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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May 16. 2022

⟪Furry ways⟫ - 게임과 만화가 주는 작은 힘

http://www.limsuyeong.com/watchandread/furry-ways-heoangkim


김허앵 작가의 개인전 ⟪Furry ways⟫(22.04.01-22.04.24/미학관)를 보러 간 계기를 말하려면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시 지킴이를 할 때, 같이 계시던 기획자 분이 한번 읽어보라고 ‘뉴스페이퍼'를 건네주셨다. 다른 좋은 글도 많았지만, 그중에서 김허앵 작가의 글이 기억에 남았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서 미래를 살아갈 아이에 대한 걱정과, 그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관한 글이었다. 아이가 살아갈 지구의 여름은 계속 더워질 것이다. 해수면은 올라갈 것이고, 그에 따른 생태계 변화로 인해서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새로운 전염병이 퍼질 것이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그런 세계를 살아가야 할 아이를 생각하면, 기술이 발전해서 기후위기가 초래한 변화들을 극복할 것이라고 마냥 낙관할 수 없다. 하지만 암울한 감정 속에서도, 아이가 세상을 알아가고 뭔가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그 바람을 이룰 미래가 도래하길 기원하게 되고, 그러한 작은 기원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족이 길었지만, 이 글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 때문에 개인전도 보러 가게 되었다.

<The Explorer>, 2022, Oil on Canvas

 전시장에는 작은 그림들 몇 점과 큰 그림 하나가 걸려있었다. 작은 그림들에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망원경을 들고 캔버스 너머의 먼 곳을 보는 위풍당당한 인물, 돋보기를 마법봉처럼 들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인물, 쭈그리고 앉아 모닥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인물 등이 있었는데, 이 인물들은 세상을 알아가고 탐험하는 아이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화나 게임에서 그 세계를 탐험하는 귀여운 3등신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더 많은 전시 사진들은 미학관의 인스타그램을 참고./@mi_hak_gwan)

<너머의 지도>, 2022, Oil on Canvas.

가로 세로 폭이 거의 2미터에 이르는 큰 그림에는 다양한 풍경을 배경으로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작가가 산책을 하면서 본 동물들과 풍경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는 위쪽과 오른쪽 상단의 초록색 배경에 집중해서 사진을 찍느라고 그림 전체의 모습을 담지는 못했다. 내가 찍은 부분만 보면, 서로 큰 연관이 없는 배경들이 이어져 있어서 뭔가 질서 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림 전체를 보면 상당히 대칭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날렵한 붓질로 그려진 갈색과 초록색의 지대를 중심으로 각각의 장면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니콘이 달리는 들판과 눈사람이 있는 설원, 벚꽃이 핀 길가 등 다양한 장면들이 나름의 질서 속에서 배열되어서 그런지 그림이 게임의 주요 지역의 풍경을 담은 맵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전체 그림은 미학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주세요..) 특히 오른쪽 위 모서리에 그려진 꽃 장식은 그림 전체를 꾸며주는 프레임처럼 보였는데, 프레임이면서도 그림 속 장면들과 명확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그려져서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작가의 글을 읽고 전시를 보니, 이 작업들 또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주제로 갖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관찰한 것들을 만화나 게임이라는 렌즈로 투과해서 그린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희망의 모습을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의 기억, 오래전에 했던 게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임 속의 캐릭터는 실패하더라도 리스폰된다. 캐릭터가 리스폰되면서 아이템을 흘리거나 경험치를 잃는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게임 세계의 시간은 무한하고, 게임을 켜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잃었던 것들을 회복할 수 있다. 게임에는 보통 퀘스트나 미션이 있지만, 그것들을 굳이 완료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 속의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다. 만화도 비슷하다. 주인공 일행들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은 따뜻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재미있는 디테일들로 가득하다. 그 세상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등장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갈등은 이내 봉합되고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는 결말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실패해도 나를 안전한 곳으로 자동으로 리스폰시켜주지 않고, 내 삶은 꽤나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내가 잃었던 것들을 회복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하고, 그냥 그것들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갈 확률이 크다. 나의 일상을 위협하는 것들로 인해서 불안과 혼란이 생겨나도, 그 혼란은 만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비관과 회의, 절망에 더 빠지기 쉽다. 현실에는 만화나 게임과는 다른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게임이나 만화와 다르다고 해도, 나름의 바람과 희망을 갖고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게임의 작은 과제를 완수하는데 몰두했던 기억, 플레이어의 몸으로 가능한 행위들을 통해서 게임 속 세계를 알아갔을 때의 감각, 똑같은 만화 에피소드를 돌려보면서 만화의 흥미로운 디테일들에 주목했던 경험은 만화와 게임의 세계를 더 탐험하기 위한 힘을 준다. 현실을 살아갈 힘도 이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얻지 않을까. 밥 먹고 산책하기, 야채 손질해서 보관하기, 생필품 직접 장보기, 책 읽기 모임 참석하기 등을 했던 기억들, 그런 작은 일과를 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면면들을 알아가는 감각은, 매일매일의 하루를 지탱해나가는 힘을 준다. 어느 날은 주어진 일들을 겨우 겨우 끝마칠 정도의 힘으로만 굴러가지만,  다른 날은 힘이 남아서 그것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더 나은 사회를 바라면서 쓸 수도 있다.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힘이 얼만큼인지는 날마다 다르겠지만, 그 힘은 세상에 대한 나의 지난 경험들에서 비롯된다. 김허앵 작가가 전하고자 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현실은 게임이나 만화만큼 부드럽고 귀엽지 않지만, 기후 변화로 현실은 점점 살아가기 어려워지겠지만,  현실을 살아갈 힘도 비슷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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