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ce 4.
# 만남
어느 노인이 허름하고 공기가 가라앉은 사무실 앞에서 들어서기를 주저하고 있다. 노인을 발견한 더크는 시큰둥하게 그 저열한 차림새를 한 작자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시간이 뒤틀린 자신의 공간으로 그를 안내한다. 더크의 사무실은 10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소파와 60년대에나 쓸 법한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고루한 일터이다. 그는 작은 탐정사무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더크는 냉렬하게 몰아치는 둘 사이의 적막 속에서 힘겹게 말을 건넨다. <어떤 일로 오셨죠?> 노인은 그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 자신의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더크에게 확인시키려는 듯 손에 붙들고 힘없이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마레>.
# 불가능한 의뢰
더크는 다시 되물었다. <마레, 아내의 이름인가요? 손녀의 이름인가요? 어디서 실종되셨죠? 경찰에는 먼저 연락한 겁니까? 키는요? 나이는요? 어르신. 더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협조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처량한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져온 타일에 시선을 묻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주름진 손에 놓인 한 조각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마레, 체스킨 32번지'. 이 도시에는 체스킨로 32번지란 도로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스킨로는 31번지까지만 존재하는데 이마저도 거주의 흔적도 없고, 도로도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일 뿐이다. 우거진 나무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름 없는 곳이다. 더크는 이 안쓰럽지만 시답잖은 노인을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체스킨은 31번지까지만 있고, 그마저도 무언가 찾을 수 있을만한 곳이 아닙니다. 저에게 오기 전에 직접 가보셨을 텐데요. 마레가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속이 가득 찬 봉투를 꺼내며 더크에게 부탁했다. <꼭 좀 부탁하네. 마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해.>
# 잘 나갔던 과거
더크는 한때 꽤나 유능한 탐정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해내지 못했던 사건들을 찬란하게 해냈고, 비록 운이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신문과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도시 내에서는 유일한 실력자였다. 노인이 곧 이곳을 찾게 된 계기이라. 하지만 그것은 이미 20년 전의 이야기다. 이제는 그도 힘을 잃었고, 하릴없이 이 사무실이 수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의미와 목적 없이 굳은 발걸음을 자동적으로 내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는 노인이 있는 것이다. 사실 노인이 건넨 돈은 그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고, 더크에게 활력이 돌만한 액수였다. 사무실을 팔아치우고 그가 단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해외로 나가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어르신. 제가 장담은 못 드립니다. 어르신도 분명 체스킨 31번지를 가보셨겠지요. 32번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원하신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정도는 보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노인의 마레
체스킨 31번지까지 더크 사무실에서 그의 오래된 소형 디젤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노인은 차에 타자마자 그제야 더크의 이름을 묻고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족히 600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노트를 이어 붙인 그것에 더크의 이름과 차에 탔다는 사실을 힘겹게 적어 넣었다. <자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겠거니, 이 늙은이가 나이를 들어가니 기억을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 예. 그래서 어르신. 마레씨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기억은 안 나지만, 아주 중요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네.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자네 도움이 꼭 필요하네.> <제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어르신. 가족분들은 알고 계신 겁니까?> <미안하네. 그건 말할 수 없네.> 수수께끼의 노인은 흐리멍덩한 눈에서 잠시 또렷한 인상을 주고 더크의 질문에는 일말의 단서조차 주지 않았다.
# 없는 번호
<어르신. 31번지입니다.> 눈을 감고 한 시간을 오롯이 기다리던 노인은 좌석을 박차고 차 문을 열었다. 그와 더크는 30번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31번지의 끝까지 돌아보기로 했다. 더크의 말대로 황량했던 31번지는 겨우내 추위를 이기지 못했던 가엾은 나무와 곁가지를 쳐내지 않아 이상할 대로 뻗은 가지들이 다른 곳과 이어지는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은 숨이 죽은 듯, 기력이 다한 듯 이전에는 파릇했을 색감들을 쉬이 내지 못해 이를 지켜보는 둘의 분위기를 적적하게 만들기도 했다. 노인은 때로는 호기심에 가득 차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가 하면, 어떤 곳은 무심하게 지나치고는 했는데, 더크는 이런 노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답답하기만 했다. <어르신, 정보를 주셔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서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제가 보기에는 어르신께선 어떤 도움이 필요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어르신은 제가 아니라 병원에 찾아가셨어야 할 것 같은데요. 대체 이름 없는 주소를 누가 찾아갑니까? 어르신과 시간 때워줄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까? 당신의 환상을 쫓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냐고 묻습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정말 간절하게 찾고 싶었던 마음에 그랬던 걸세. 먼저 차에 가 있게. 나는 좀 더 둘러보고 갈 테니. 약속한 대로 돈은 주겠네.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세나.>
# 사건 종료
노인은 더크가 차에 간 후에도 한참 뒤에나 돌아왔다. 어둑해질 무렵. 노인의 표정은 밤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피어오르는 해방감을 더크는 오랜 탐정 사무소 경력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이 됐든 성과가 있었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자 어서 가세.> <마레에 대한 단서를 좀 얻으셨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네. 자네에겐 내가 이상해 보인다는 것 잘 알고 있네. 정신 나간 노인이 젊은이의 시간을 뺐고 있으니 화가 안나는 게 이상하지. 어서 가세.> 노인은 그렇게 더크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홀연히 떠나갔다.
# 그의 노트
한 달쯤 지났다. 더크는 약속한 대로 노인에게서 큰돈을 받았고, 사무실을 정리하며 해외로 나가 살 참이었다. 그렇게 그와 찬란한 시대를 함께 보냈던 사무실을 내려놓고 차에 몸을 실은 그가 발견한 것은 웬 노트였다. 조수석 깊이 꽂혀있던 노트를 발견한 그는 단번에 그것이 마레를 애타게 찾던 노인의 것임을 발견했다. 빼곡한 노트를 집어 한 편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노트의 거친 질감이나 변색된 종이를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처음 그가 이 노트를 작성했을 때는 굉장히 어렸음이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글씨도 또박또박했고, 힘 있는 필체였다. 대부분은 그의 일상이었다. 그는 그렇게 특별한 삶을 산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행복하고, 가족도 있었으며, 가끔은 훌륭한 시민으로서 신문에 실린 모습을 스크랩으로 담겨있기도 했는데, 그를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눈동자의 색이 푸르른 바다처럼 보였다.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깊이 유영하는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신비롭고도 멋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트를 써 내려가는 간격이 멀어지더니, 최근으로 들어선 것은 마지막으로 쓴 날짜로부터 자그마치 10년이 지난 뒤였다. 10년이 지난 후 바로 오늘, 5년이 더 지났으니, 그는 최소 15년간 이 노트를 항상 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글은 나이를 먹은 그의 손처럼 주글주글 해졌고, 더는 문장을 이을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0년 전 첫 문장은 <마레를 찾아라> 였는데, 그 이후 어떤 단서도 없이 이 노인은 <마레>만을 찾아다닌 것처럼 보인다. 개중에는 어떤 신문 스크랩이 껴있었는데, 더크에 대한 내용이었다. <누구든지 찾아드립니다. 신흥 탐정 '트레뷔 더크' 이제는 어느덧, 경험을 말하다.> 그의 신뢰도가 도시 내에서 하늘을 찌를 때였다. 기사에는 마치 본래 없던 사람도 찾을 기세의 더크를 치켜세우는 문장들이 담겨있었고, 노인은 궂은일을 하며, 자신의 <마레>를 찾기 위해 돈을 모아 더크를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크와 노인이 만난 그날, 그가 마지막으로 작성한 노트에는 힘겹게 쓴 그의 필체로 어렵사리 써 내려간 편지를 볼 수 있었다.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자그마치 20년을 헤매었네. 그대가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은 '마레'때문에,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잃었네. 그대여 말해주게. '마레'가 대체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이인가? 아니, 그들은 이미 나를 떠났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사랑했던 이들을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네. 그들은 나를 증오하고 미워할 테지. 그것은 그대가 찾는 것이 아닐 걸세.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면, 부인가? 아닌 것 같네. 나는 이미 부를 잃었고, 다시 찾을 마음이 없네. 부는 항상 나를 괴롭게 하였다네. 말해주게, 차고 넘치는 돈이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늙어 흙으로 갈 몸만 남았을 뿐이네.
그렇다면, 나에게 새로운 동행을 바라는 것인가? 그도 아닌 것 같네. 나는 이미 치일 대로 치인 늙은이일 뿐이네. 기억을 잃어가는 시점에서 방금 전 만난 이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 적어놔야만 했다네. 이런 비루한 늙은이를 누가 찾겠는가? 그대가 나에게 좀 더 일찍 찾을 것을 예상했다면,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네.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네. 자네는 대체 무엇을 찾고 싶은 건가?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에게 자네의 부탁은 너무나도 벅차기 그지없네. 체스킨 32번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주소일뿐더러, 꿈과 희망도 없어 보이는 도로인 것을, 그대의 부탁에 그토록 수도 없이 여기를 왔었지만, 나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네. 언젠가는 번영했을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그대가 그리고 내가 찾는 것은 없었네. 이 근방에서 가장 유능한 탐정인 이 젊은이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네. 나에겐 이제 남은 것이 없네. 돈도, 마음도, 기억도, 사람도... 이제는 이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네. '마레'라는 것은 아마 내가 닿을 수 없는 차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거나, 깨닫지 못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네. 미안하네.
나는 이제 쓸모를 다해 이 세계에서의 효용을 따질 수 없는 잉여로운 부산물이 된 것만 같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을 털어버릴 곳으로 가려고 하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겠지. 그대는 이제 나를 놓아주게. 그대의 환상 속 꿈이 더 이상 나에게는 간절한 이상과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게. 잘 있게나."
더크는 조용히 그의 노트를 조수석에 놓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가 나아갈 방향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그의 차창 유리의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며 세상의 눈물과 그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쓸어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