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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그대는
맨발로 죽음을 맞이하라

<남산의 부장들> 다시 보기 : 박용각과 김규평의 맨발을 중심으로.

이 영화는 어리석은 자 두 명이 독한 놈 옆에 붙어서 서로 친구를 맺고 잠시 권력을 얻었다가 맨발에서 맨발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며 목숨을 잃는 과정을 재미있게 보여 주는 블랙코미디이다. 그래서 포스터도 전반적으로 검다.

검은 포스터는 잔뜩 무게를 잡는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고 하는데 등장인물은 난생처음 들어본 사람들이다. 박용각, 김규평 등. 우리 현대사에 저런 사람들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저런 이름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박용각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인 것 같다. 내 추측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The President’s last bang, 2004)>에 대해 박지만 씨는 사자의 명예 훼손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었고 법원은 결국 박지만 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 이럴 땐 정말 법을 잘 아는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영화엔 저런 이상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인 것 같다. 역시 추측이다. 대의멸친이라고 쓰여 있다. 대의를 위해 친구도 ...;;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름이 사자(즉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다면 그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봐도 그때 그 사람들인데, 이름만 바꿔서, 그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분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에 다시는 이런 후진적 사건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판사님들 속을 모르니 나 역시 모를 일이다.(그런데 판사님들에게는 누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권력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윗 사진의 원본이다.


뭐 그건 그렇고. 영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 영화는 특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거나 색다른 해석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그저 그냥, 아주 그럴듯한 분위기를 느끼면 되는 영화다. 군사독재 시절 대한민국(다행히 국가 이름은 그대로 놔뒀다. 통 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최고 권력 시해 사건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결말을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결말을 다 알고 있어도 영화는 필요하다. 분위기로서의 영화도 있는 법이다.

두 친구. 그들은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걷는다. 분위기 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무 멋진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코미디이다. 역설이지만 아주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다. 왜 비극인가. 박 대통령이 비명에 횡사해서도 아니고 김규평이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가서도 아니다. 그런 건 비극이 아니다. 그런 건 희극에 가깝다. 생각해보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 혹은 수단 삼는 사람들이 맞이하게 된 죽음이 어찌 비극일 수만 있겠는가.(희극이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면 그냥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만 해 두자.)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모두 비극은 아니다. 사람이 죽지 않아서 발생하는 비극도 있다. 전두'혁' 전 장군...

진짜 비극은 이런 거다. 우리가 지금 이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 이 영화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팝콘과 콜라를 마시며 마치 남의 이야기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기고 있지만, 사실 불이 난 집이 우리 집이었다는 슬픈 이야기처럼. 이 영화는 바로 현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딘지 최근의 사진을 일부러 거칠게 옛날 사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이야기

견강부회일 수 있지만 나에겐 다음과 같은 것들이 보였다. 영화에서 박용각(박 부장, 곽도원 역)은 아메리카의 공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미국인들을 보다 갑자기 이런 대사를 던진다. 


“아. 자유롭다. 자유로워.” 


근데 왜 우리는 미국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질문을 던지니 역시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종횡무진하는 우리의 박용각(박 부장, 곽도원 역)이 다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1) “우린 그냥 머슴살이한 거야.”

2) “죽어라 일만 했더니 돈 받아먹는 마누라 년이 따로 있었어!”

3) “다 같이 죽자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죽자 동네 한 바퀴“

그는 뭔가 살 길을 깨달은 듯, 죽음으로 마구 뛰어가고 있었다. 

바둑이도 같이 죽자던 박용각은 가장 먼저 죽고 말았다. 멀리 프랑스 파리까지 날아가서 죽었다. 박용각은 파리에 왜 갔는가. 그는 죽을 때까지 뭐가 뭔지 잘 모르다 죽는다. 뭐가 뭔지 잘 모르니까 파리까지 날아간 것이다. 각하가 나를 용서해 주실까. 아니면 한 발 더 나아가 각하를 몰아내고 새롭게 권력을 잡을 세력에게 평화롭게 안길 수 있을까. 권력의 비정함을 깨달았으면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줄도 알아야 할텐데. 그럴 수가 있나. 권력 앞에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다.


만약 권력이라는 단어를 돈 혹은 자본,시장 등으로 치환한다면 어떻게 될까. 진즉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 않았나. 두 친구들을 보라. 자신이 권력을 가진 듯 행세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결국 맨발로 죽게 된다. 박용각 부장은 머나먼 파리에서 홀로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신발도 챙기지 못했다. 권력의 이인자로 군림하던 박 부장은 마지막 자신의 발을 쳐다본다. 땀에 절어 바닥에 둥그런 흔적을 남기고 있는 발. 결국 우리도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바라볼 수 밖에 없을 우리의 맨발.


아듀 라미(Adieu l'Ami)

아주 먼 옛날에 이런 영화가 있었다. 안녕 친구여! 정도.


한편 친구를 보낸 김규평(김 부장, 이병헌 역)은 거사를 준비한다. 그가 준비하는 거사란, 다름 아니라 경호실장과 최고 권력자를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었다.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건 얼핏 후자가 전자를 포함하는 것 같다. 죽여버리면 권력이고 뭐고 다 끝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삶에서 끌어 내려도 권력에서 끌어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권력과 권력자의 목숨이 서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죽었어도 박 대통령의 권력은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은가.  그걸 알지 못하면 괜히 권력자의 목숨만 빼앗고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에 당할 수 있다. 

권력은 권력자가 죽은 뒤에도 이어진다. 

김규평이 그런 케이스였다. 그는 군인이었고, 최고 권력자의 혁명 동지였으며, 남산의 부장이었다. 좌고우면 하는 순간 권력에서 멀어지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결정하고, 아침에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권력자를 권력에서 끌어내리지 말고, 그냥 삶의 무대에서 끌어내리자고. 그러면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다. 군인답다. (간혹 보수주의자를 참칭하는 분들이 '군인답다'는 말이 미국에서와 달리 사우스 코리아에서 경멸적 의미로 사용되는 걸 두고 개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군인들이 자초한 것이지 국민들이 미개해서가 아니다.)  

지금 이 방에서 그 생각 안 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걸요?

거사를 끝낸 후 남산으로 가던 차에서 그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신발을 신지 않았다. 그가 먼저 보낸 그의 친구 박용각과 같이 맨발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그의 진심과 본심이 무엇이었는가 따져 파고드는 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명령권자를 잃어버린 소대장처럼 싸웠다. 하긴 누가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단 말인가. 박용각과 김규평. 그들은 내내 갈팡질팡했고, 뭐가 뭔지 모르고 맨발이 되어 최후를 맞았다. 


맨발에서 맨발로. 권력의 최정점 근처에서 목숨을 잃은 남산의 두 부장에게 인간적인 조의를 표한다. 비극이지만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진 코미디이다. 두 사람을 생각하면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물론 웃어서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누군들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우리들 역시 저 두 부장들과 사실 별반 다를 바 없는 알레고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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