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마루 Jun 24. 2019

이별 후에 만난 홍콩

9박 10일 홍콩 영화여행 - 프롤로그

프롤로그


7년의 연애가 끝이 나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갈 무렵.

스스로를 추스르기 위해 떠난 첫 번째 여행지는 홍콩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다. 그때의 나에게 과거란 더 이상 내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떠올릴수록 괴롭기만 한 통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행하며 아파했던 그 순간조차도 적절한 낭만과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미화된, 그저 향긋한 기억일 뿐.


그러고 보면 인간의 기억에는 이런 간사한 구석이 있다.

두 번째로 찾은 홍콩은 여전히 더웠고, 또 따뜻했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화양연화가 있었다면 그건 이곳 홍콩과 관련이 있었다. 영화를 사랑하게 된 이유, 스테이크를 좋아하게 된 계기 등. 삶에서 중요한 즐거움 몇 가지가 모두 홍콩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에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해피투게더 中

홍콩에서 중경삼림 보기


아비정전, 무간도, 화양연화, 중경삼림, 락천사, 희극지왕, 해피투게더, 색계, 용등사해, 러키가이, 열혈남아, 첨밀밀, 폴리스스토리, 러시아워, 쾌찬차, 프로텍터, 다크나이트 등. 홍콩에 머물면서 다시 본 영화들이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지금 중경삼림을 보고 있는 이곳은 홍콩이고, 내일 아침 눈을 뜨게 될 장소도 홍콩이며, 저 장면 속의 아름다운 장소 또한 홍콩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여행. 물론 그 상상을 현실화한 시점이 이별 직후라는 사실이 살짝 유감이기는 하지만.

아비정전의 캐슬로드 /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그런데 어떻게 보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한참 공허함을 느낄 땐 중경삼림의 임청하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웃음이 고플 땐 희극지왕의 주성치를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해피투게더의 양조위와 장국영의 마지막 눈물을 볼 땐.. 마침내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에 대하여 마음을 다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동안 보고 또 본 영화들이었지만 이제야 주인공의 아픔을 다른 시각으로, 다른 깊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크나이트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희극지왕의 섹오비치


한 커플을 만났다.

주성치가 장백지에게 코믹 연기를 지도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약간의 지탱은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영화 속 나무 아래에서 그 장면을 재연해보는 커플이 있어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동의를 구하고 그들의 사진을 남겨왔다.



세상 곳곳에서 영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영화 여행을 하며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랄까.

희극지왕의 섹오비치, 가스등계단

무간도의 흔적


란타우섬의 청동좌불상을 찾았고, 다음 날에는 샤틴 만불사에 올랐다.

불교에서는 고통이 극심한 지옥을 가리켜 무간지옥이라고 한다. 현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던 나는 이 무거운 마음을 덜어달라고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두 장소에서는 연약한 한 인간의 마음으로 종교를 초월한 기도를 올리며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미워하는 마음

자책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

후회하는 마음

비관하는 마음

절망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그리고 돌아보는 마음


이곳에 두고 갈 수 있기를.   

무간도의 란타우섬과 샤틴 만불사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맥도날드
난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일 줄 알았는데 때로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더군요. 그이는 전에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죠. 이 순간부터 영원히 날 기억하겠노라고. 하지만 이제 난 시계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야기하죠. 그를 잊어야 한다고. 바로 그 순간부터 말이죠.

아비정전 中
퍼시픽 커피

스탠리에서


볕이 쨍한 어느 날에는 유덕화의 용등사해를 찾아 스탠리를 걸었다.

바다를 곁에 둔 아름다운 이곳에서 수많은 여행자들 사이를 비집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라. 전날 밤에 영화를 다시 보고 찾은 곳이었기 때문에 가죽 재킷을 입은 유덕화가 금방이라도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이번 영화 여행에서는 소리도 담아왔다.


휴대하기 좋은 줌 H1을 들고 다니며 훗날 기억하고 싶은 소리들을 기록했다.

페리에서는 물결치는 빅토리아 하버의 소리를, 양조위가 사랑한 카우키에서는 식당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침사추이에서는 비록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듣기에는 좋았던 홍콩 사람들의 활기 넘치는 말소리들을 담았다.


당분간, 그러니까 길게 잡아 한 1년 정도는 홍콩 생각에 몽상하는 일이 없도록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9박 10일을 잡았지만 사실 그렇게 부지런히 돌아다녔음에도 결국 못 가본 곳은 남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홍콩을 다시 찾아야 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때로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현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흐른다.   

폴리스스토리의 페리

낮과 밤,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와 완차이를 오가며 빅토리아 하버를 즐겼다.

특히 빅토리아 하버는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찾아 각각 다른 자리에 앉아서 홍콩의 야경을 누렸다. 그곳에서는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음악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들은 덕분에 노래에도 홍콩이 기록되었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잘만 흘렀다. 나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오든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

하늘이 푸른색에서 검은색이 될 때까지 하버에 앉아 바닷바람만 쐬어도 조금도 심심하지가 않았다.

다만 외로움은 있었다. 둘에서 하나가 된 그런 외로움. 그런데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홍콩 영화의 영향인지 고독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도 같다. 고백하자면, 자기 연민의 단계를 지나 어느 순간에는 이런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뭔지 모를 희열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음, 어쩌면 그건 자신의 비극에 대한 카타르시스였을지도.

러키가이의 에그타르트, 그리고 맥도날드


입이 짧아 맛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름 식도락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결과는 로컬 음식 반, 맥도날드 반, 나머지는 카페 샌드위치. 열흘의 끼니는 이렇게 돌아가면서 골고루 때웠다.


로컬 음식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았던 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카우키의 소고기 국수였다.

주성치의 러키가이

처음 홍콩을 여행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2014년 10월, 그러니까 벌써 5년이 다되어가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에도 카우키를 방문했었는데 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만 보고 더위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우리는 음식은 깔끔히 포기했었다. 코앞에서 돌아서며, 어떤 맛일까. 언젠가는 먹어볼 수 있겠지 생각했던 게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현실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때 하는 게 좋다.

기회라는 게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거니까.

에그타르트, 카우키의 국수, 그리고 맥도날드
당조(Sweet Dynasty)에서 새우 딤섬과 국수

5년 전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개인의 역사로는 변화가 많았다. 그런데 홍콩은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더 화려하고 멋있어졌다.

색계의 홍콩대학

맥도날드에서 달달한 캬라멜 라떼를 테이크아웃한 다음 트램 2층의 한 창가 자리에 앉아서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홍콩을 누볐다. 바삐 움직이는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우당탕 부딪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간판들을 코앞에서 지나다니며, 떠나는 날까지도 온전히 실감할 수 없었던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씩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느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남은 나날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세상에 가봐야 할 곳들, 즐겨야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무엇보다도 봐야 할 영화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데. 그깟 무너진 나의 세상, 충분히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을 때, 어디에서 찾을지는 안다는 거다.

해피투게더 中


마지막 날에는 트램을 타고 홍콩섬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현재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지금을 돌아보게 만들 만큼 이곳에서 좋았던 것들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디에서나 눈 감고도 홍콩을 그려볼 수 있도록 말이다. 덕분에 돌아설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룰이 통한다면 참 좋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대한항공 타고 간사이 와카야마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