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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령 May 15. 2020

나는 읽어주기의 힘을
강하게 경험했다

책 읽기와 독서교육


1. 독서 경험 한 가지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독지가의 선행으로 우리 반에는 학급문고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학교인지라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던 우리 교실에 세계 아동문학전집 30권은 보물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아이들이 그 책을 잘 안 읽더라는 거예요. 책을 읽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책이 재미있다는 것도 알고 책에 빠져서 읽기도 하는데 그동안 겨우 만화책이나 읽는 아이들에게 세계 아동문학 전집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꺼내서 읽으려고 하다가도 그림도 없이 글자만 빽빽한 책이 너무 재미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처음 읽는 부분은 만화처럼 재미있지도 않으니 빨리 읽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책이 있어도 책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책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던지라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잘나 보이겠지?’하는 아주 얄팍한 생각이 들어 그 가운데 책 한 권을 빼들고 읽기, 아니 읽는 척 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책이었는데 도입 부분부터 아주 재미가 없고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잘나 보이고 싶어서’ 꾹 참고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새까맣고 깡마른 체구에 눈만 띵구런한 시골 아이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눈앞에 영국의 왕실이 펼쳐지지 시작했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양측의 갈등에 목이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지가 된 왕자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 때는 답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양 쪽에서 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장면에서는 깊은 숨을 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옥새’를 찾는 장면이 나오지요. 책에는 옥새가 어려운 낱말이니 ‘옛날 임금님이 쓰던 도장’이라고 괄호 안에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어떻게 생긴 도장일까? 금으로 만든 타원형 막대기 같은 거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도장을 떠올리면서 임금님이 쓰는 것이니 이게 더 크고 멋지게 생겼을 거라고 제 나름대로 마구 상상을 했습니다. 이제 책은 단순한 활자의 나열이 아니라 활자 사이의 틈에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상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영국 왕실을 거닐기도 하고 영국의 어느 거리 뒷골목의 지저분한 집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이미 이 책은 꼬마 독자의 정신을 빼앗아 갔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을 하는 것은 비록 남들보다 잘나 보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지루해도 참고 읽다 보니 빠져 들어가 책의 주인이 되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료가 있는데도 아이들이 책을 읽지 못하자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독서지도라는 개념도 생소하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은 그저 여러 아이들에게 좋은 동화를 들려주자는 생각에서 읽어주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공교롭게도 《왕자와 거지》였습니다. 반가움에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이 읽기 시작하자마자 흥분을 해서 “저거 나 알어! 나 읽어 봤어!”하고 소리치기도 하고 “왕자가 거지돼. 거지돼.” 하면서 소리쳐서 아이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리 읽어서 아는 내용인데도 선생님이 읽어주시니까 또 다른 맛이 나고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혼자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분도 선생님이 읽어주시니까 그 장면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읽어주는 시간에 그렇게 나대는 학생이 귀찮기도 했으련만 선생님은 “저렇게 혼자 읽는 친구도 있구나. 다른 친구들도 따라 해 보면 참 좋겠다.”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 칭찬에 힘입어서 교실 안에 있는 책들을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지요. 엄마 찾아 삼만 리, 톰 소여의 모험....같은 이야기들이 그때 읽은 책들입니다.

  선생님이 책을 읽어 주시면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량이 많은 책은 조금씩 나누어 읽어주었는데 어떻게나 실감 나게 읽으시는지 우리는 마치 연속 방송극을 듣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라는 노를 저어서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하곤 하는 것이었지요. 그 덕분에 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반 아이들보다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독서지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책과 친하게 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데에 대한 답이 숨어 있어요. 그 한 가지씩을 찾아 가보려고 합니다.     

 

  2. 기본 독서량 이상은 읽어야 한다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일을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지요. 여러 번 자꾸자꾸 반복을 하다 보니 잘하게 된 것입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종류의 글을 자꾸 읽어서 그 경험이 나중에는 어느 글이나 능숙하게 읽어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 많이 읽어야 하는 까닭으로는 글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지식을 많이 만들어 둔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독서에서 배경지식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본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알아갈 때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무엇을 좀 알아야 자기가 모른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았으니 읽고 싶은 책도 없고 읽어야 할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읽을 책이 마땅치 않은 사람이라면 쉬워 보이거나 내용을 잘 알아서 친숙한 책부터 시작해서 기본 독서량을 채워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읽고 싶다는 마음이 거기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 글이나 많이만 읽는다고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담아 적어 놓은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상업적이고 말초적인 호기심만 자극하는 책들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지요.

  또 하나 ‘많이 읽는다’와 ‘잘 읽는다’가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많이 읽는 것보다는 제대로 읽는 것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면서 기본 독서의 양의 채워 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책 읽은 권수를 채우려고만 하면 읽은 분량은 많은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없는 껍데기 독서만 하기 쉽습니다. 독서의 체험은 늘리고 넓히되 제대로 읽도록 해 주는 것이 독서지도의 기본입니다. 


3. 스스로 읽고 싶어서주체가 되어서 읽도록 해야 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이 요즈음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입니다. 자기주도적 학습이란 한마디로 학습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학습을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수준이나 관심에 기초해서 스스로 수업 목표를 설정하고, 중요한 학습전략을 선택하여 실행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기까지는 다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따지고 생각해 보는 정도라도 해 보면 좋겠지요. 

  책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가 독자와 글의 만남이라면 독자는 능동으로 글을 읽어야 읽는 보람도 있고 그 뜻을 정확히 알게 됩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독서를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자기가 좋아서 읽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좋은 점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끌리고 필요해서 읽었기 때문에 훨씬 능동의 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즈음은 독서지도 프로그램도 많고 독서지도를 받을 기회도 많은데 우리 아이들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이끌려 책을 읽기 때문에 책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 생각이나 관심 등을 바탕으로 해서 내용을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읽기를 능동적으로 하지 못하는 또 다른 까닭은 글 읽기와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글 읽기 자체가 보람 있는 일로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데,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라든가 독서인증제 같은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서 읽는다면 읽는 일이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적게 되고 글(책)은 이렇게 현실과 좀 떨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당신의 책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 감옥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 열심히 읽어도 도무지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어떤 때는 책을 3,40쪽 정도 읽은 뒤에야 아이고 내가 전에 읽은 것이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책을 읽는 것이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 권 올려놓고 있는 것으로 책을 읽는 일이 ‘독서 이후’와는 완전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이어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라고 표현하십니다. 조금 쉽게 말하자만  ‘삶과 동떨어진 말장난’에 불과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글 읽기가 아주 재미있고 보람 있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책을 읽고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4. 읽어주어라읽어주어라!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눈을 반짝이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글자를 익히고 나면 어른들은 얼른 책 읽는 수고를 아이 스스로 해치우기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너 글자 읽을 줄 아니 네가 읽어라.’하면서 책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것은 글자를 몰라서 읽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나랑 좀 더 같이 있어 주세요.’ 하는 의사표현입니다. 지금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부모님들이 책을 읽어주는 일을 종종 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도 담임선생님이 읽어주시는 책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읽어주시다가 만 책을 서로 읽으려고 싸움이 나기도 했거든요. 읽어주지 않았다면 그런 보물이 거기에 있는지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윤리과목을 담당하셨는데 그리스 로마 철학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욱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이 읽어주시던 책들입니다. 조회나 종례 시간에 들어와서 짧은 글들을 읽어주시곤 하셨는데 그때 읽어주신 내용 가운데는 ‘탁상시계 이야기’라는 것이 있어요. 법정 스님의 《무소유》속에 나오는 짧은 수필인데, 스님이 숙소에서 탁상시계를 도둑맞았다가 결국 자기가 잃어버렸던 시계를 돈을 주고 사 오게 되는 일을 적은 글입니다. 그 일화에 끝에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는데 선생님이 그 구절을 읽어주시는데 마치 섬광처럼 그 말이 가슴속에 들어와 박히는 거예요. 그 후 어른이 되고 주머니에 책 한 권 정도 살만한 돈이 있을 때 서점에서 《무소유》가 눈에 띄자 얼른 사들었습니다. 그 책은 재산목록 1호가 되어 지금도 간간이 펼쳐봅니다. 독서지도라 하면 책 읽고 시험 보는 무엇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바로 이런 것이 독서지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 싶다는 자극을 주고 실제로 책을 읽도록 만들어주는 것 말입니다. 거기에 가장 강력한 도구는 ‘읽어주기’입니다.    

 

 ♣  책을 읽어주면 좋은 점     

 ⓛ 직접 읽지 않고도 이야기의 매력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② 누군가가 읽어준 책은 나중에 다시 펼쳐보기 쉽습니다. 

    읽어 주는 것이 결국은 직접 책을 읽는 일로 이어집니다.

 ③ 좋은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판단하는 안목이 생기게 된다.

 ④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읽어주는 사람과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환경을 만들어 주자     


  책 읽기에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 또한 독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책이 갖추어져 있으면 좋겠지요. 물론 집에 책이 없어서 멀리까지 가서 남의 책을 빌려서 읽으면서, 또는 늦도록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책과 친해졌다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집에 책이 있었다면, 책 읽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더욱 빨리 책과 친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은 정말 세상 좋아졌다 싶을 만큼 책이 넘쳐 나지요. 아이들이 책이 많이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일, 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책은 한번 구입하면 그것을 오래오래 볼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자라나는 단계에 따라서 새로운 것을 자꾸 장만해야 하는 책도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책은 대부분이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사서 책꽂이에 꽂은 책이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 많아요. 아이는 자라서 3학년 4학년이 되어 있는데 책꽂이에는 여전히 ‘병아리 유치원’ 같은 책이 꽂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그때그때 알맞은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려면 일정 기간에 한 번씩 책장을 정리해야 합니다. 작아진 아이 옷을 정리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에 대한 외경심이 있어서 책을 버리려면 왠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책장이 적절한 때 비어 있어야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는 책이 공급될 수 있습니다. 책장을 잘 정리를 해서 빼낼 것은 빼내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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