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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an 14. 2017

이터널 선샤인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뉴욕 영화 여행: 영화에 담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이야기


처음 묵었던 숙소는 브루클린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튜던트 레지던스였다.

여기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차고 넘치니 별도의 포스팅으로 다루기로 한다.



Marcy Av 역에 도착했다.

구름을 보니 퍼뜩 기억이 났다.

유난히 낮게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몽글몽글한 푸른 구름들. 이곳에서 살았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머릿속에 실처럼 작게 삐져나와있는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겨보니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쏟아져내렸다. 사람은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다는 말. 맞는 것 같다. 다만 그 기억이 머릿속 어디에 있는 건지를 모르는 것일 뿐.



그러고 보니 브루클린은 처음이다.

미드에서 보면 (특히 섹스 앤 더 시티. 여기서는 택시도 브루클린을 거부한다) 맨해튼 사람들은 브루클린을 마치 다른 나라나 혹은 뉴저지라도 되는 양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서 분리 취급을 하던데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긴 하다. 골목 하나 돌면 제이지스러운 미국인들이 껄렁껄렁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 뭐, 무섭지는 않은데 유쾌한 분위기는 아닌 그런 인상이다.



인터내셔널 스튜던츠 레지던스는 기숙사 분위기의 호스텔이다.

역과 맨해튼과의 접근성이 좋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브루클린 여행을 위해 선택한 숙소일 뿐. 자세한 후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체크인 시간에 한참 못 미치는 이른 아침에 도착한 바람에 세수와 머리만 감고 맨해튼으로 출발했다.



덜커덩거리는 뉴욕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넜다.

이 다리가 뭘까, 예쁘다. 싶었는데 윌리엄스버그 브리지였다. 매일 이 다리를 건너 출퇴근하는 뉴요커들 사이로 꼭 낑긴채 멍하니 다리를 구경했다. 사실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도 공허하고. 정말 미쳤다. 여기가 뉴욕인데!!


원래는 타임스퀘어에서 온몸으로 뉴욕을 받아들인 후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자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역에 이르게 되어 충동적으로 하차했다. 꼭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에서 뉴욕에 처음 도착한 조 벅처럼 행동했다. 지하철도 헤매고 나가는 길도 헤매고, 그러나 누가 보면 100퍼센트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을 것이고.



역에 내려서도 바로 터미널 메인 홀로 나가지 못 했다. 

이곳 어디쯤에서 마릴린 먼로가 사진을 찍었었는데, 하면서. 그랜드 센트럴 역 표지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마릴린 먼로. 이제는 그랜드 센트럴이 아닌 42 St라는 표지로 바뀌어서 정확한 위치는 끝내 찾지 못 했다.




사람들이 물처럼 빠져나가는 곳을 따라서 함께 휩쓸려나가니 어느새 중앙 홀에 이르러 있었다.

중앙 홀로 연결되는 곳 어디쯤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가 촬영되었다.


주인공 로저 손힐(캐리 그랜트)은 영문을 모르는 음모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이곳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중앙 홀이다.
여기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함께 도망을 쳤었다. 영화에서의 좋았던 기억과 나의 추억을 연결하려고 뉴욕까지 왔으니. 그 얼떨떨함 속에서 감춰져있던 감동이 슬며시 배어 나왔다. 내 시간이 조금씩 뉴욕에 맞춰지고 있었다.




영화 속 장면을 찾아보려고 2층 발코니로 올라왔다. 

그런데 모르는 사이에 애플 로고가 빨간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처음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그런가, 중국인을 의식한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에이즈 자선 사업의 일환이란다.




애플 매장을 비집고 들어와 안쪽 발코니에서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여기구나, 싶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보았던 곳. 

두 사람은 이별했다. 그 후 클레멘타인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자신도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최근 기억부터 서서히 지워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함께 웃고 행복했던 순간들까지 이르는데. 그제야 조엘은 그녀를 잊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조엘은 기억 속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그녀가 없는 기억 속으로 함께 도망을 치게 된다.




그때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다.
뭉클했던 감정이 퐁 하고 터져버리던 장면. 지우고 싶었던 연인이지만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니 누구보다도 기억하고 싶어진 것이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적어도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나는 클레멘타인처럼 기억을 미련 없이 지워버리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냥 모든 걸 기억하고 싶다.


 


또 하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서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약 60년 전의 이곳을 돌아볼 수 있다.



영화 속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60년 전에도 이렇게 북적북적

수많은 관광객들이 발코니에 기대어 중앙홀을 내려다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룬다.


왼쪽: 천장 무늬 / 오른쪽: 동쪽(EAST) 발코니와 서쪽(WEST) 발코니로 나누어져 있다.

인포메이션 센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인포메이션 센터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살인 누명을 쓴 캐리 그랜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그것을 본인이 발견하고는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수색 중인 경찰을 피해 선글라스를 낀 채 황급히 벗어나는 장면이다.




맨인블랙 2편에서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볼 수 있다.
정말 좋아하는 두 배우, 토미 리 존스와 윌 스미스가 자르다의 빛이라는 어떤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해 들르는 장소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터미널에 설치되어 있는 라커에서 단서를 찾는데, 라커는 보지 못 했다. 어쩌면 영화 때문에 설치된 것인지도.



                                                                         오른쪽: 뒤로 보이는 인포메이션 센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프닝 시퀀스에서도 볼 수 있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그때의 인파나 지금의 인파나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극중 캐리 그랜트가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선글라스를 낀 채 기차표를 구입하려고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마침 직원이 수배 중인 그를 알아보고는 몰래 신고를 한다. 그 사이에 캐리 그랜트는 표도 없이 기차에 탑승해버린다.

캐리 그랜트가 터미널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에서 급하게 전화를 사용하는데, 지금은 부스가 없다. 장면으로 추측해보면 지금 Customer Service가 있는 자리에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공중전화 장면을 촬영한 듯하다.



사실 테러에 대한 감이 없었는데, 여기저기 서성이며 감시 중인 군인들을 보고는 그제야 체감했다. 
그들은 정말 제로다크서티나 허트로커에서나 봤던 그런 무장 군인들이었다. 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들 앞에서는 사진 찍기도 괜히 움츠러들어 가장자리만 밟고 지나다니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때 알았다. 내가 지금 적어도 테러가 일어날 확률로만 따지자면 한국보다는 배로 높은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을.



어쨌든 기분 좋게 첫 영화 촬영지를 다녀간다. 

이제 타임스퀘어로 가려고 지하철에 앉아 기다리는데 역에서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흘러나왔다. 무심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득 마음이 따뜻해졌던 건 팁 통 옆에 붙어있던 이 남자와 여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과 그곳에 쓰여있던 글귀였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프로포즈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누군지 몰라도 그 여자는 참 행복한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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