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의적인 순간, 이럴 때이지요.
요즈음은 ‘창의력’이라는 말처럼 요술 방망이 노릇을 하는 것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학습지에도 ‘창의력’ 자가 붙으면 인기를 얻고요, 공부를 하는데도 창의력을 올려주는 방법이라고 말하면 그 또한 큰 인기를 얻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높다는 증거겠지요. 창의력이라고 하면 대부분 ‘새롭다, 기발하다, 엉뚱하다…’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구체로 어떤 경우를 나타내는지는 참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예를 들어 새롭다는 것도 ‘우리 집’에서 새로운 것인지 ‘우리 동네’에서 새로운 것인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막연히 새롭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창의력의 실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정동진이며 어디로 해돋이를 보러 떠납니다. 동쪽으로 가는 도로는 해돋이 보러 가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드디어 해가 떠오릅니다. 하늘이며 바다를 핏빛으로 붉게 물들이면서 커다란 불덩이 같은 해가 수평선 위로 쑤욱 솟아오릅니다.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지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가슴에서는 두둥두둥 북소리가 나는 듯합니다. ‘비록 작년까지는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떠오르는 저 해와 함께 새로운 희망이 생겨날 거야.’ ‘올해는 분명히 힘쓴 만큼 수확도 있을 거야.’ 하는 식으로 아주 밝고 긍정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어렵지만 두둥실 떠오르는 저 태양이 그것을 삭 씻어갈 것 같고 저 태양의 정기를 받아 올해부터는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희망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1월 1일 떠오른 태양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지요? 어제 떴다 지고 오늘 다시 떠오른, 늘 그 자리에 있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1월 1일이 되었다고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희망으로 바라보고…. 그러다 보니 내 마음도 희망적으로 바뀌고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에요. 하루는 아이가 “엄마, 왜 ‘나무십’이라고 안 읽어?” 이래요. “나무십이라니?”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왜 나무십이라고 안 읽냐구?”하다가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 같으니까 “소롯이는 ‘소로시’라고 읽는데 나뭇잎은 왜 ‘나무십’이라고 안 읽냐구우?” 하면서 질문의 요지를 분명하게 정리해 보이더라구요.
‘아,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 처지에서 보면 분명히 의심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소, 롯(발음으로는 롣), 이’ 이렇게 읽으니까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라 ‘소로시’라고 읽는 것이다 하고 배웠는데 같은 ‘ㅅ’ 받침이 있는데도 나뭇잎은 그렇게 읽지를 않으니 궁금해진 것이지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1학년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려니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읽기로 약속을 했어.” 했더니 그렇게 말고 ‘진짜’로 말해 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가능한 친절하게 ‘나뭇잎’은 왜 ‘나문닙’으로 발음이 되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아이는 너무 지루했는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하더니 그냥 놀러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흙강아지가 된 녀석이 마구 뛰어들어오더니, “엄마! 엄마. 왜 나무십이라고 안 하는지 내가 알아냈어!” 하는 거예요. 너무나 궁금해서 “아, 그래? 왜 나무십이라고 안 읽는데?”했더니 “이거 봐봐. ‘나무십’ 그러면 나뭇잎 같지가 않잖아!!”
그 순간 아이는 나뭇잎이라는 말에 대해 새롭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예사로 지나쳤던 일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창의적인 순간입니다. 새로움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결국 창의성이라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