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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an 28. 2017

바닐라 스카이의 타임스퀘어에서

뉴욕 영화 여행: 영화에 담긴 타임스퀘어 이야기

다음 영화 장소는 타임스퀘어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역과는 보라색 노선으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다.


사실 평소 같았다면 이 거리쯤이야 가뿐히 걸었을 테지만 시차 부적응으로 인한 피로가 생각 외로 버거웠던지라 지하철을 선택했다. (게다가 티켓이 언리미티드 라이드이니 그 값어치 톡톡히 하자는 생각도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건,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아니 잊었다고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또 다른 기억에 묻혀버린 과거의 한 장면이. 그 공간의 분위기와 냄새로 단번에 표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곳을 걸었었고 몸도 그것을 기억한다. 이 통로의 한쪽 끝에서 지금의 나를 향해 걸어오는 과거의 내가 보였으니까.


늦은 밤 이곳을 지나며 친구와 웃었던 기억, 타임스퀘어를 본 후 한껏 감동하여 쫑알쫑알 정신없이 떠들던 기억.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고작 지하 도로의 칙칙하고 눅눅한 분위기 하나로 기록조차 남겨놓지 않았던 철없던 시절의 여행이 부표처럼 심해 저 밑바닥에서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함께 여행했던 친구에게 이 통로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추억을 공유할 친구가 있다는 건, 여행만큼 큰 축복이다.


여전히 복작복작하다.

고개를 힘껏 들어 올려도 자연스레 입이 쩍 벌어지는 고층 빌딩 숲 한 가운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휩쓸리듯 걸어 다니는 기분인데도 결코 불쾌함은 없었다.

역시 뉴욕에 왔구나, 라고 실감하기에 타임스퀘어만 한 곳은 없는 것 같다.



스파이더맨 3편의 오프닝에서 타임스퀘어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피터 파커가 국민적 영웅이 되어버린 스파이더맨 광고를 직접 보고 있는 장면이다.

대낮에 자신의 광고를 흡족하게 바라보면서 아이들에게도 깨알 홍보를 하는 귀여운 장면.


그 인기를 실감하게 만들기엔 역시 타임스퀘어 광고 게시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테다.



뉴욕의 상징인 노란색 택시들이 지칠 줄도 모르고 경적을 울리고 있다.

뭔가 엄청난 도시로 상경한 시골쥐가 되어버린 느낌.



NYPD 마크를 보면 떠오르는 즐거운 기억 한 조각.


지난 뉴욕 여행 때 함께 다닌 다섯 명의 친구들은 잊을 수 없는 기념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날이었는데 휙휙 지나가는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미처 찍어달라는 요청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한 명이 네 명을 찍어주면서 그렇게 교대로 사진을 남기고 있을 때. 어깨 듬직한 우락부락 NYPD 경찰이 내가 찍어줄까? 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우리에게 농담도 던지면서 분위기를 풀어주던 그 경찰은 기가 막히게 자연스럽고 눈부신 순간의 명장면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기존의 여행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장소가 주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이 뭔지도 모를 만큼 어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행지, 아니 세상이 내게 줄 수 있는 양분을 흡수만 하던 때였는데 지금의 여행은 그동안 내가 경험하고 보았던 것들을 조금씩 발산하기도 한다. 아주 조금씩. 비로소 소통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멋지다.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경험이 되는 듯한 그 기분. 그래서 여행이 더 풍족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보다 개인적인 추억으로 남는 것도 있고.




퍼스트 어벤저


캡틴 아메리카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지금은 믿고 보는 마블 캡틴 아메리카라지만 퍼스트 어벤저는 속편보다 못하고 그 기대에도 못 미치는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한없이 왜소하고 자신감도 없는 남자 스티브 로저스가 '슈퍼 솔저' 프로젝트를 거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의 미국 영웅이 되기까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세계 전쟁 이후 약 70년간 냉동되었다 깨어나는데 이때 그 놀라움에 박차고 뛰쳐나온 첫 번째 장소가 타임스퀘어였다.


과거에서 미래로의 시간적 흐름을 실감하기에 타임스퀘어보다 제격인 곳은 없었을 테니.



타임스퀘어를 처음 보았을 때의 반응은 여느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로 위 사진 속 스티브 로저스의 표정을 지었던 듯싶다.)


미국이 첫 해외여행지였던 나는 이런 장소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두 눈으로 정확히 목격한 후 굉장한 충격에 빠졌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세상이란 대체 얼마나 큰 걸까. 여행에 대한 꿈도 바로 이때 밑그림처럼 슥슥 그려 놓았던 것 같다.




톰 크루즈 주연의 바닐라스카이.

이 영화 속에 타임스퀘어의 다시없을 명장면이 담겨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런 모호한 소재의 영화를 좋아해서 가끔씩 꺼내보는 작품인데 그중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가장 좋아한다.



재력이든 외모든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진 데이빗 에임즈(톰 크루즈)는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되어 사랑을 누려보기도 전에 이전에 만났던 여자 줄리(카메론 디아즈)가 그와 동반자살을 시도하면서 데이빗은 얼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데이빗 주변에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텅 빈 타임스퀘어를 상상할 수 있는지.


바닐라스카이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톰 크루즈는 평소와 다름없이 멋진 차를 끌고 출근길에 오른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톰 크루즈는 급기야 타임스퀘어에 이르러 현실일 리가 없는 지금 이 상황을 보면서 꿈에서 깨어나려는 듯 절규를 한다.



사람이 없을 리가 없는 타임스퀘어가 적막에 휩싸였으니 얼마나 기이하고 무서운 장면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만큼 두려운 광경이다. 그만큼 잊을 수 없기에 매력적이기도 하고.


이 장면은 그래픽 효과가 들어가지 않은 실제 촬영 장면이다.

뉴욕시에서 전례 없이 일요일 하루 타임스퀘어를 막고 촬영하는 것을 허가했다고 한다.

사람이 없는 고요한 타임스퀘어는 그렇게 바닐라스카이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기묘한 장면이 되었다.




제임스 딘의 사진도 빠뜨릴 수는 없지.


비 내리는 날. 입에 담배를 문 채 무심히 타임스퀘어를 걷고 있는 제임스 딘의 모습.

대중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그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난 대표적인 사진이 아닌가 싶다. 이 사진은 그와 우정을 나눈 친구이나 사진가인 데니스 스톡의 작품이다. 제임스 딘과 데니스 스톡의 우정은 작년에 개봉한 영화 라이프에서도 볼 수 있다. 인물은 각각 데인 드한과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했다. 물론 그 영화 속에 이 사진의 일화도 담겨있다.


https://medium.com/everythings-interesting/james-dean-a-life-in-pictures-5c0e0877472#.1daoweidn 1955년, 타임스퀘어의 제임스 딘. 데니스 스톡의 작품이다.

오른쪽: 그때의 제임스 딘을 오마주 한 리브 타일러의 사진


영화 라이프에서, 데니스 스톡은 비가 내리는 타임스퀘어를 보며 느닷없이 제임스 딘에게 사진을 찍자고 말한다. 그는 한 발 앞서 걸으며 특유의 반항적인 분위기로 걸어오는 제임스 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설정이 아니었기에 클래식으로 남아버린 바로 그 사진을.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한결같은 장소에 존재했던 타임스퀘어.


시간이 축적된 장소에서는 누리더라도 걸맞은 예우는 기본적으로 갖추고 즐기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이곳에 사는 뉴요커들을 보면 도시를 향한 사랑이란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눈으로 만져진다.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태도인지. 짧은 여행을 통한 직접적인 느낌과 섹스 앤 더 시티의 간접적인 느낌이 혼합된 것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에 공감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적어도 소수만이 누리는 특별한 뉴욕은 아니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생각했던 건 뉴욕을 거쳐간 수많은 (존경하고 혹은 좋아하는) 명사들을 생각해보면 나라도 자연스럽게 도시를 아끼고 싶다는 마음이 들 거라는 점이다. 그들이 사랑하고 아꼈듯이 나도 사랑하고 싶은 그런 느낌. 오랫동안 이 도시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왼쪽: 1951년 1월 1일. 타임스퀘어를 올려다보고 있는 오드리 헵번. http://www.vintag.es/

오른쪽: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패배를 인정한 직후 한 해군이 보여준 기쁨의 키스 세레모니. 그 순간을 담은 사진은 타임스퀘어를 기념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 http://www.vintag.es/

거대한 몰몬교 광고가 쉴 새 없이 나와서 화들짝 놀랐었다. 5, 6년 전 이곳에서는 무한도전 비빔밥 광고가 나왔더랬다. :)


첫 뉴욕 여행 때는 집을 빌려서 12일 동안 머물렀었다.


도착한 날 저녁, 가장 먼저 타임스퀘어를 찾고 크게 감동했던 나는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른다는 아쉬움으로 매일 밤 이곳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겠다는 무모한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폭설로 인해 빨간 계단인 TKTS(Tickets의 약자)가 차단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타임스퀘어를 찾아와 하루 일정을 매듭지었었다. 유치한 생각인데 적어도 난 타임스퀘어 11번 가본 사람이야. 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생각이 어려서 질보다 양이 중요한 여행이었다.



빨간 계단에 앉아 친구와 5년 안에 뉴욕에 다시 오자! 라고 약속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5년이 그렇게 긴 시간이었다는 걸 여기서 체감한다.

겉보기에 타임스퀘어는 그대로인데 나만 변해버렸다. 좋은 걸 보면 방방 뛰거나 눈물 뚝뚝 떨구며 감동하는 마음이란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땐 5년 후라면 뭐라도 달라져 있을 줄 알았다. 대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5년 후엔 패션 에디터가 되어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꿈도 꿨었다. 그때가 되면 나도 월급 받으면서 즐겁게 직장 생활하고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또 다른 자유가 주어질 거라고.


꿈대로 패션지에서도 일해보고 직장 생활도 했었지만

현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더라. 설사 상상했던 대로 흘러가더라도 내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사였다. 지금은 1년 후조차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어디선가 글은 쓰고 있겠지 라는 거.



* 이번 여행에서도 매일 저녁 타임스퀘어를 찾아갔다.

나머지 영화 이야기도 그때그때 나누어서 풀어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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