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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는 여름 Oct 02. 2022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

인생은 한 곡의 교향곡

 이상하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단 한 순간도 로망에게 돌아가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나약함이나 호의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건 마치 내게 무언가를 주면 받지만, 다시 가져가면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게는 떠나는 일이 정말 쉽다. 만일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마음을 가진 여자, 이를테면 무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무정?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가벼움. 그게 더 낫다. 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완전히 그렇지는 않지만 그 마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내 마음은 티타티티타티다.

144쪽


 가볍다라는 건 뭐랄까, 중의적 표현을 많이 가진 형용사 중 하나인 것 같다. 산뜻하고 깃털같음을 표현하다가도 경박스럽고 텅 빈 느낌을 지닌 표현,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은 어떤 쪽인지 궁금해지는 제목이다. 주인공 뤼시의 어린시절부터 시작한다. 부모님과 함께 서커스단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는 자연스레 유랑생활에 익숙해진다.


 뤼시는 이름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았다. 오로라, 벨라돈, 마리, 뤼드밀라, 앙젤, 에밀리, 아스트레, 바르밥라, 아망드, 카드린, 블랑슈 등이 있다. 농담이라는 첨언을 덧붙였지만, 몇 개의 이름으로 사는 일은 가볍고 즐겁지 않을까 싶었다. 농담을 좋아하는 그녀, 만일 내가 그녀였다면 이름으로부터 정의되는 무거움에 거리를 두기 위해 수많은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고작 이름이라고 칭하기엔 그녀에게 "정착"은 무거워 보인다. 가출하기를 여러번, 뚱보 간호사의 집에 머물며 음악과 사랑을 느낀다. 운명적으로 다가온 음악, 뤼시의 가벼운 마음은 날개를 단다.




 그렇게 여성이 된 뤼시는 사랑을 한다. 그것이 그녀가 정착을 선택한 단 한번의 사례, 결혼이다. 여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도 새겨 들어야할 뼈같은 어록이 등장한다.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댜. 들어가기는 쉽지만 거기서 나오려면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해. 로망이 네 교도관이 될 거라는 말이 아니야. 그는 매력적인 청년이지. 나는 더 안 좋은 경우를 말하는 거란다. 그건 너희 둘 다 감방에 갇히게 될 거라는 거야.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
97쪽


 결혼을 선택하는 과정은 신속했다. 그녀는 운명을 믿었다. 그가 뤼시 영혼의 일부가 되는 일은 간단했다. 좋은 타이밍에 재능이 출중하고 매력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한다. 뤼시의 매력이자 강점, 가벼움은 결혼 생활을 압도한다. <가벼운 마음>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점 중 하나는 상처가 될만한 사정을 상처로 남기지 않고, 한 곡의 음악처럼 기승전결로 끝낸다는 점이다. 한 사건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사건이 시작한다. 교향곡과 같이, 알레그로, 느리게, 미뉴엣, 론도..





 그는 웃음을, 나는 눈물을 맡았지.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 우울증이 뭔지 아니? 월식 본 적 있어? 우울증은 월식 같은 거야. 달이 마음 앞에 슬며시 끼어드는 거야. 그러면 마음은 자신의 빛을 더욱 내지 못해. 낮이 밤이 되는 거란다. 우울증은 부드러우면서 캄캄해.
20쪽


 우울증은 월식 같은 거야. 라는 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래 머물 문장이다. 마음의 빛을 내지 못하는 것, 잠시 달이 끼어드는 것, 우울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오는 자연 현상. <가벼운 마음>은 나도 모르는 새 위로가 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르고 슬며시 끼어드는 문장들이다. 세상의 무거운 마음을 가뿐하게 들춰버리는 <가벼운 마음>의 매력. 지란지교라던가, 단순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단순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 뤼시도 마찬가지지만 <가벼운 마음>은 독자의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내 삶에 집중하고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는 태도,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티타티티타티.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은 한 장 넘기기가 아쉽다. 한 페이지에도 다채로운 마음이 스친다. 이상하다. 분명 화려하지 않은데 책 한권을 눈에 담고 싶다.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시는 삶을 사랑한다. 조금은 충동적이고 이를 때도 있지만 매 순간 충실하다. 뤼시의 삶을 하루라도 살아볼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면. 한 문장, 한 단락을 모두 책갈피 하고 싶어지는 작품, <가벼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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