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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의 힘든 삶과 클리프의 주먹

<조커> 보고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 연달아 보면 안 됨요.


그렇다. <조커>와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연달아 보면 안 된다

조커가더 불쌍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커 이야기. 


조커는 아주 천천히 제 얼굴을 찾아 나갔다. 그는 제 얼굴을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면서 조커가 되었다. 그는 망설였다. 어떤 악당이든 악당이 되기 전까지 그의 전반기 생애사가 있다. 그래서 조커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지만, 사실 매우 평범하기도 한 것이다. 그는 악당들 세계에서는 평범한, 평범하게 불우하고, 그 불우함이 해소되지 않아서, 그 결과로 가난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삶의 문제를 겪게 되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나아가 사회는 복지 예산에 인색하고, 그래서 그는 결국 악당이 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당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재미가 없다. 

그는 제 얼굴을 부정하고 부정하면서 결국 조커로 성장한다.

불우한 과거를 살아왔다고 해서 모두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는 겨우 ‘악당이 되지 않은 것’뿐이다. 대개는 이 세상으로부터 강요된 제 성실함을 자조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악당을 만들어 놓고 ‘나는 저놈 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면서 혹은 저주하면서 혹은 댓글을 달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실함이란 어느 정도는 늘 노예적 성실함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우리들의 성실함애는 늘 어느 정도의 노예적 성실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악당이란, 그러니까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된 어떤 억눌리고 삐뚤어진 마음의 한 조각일 뿐 우리와 동떨어진 어떤 것일 수 없는 것이다. 독일 국민 개개인에게 내재된 작은 어리석음과 악의 총합이 나치당과 히틀러일 수 있었던 것처럼. 게다가 그 악당이라는 녀석이 부자에게 적대적이고, 가진 자 기득권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며 출신 성분 또한 우리와 같은 흙수저라면 어느 대중이 호응하지 않겠는가. 그 악당에 호응해도 나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으며 결국 책임은 악당 자신만 지면 되는, 그런 악당이 있다는데 어찌 호응하지 않겠는가.

 

조커 만세! 조커 만세! 조커 만세!

그러면 그런 악당은 누가 되는 것일까. 보통의 영화에선, 가장 ‘순수하고 순진하게 고립된 자’가 그런 악당이 된다. 조커는 그런 영화 세계에서의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악당에 불과하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적이라 조커는 자신을 독특하게 꾸며야 했다. 조커 자신도 자신이 악당 세계에서 별 볼일 없는 캐릭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얼굴과 행동을 과장한다.     

악당의 세계에서도 캐릭터 잡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당연히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조커에 열광하는 현실의 관객들은 무엇에 열광하는 것일까. 영화의 만듦새? 아니면 조커라는 캐릭터가 주는 악마적 짜릿함? 영화 속에서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자동차 보닛 위에 올라가 신나게 춤을 추는 조커와 그에 열광하는 시위대는 영화 <조커>의 조커에 열광하는 현실의 사람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 것일까. 


하여튼 조커는 기꺼이 그런 악당이 되기로 한다. 조커는 사실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습장에는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취 있기를”이라고 중증의 중2병 가득한 문구를 적어 놓고서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후안무치한 행각을 벌인다. 조커가 지하철에서 사람 셋을 죽인 것은 그들이 무고한 여성을 희롱해서가 아니다. 조커에겐 정의감이 없다. 더욱이 그들이 자본가의 개여서도 아니다. 조커는 자본을 열망할 뿐 자본을 혐오할 줄 모른다. 조커가 그들을 죽인 것은 그들이 오직 조커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그는 그 비웃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확실하지도 않은 심증만으로 자신을 일부러 곤경에 빠트린 동료를 죽인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성공의 발판을 내려 주지 않는 자신의 우상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행각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기 싫은 것이다. 이쯤 되면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취 있기를”이라는 그만의 경구는 더욱더 유치해진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악당이란 대개 악당의 본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또 그만큼 얼마나 초라한가. 

나는 지금 조커를 까고 있다.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바랐던 조커는 이런 조커가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조커는, 악을 처단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저 배트맨이라는 녀석의 자본주의적 위선과 인민과 대중의 분노와 억울함은 모르고 오직 말단에 드러나는 나쁜 행위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답답함에 대해서 시원한 빅엿을 날려 줄 수 있는 그런 조커였다. 좋은 집에 좋은 집사에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까지는 그렇다 쳐도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옷만 고집하면서 근엄한 표정만 짓는, 저 연간 회원권 일억 원짜리 헬스장에서 다져진 몸매 같은 배트맨에게 한 방 날려 줄 수 있는 조커. 그런 조커를 원했는데. 이게 웬 난데없는 허접한 찌질이인가. 

이제부턴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이야기이다. "어이 네가 조커야?"

히피는 광대의 다른 이름이다. 광대는 무대 위에 서지만 히피는 모두가 다 광대가 되기로 한 사람들이다. 광대의 고립을 바라본 사람들인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광대를 보고 웃을 줄만 알지 광대의 고립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대의 고립을 보고 광대가 가진 것을 나눠 가졌다. 표면적으로 광대가 가진 것들로는 약자성, 희화, 가난,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자발적으로 제 몸에 걸쳤다. 히피들은 조커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을 것이다. 히피들이라면 조커에게 LSD와 낮잠과 난교를 나누었을 것이다. 광대의 분장을 나누어 제 몸에 꽃과 나비를 달고 함께 춤추었을 것이다. 

히피들은 모두 함께 광대가 되기로 한 사람들이다. 본질은 어리고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말하자면 조커에게 해주는 할리우드식 대답 같은 것이다. 자, 잘 봐라. 조커야.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게,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애초에 타란티노의 세계에겐(물론 쿠엔틴 타란티노와는 일면식은커녕 다른 우주에 사는 사이지만, 글 속에선 이렇게 마치 무슨 친한 후배라도 되는 양 이름을 불러 가며 말할 수 있다.) 자비란 없었다. 광대와 히피가 아무리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춤추며 연대와 변화를 노래한다 한들 단 한 발의 오발에 맞아 뇌수를 흩뿌리며 죽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 세계가 타란티노의 세계이다. 

그냥 참고 이미지, 이것보단 자동차 시트에 터지는 뇌수가 더 좋...

타란티노는 그러한 세계가 곧 영화의 세계라고 말해 왔다. 그의 영화는 마치 고전 설화처럼, 우연과 운명이 현대적 이야기 세계의 문법에 제약을 받지 않고 마구 뒤엉켜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가장 최첨단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거칠었다. 그래서 그의 B급 감성이란 소수성이나 마이너 정서라기보다는, 저 육십 년대 할리우드의 변방에서 만들어진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이야기와, 그런 이야기를 수십 차례를 다시 돌려 봐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진실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자신의 영화 세계를 총정리하여 보여 주는 영화처럼 보였다. 옛날 옛적 할리우드라니,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타란티노를 있게 한 모든 것이 아닌가. 그는 옛날 옛적의 미국이나, 옛날 옛적의 서부를 모두 영화를 통해서 배웠다. 그래서 옛날 옛적의 미국이나 옛날 옛적의 서부가 모두 영화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만들었던 할리우드. 모두가 영화배우 같았고, 모두가 스태프 같았으며 하여튼 모두가 영화였던 로스앤젤레스를 그대로 재현하여 그 속에 숨겨진, 도대체 의미라고는 찾아보려야 없을 것 같은 일상으로서의 현실을, 기어이 영화화한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영화에 반영된다. 그래서 옛날 옛적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제목은 미국도, 서부도 아닌 영화로서의 미국과 영화로서의 서부를 보여 주면서 영화 속에 침범하는 영화, 혹은 현실 속에 침범하는 현실을, 영화로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하여 제목 그대로 쿠엔틴 타란티노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어렵게 썼지만 결국 <원스...>는 그런 영화다. 영화가 영화와 현실의 교차점에 서 있다. 아니 현실을 침범한다. 

그래서 영화감독과 영화배우 부부에게 닥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매우 잔혹한 현실로서의 육십 년대 비극은 한때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고도 불린 할리우드 키드 쿠엔틴 타란티노가 운명적으로 맞닥뜨린 주제인 것이다. 이 영화는 반드시 타란티노가 만들어야 하고 타란티노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팬으로서 이 영화는, 이러한 운명적인 운명 성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멋있는 한 컷. 이제 다시없을 조합이다. 두 사람이 다시 모이기도 힘들뿐더러 디카프리오도 피트도 늙어갈 테니까. 

이제 조커가 히피들을 설득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가. 우리들 정신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저 미디어 뒤의 기득권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히피들은 분화하기 시작한다. 히피들 중 몇몇은 조커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조커는 광대 가면을 쓰고 찰스 맨슨이 되기로 한다. 조커는 대중들 앞에 선다. 

조커를 어떻게 하지,,,

이제 혁명은 어디로 갈 것인가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싸움을 잘한다. 천하의 이소룡도 그 앞에서는 떠벌이가 된다. 그는 영화에 빠진 대중이 실제로도 싸움을 잘했다고 믿어 절권도의 신화가 된 이소룡을 냅다 던져 버린다. 스턴트맨이자 유명 배우의 대역으로 활동하는 클리프가 살아가는 세계는 영화의 세계이지만, 영화에서는 가장 현실에 가까운 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싸움을 아주 잘하지만 말 한마디로 직장에서 내쳐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집도 직장도 돈도 없지만 그는 광대도 히피도 아니었다. 그는 싸움을 아주 잘하고 잘 훈련된 아메리칸 핏불을 한 마리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클리프에게 잘못 걸리면 안 된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지만 하여튼 그에게 잘못 걸리면 안 된다. 

그런 그에게 히피 몇 이서 어설프게도, 칼 몇 자루와 총 한 자루 들고 도발을 한 것이다. 히피라기보다는 광신도 같은 애송이 몇 이서 우리 사회의 기획자들이자 자본가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부자 동네를 찾은 것이다. 꼭 하는 짓이 조커 같다. 


그리고는 클리프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 비참한 정도가 아주 세다. 애송이 같은 마음으로 벌인 행동의 대가 치고는 너무 참혹했다. 마빡이 깨지... 세상은, 잘못 걸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히피들은 그들 나름의 비장한 각오도, 제법 뜻깊은 시도도, 또 참신한 돌+아이 짓도 그 어느 것도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영화는 1) 비극적인 실제 사건을 2) 건조한 현실의 언어를 사용해 3) 농담처럼 재구성한 영화로, 무미건조하게, 그래서 차갑게, 보여준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나니 내게 히피와 광대라는 두 단어가 남았다. 히피와 광대라는 단어가 이렇게 스산하고 쓸쓸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제 영화 속에서 저 조커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정신 병원의 상담사마저도 죽이고 병원을 끝내 탈출하는 저 연약하고 순수하며 자신을 순수한 악이라 생각하게 될 저 어릿광대를. 


부디 할리우드 대로를 뛰어다니다 클리프(브래드 피트)를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 되겠지만, 그게 어디 쉽나. 좁디좁은 영화판에서. 그래도 자시 부탁하는 것이다. 조커는 부디 고담시를 벗어나지 말기를 바란다. 고담은 그나마 낭만적인 도시라 조커의 조커짓이 통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서울만 와도 안 통할 것이다. 서울엔 싸움 잘하는 노예들이 많다. 


조커야이 놈의 자식아너를 어떡하니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의 뒤에서, 이 모든 이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이 모든 이들의 낭만적 세계관을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 속에 투입하여 우리에게 내놓는 저 자본가들을.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간의 히피도, 얼마간의 광대이면서 동시에 요만큼의 클리프도 아닌. 아닌 우리들은 계속 이렇게 ‘영화에 열광’하다, 또 어디까지 쓸쓸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유튜브가 있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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