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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는 여름 Sep 01. 2022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

/러시아 문학의 최고의 순간, 영롱한 파편들


 책은 민중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자겨다줄 수 있을 때만 유용했다. 그들의 열의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대담하고 용감하게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키려 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차르가 작가들을 국가에 복무시키려 했다면, 좌파 비평가들은 민중에게 복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의 사고는 서로 만나서 힘을 합하고, 마침내 오늘날 헤겔 변증법의 결과로 탄생한 새로운 체제가 민중이라는 개념과 국가라는 개념을 결합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 35쪽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 中



  여름이다. 뜨거운 해를 맞으며 바다에 가고, 나무 냄새를 맡으러 산으로 가는 계절이다. 녹음이 짙어지는 만큼 피부의 작열감도 강해졌던 나날이었다. 내외적 요인으로 외출을 거의 못했다.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는데 시간만 야속하게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던 와중, 을유문화사의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가 도착했다. 바빴던 7~8월 잠시 숨쉴 틈이 필요할 때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그 책은 내가 갖고 있었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깨뜨려주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다 읽은 지금, 조각조각 다듬어진 파편들이 각자 다른 빛으로 영롱함을 띠고 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거주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이다. 그의 <롤리타>의 성공 이전 대학에서 유럽 문학 및 러시아 문학을 강의했던 시절의 기록으로 작중에는 자필로 작성한 글, 그림 등이 첨부되어 있어 강의의 사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목차는 크게 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소목차로 대표 작품이 있다. 차근차근 읽어보는 것도 좋지만 러시아 문학에 막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작품의 목차부터 읽는 것이 흥미를 더 돋우리라 생각한다.​


먼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을 무렵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서평을 작성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투르게네프 목차에서 오래 머물렀다. 나보코프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에 대해 "부드럽게 채색된 수채화 같은 그림"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으며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으리라 느꼈다. 다만 도스토옙스키를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고 지적한 점, 톨스토이의 작품을 과하게 찬양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정말 강의실에서 만날 수 있는 교수님(이자 한 인간)으로 느껴진 것은 덤. 그렇지만 국내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반 투르게네프나 막심 고리키를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어서 러시아 문학에 입문할 각을 잡고 있는 독자라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만족스러워하리라.​


 전공 교수님께서 독문학 강의를 해주실 때마다 본인이 작중 화자에 이입 해야함을 강조하셨다. 허나 보통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 문학에 대한 강의 내용이거나 중세 독일문학을 다루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화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고, 나보코프 작가를 교수님으로 만났다면 문학에 심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작중 수록된 나보코프가 직접 작성한 글과 그림은 강의의 실감도를 높여주었는데 강의록에는 설명 뿐만 아니라 당대 유행했던 패션스타일, 위에 첨부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 경로 도표, 사교 파티에서 춤의 동선 등을 상세히 설명해두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다가도 찾아보지 않았던 Marzuka 댄스를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으며 틀어두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처음 접한 러시아 문학은 보리스 파스테크나르의 <닥터 지바고>였다. 정확히 어떤 경위로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중이며 중국으로 출국을 앞두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마음 가짐이 해이해져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에도 회피성으로 독서를 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 후 <닥터 지바고>를 읽은 경험은 힘든 시기에 러시아 문학을 찾게 되는 일종의 내 생각 회로 루트가 되었다. 성경에 비유한 표현들과 고난과 역경에도 꺾이지 않았던 라라와 지바고의 모습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 문학을 생각하면 다소 경직된, 어두운, 눈보라치는 등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러시아 문학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당시에 자리잡은 편견을 떨어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만일 과거의 나처럼 러시아 문학에 대해 편파적인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면 당장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고, 마음속 러시아 문학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으로 대치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만나게 될 러시아 문학 최고의 순간들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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