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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hyeon Rhee Jun 27. 2020

이 그림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

자유와 평등에 대한 단상





어줍짢은 강연충들이 심심하면 가져와서 쓰는 이 그림, 정말이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 아래 그림에는 장애우, 여성, 저소득층 등 온 세상의 소수자들을 죄다 저 보라돌이에 상정하여, 파란옷 아재가 누리는 상대적 우월을 비판하는 것에 여념이 없는 선민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형식적 평등인 Equality가 아닌 실질적 평등인 Equity를 추구해야 한다는 개잡소리. 일생 알 필요가 딱히 없는 어려운 말을 굳이 섞어 쓰면서 똑똑한 척 하는 요동지시 좌파들의 빤하디 빤한 레파토리 그대로다. 언제나 그렇듯 그냥 돈 더 퍼주자는 것을 어렵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각설하고 결론으로 직행하자. 왼쪽의 더불어민주당식 평등과 오른쪽의 마르크스식 평등은 모두 틀렸다. 내가 항상 말하는 바이지만, "평등"은 애초에 '어불성설'이고, 그렇기에 그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사기꾼'이다. "평등"이란 가치가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인류를 망쳐온 이유를 아래 그림을 통해 알아보자.



"평등"이란 단어는 근본적으로 노예들을 부리는 주인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지난 인류사 속에서는 그렇게 쓰여져 왔다. 진짜 평등은 발 밑의 상자가 아니라, 저들 앞의 펜스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말하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걸 괜히 말했다가 노예들이 펜스를 무너뜨리면 본인들이 더 피곤해지거든. 그럴 바에야 대강 상자 하나 더 깔아주는 게 속 편하지.



요즘 나라 꼴을 보노라면, 노예 근성에 쩔은 병신들의 향연에 질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발 밑에 상자 2개 깔아주는 정치인들이 좋다고 물고 빠는 노예놈들에게는 근성이란 것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영원히 노예를 하고 싶어하는 근성 말이다.



그 상자가 펜스 뒤에서나 허락되는 것임을 그 노예들은 영원히 모를 거다. 아니, 알더라도 그 사실에 별 감흥을 느끼지 않을 거다. 우리 평등의 용사들은 노예 Zone에 깔린 상자 두 개 위에 올라서서 4번 타자 자한당이 삼진 아웃 되는 것만 봐도 인생이 충분히 즐겁거든.



애초에 펜스 뒤 노예 Zone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 것들이니까 당연히 그럴 거다. 상자 2개에 그저 헤벌쭉. 지들이 온 세상 정의는 다 지키는 냥 오르가즘도 느껴주고. 을매나 좋은가. 그런데 말이다. 이만해도 충분히 소름끼치는데, 더 무서운 이야기는 따로 있다. 평등의 용사, 보라돌이의 진짜 속내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보라돌이 노예들이 원하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바로 펜스를 더 높게 쳐서 파란 아저씨가 경기를 관람하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동시에, 본인 발 밑에는 상자를 더 깔아주는 것이니까. 그렇게 평등이란 명분을 수단 삼아 주인님과 연대하여 다른 노예들을 착취하고 싶은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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