가 보다 하기도 했었다.



길을 알려주어 고마운 마음에 료헤이는 은희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한다.
약간의 어색함은 감돌지만 부드럽게 흘러가는 대화를 통해서 이성 간의 긴장감이 싹틀 무렵, 은희는 그날의 두 번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찾고 있던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두 사람이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장소.


지나치면 그만인 장면일 수 있지만 나는 두 사람의 헤어짐의 순간이 참 좋았다. 상대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 교차하던 수많은 순간들 가운데에서도 은희가 료헤이와 있을 때만큼은 가장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전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당신한테 거짓말하기는 어렵네요


이날 은희는 료헤이를 포함해서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그녀는 상대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필요할 때는 거짓말도 자연스레 할 줄 안다. 영화는 문득 어느 모습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사실 내가 생각했던 답은 이랬다. 그 모든 모습이 다 은희가 아니었겠냐는 것.


골목 하나 돌고 보니 African Coffee House라는 입간판을 보고 여기다! 싶었다. 영화 장면에 스치듯 African이라는 단어가 보였는데 그걸 단서로 겨우 찾았다.




매 순간 거짓을 일삼는 모습까지도 나의 모습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사는 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려나 생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난 나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모른다. 가족이든 친구든, 직장이든 그 앞에서 약간이라도 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엔 어느 순간 진짜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의 간격에서 버거움을 느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지는 때가 찾아오게 되더라.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 로 시작해서 끝도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급기야 자존감까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다.

이건 첫 직장을 그만둘 때 경험했던 감정선이다.   





카페 식물


친구를 만나 익선동으로 넘어왔다.
은희와 료헤이가 한낮의 가벼운 커피 한 잔을 나누었던 그 카페, 식물에 찾아오기 위해서.



어스름한 저녁에 찾아와서 그런지
영화만 보고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음, 채광 잘 드는 깨끗하고 담백한 카페의 분위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실내 포차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최악의 하루에서는 은희와 료헤이가 식물이라도 된 것처럼 카페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무척 밝고 화사해 보였었는데 밤의 이 공간은 오색 조명이 휘황한, 낮과는 대비되는 복작이는 카페 중 하나였다.



영화 속 카페 식물의 분위기는 이렇다 / 밤의 카페 식물


이런 분위기가 깔리니 당연히 커피보단 칵테일이었다.
마치 조명에 홀린 사람처럼.



내가 상상했던 은희와 료헤이만의 분위기는 간데없고 그 자리엔 오직 밤을 위한 바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영화의 감흥도 사실상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여긴 그로 인한 아쉬움이 좀 짙게 남아서 날 좋은 날의 따사로운 오후를 골라 다시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한다.



한편에서는 회식의 자리도 갖고 있을 만큼 흥이 폭발하는 분위기였는데,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작지 않아서 바로 앞에 앉은 친구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려운 자리였다.


반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목적이었던 우리는,
결국 오랜 시간 머무르지 못하고 의자에 자국 하나 남기지도 못한 채 스르르 그곳을 빠져나왔다. 칵테일은 남기기가 아까워 테이크아웃으로 요청.


한낮에 다시 찾아올 그날이 기대되는 카페 식물.





그리고, 남산


최악의 하루,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남산이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는 남산을 가장 여운이 진한 이야기와 결말로서 신비롭게 담아낸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대체로 남산에서 벌어진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여기서 은희는 두 번째 남자 현오(권율)와 세 번째 남자 운철(이희준)을 만난다.


배우이지만 잔뜩 스타병에 걸려서 눈 코 입을 다 가린 채 은희를 만나러 온 현오. 남 눈치 보기에 바쁜 권율의 연기가 압권이다.


워낙 남산 걷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느 곳이 촬영지인지도 모르면서 이곳에서도 마냥 반갑다고 산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은희가 현오와 걷던 길도, 운철과 해프닝을 겪던 장소도 알아서 발견할 수 있겠지 마음 편히 생각하면서.



서울타워 앞에서 석양을 보겠다고 이곳을 찾아온 것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이번엔 영화를 따라 너를 달리 보고 말겠다며 남산을 기어이 다시 찾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볼수록 사랑스러운 게 너니까.



굵직굵직한 추억이 곳곳에 스며든 남산.
사진첩 같은 장소라고 할까, 생각하고 싶을 때마다 두고두고 펼쳐보아도 그때마다 새로이 좋을 것만 같다.



서울타워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했다. 그리고 송신탑이 잘 보이는 단골 자리를 잡아 물끄러미 석양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서서히 내려오는 저녁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게 꼭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비행기를 타야만 여행인가, 동네를 한 바퀴 걷더라도 평소와는 다른 게 보인다면 그것도 다 여행이지 뭘.



석양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즈음 서울타워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곳이 잘 보이는 어느 벤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눈으로도 들릴 만큼 태양이 저무는 광경을 째깍째깍 바라보면서 지금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울지도 모를 한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해가 저문 후 둘레길을 돌아내려오면서 료헤이가 은희를 두 번째 마주쳤을 때 들려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온통 불확실함 속에서 불안해하는 나에게 누군가 확신을 가지고 들려주는 위안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영화는 열린 결말이다. 아니,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수많은 결말이 이 이야기의 뒤를 수놓고 있겠지만 나는 료헤이가 구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은희였던 거라고, 그렇게 상상해보기로 했다. 더 넓은 의미로 말해보자면 은희가 나 자신, 그리고 료헤이가 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계실 신으로서.


이 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저 길에 눈이 내리고 한 여자가 걸어옵니다. 무표정하게 내리는 눈 사이를 걸어오다가 뒤를 돌아봐요. 어두워진 저 산책로 너머로.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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