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정치적인 이슈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여행기를 쓰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묘하다. 이 시국도 언젠간 과거가 되고 역사에 기록될 터, 나 또한 나의 역사가 될 기록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나라의 역사든 개인의 삶이든 그것을 보존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이니까.
나고야 주부 국제공항
폭설을 뚫고 도착한 나고야. 인천에서의 거친 눈발과 다르게 나고야에는 맑은 햇살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출국 심사를 하고 난 후 가장 먼저 ATM에서 현금을 뽑았다. 해외 전용으로 만든 트래블러 카드를 쓸 수도 있겠지만, 예산을 관리하게 위해 현금을 뽑아서 쓰기로 했다.
일본은 한국과 다르게 현금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래봐야 얼마나 사용하겠어" 싶었지만, 이내 탑승한 열차에서 바로 진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메이테츠 뉴스카이 급행열차 (주부 나고야 국제공향~나고야역)
나고야역으로 향하는 메이테츠 뉴스카이 급행열차를 탔다. 열차의 느낌은 그야말로 감성 그 자체. 일본 애니에서만 봤던 푸른 바다와 작은 전통 가옥들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필터를 입힌 듯 청량한 색감과 오목조목 잘 가지런히 잘 정리된 마을들까지. 어느 하나 눈을 뗼 수 없었다.
한참 창 밖을 감상하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역무원이 들어왔다. 그는 한국에서 8~90년대에 입었던 교복 같은 복장을 하고 검은 일수 가방을 든 채 빈자리를 체크했다. 그러다 손님이 결제를 요청하면 가방에서 지폐와 동전을 꺼내 일일이 거슬러줬다. 굉장히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오래간만에 아날로그 감성을 연타로 맞은 느낌이랄까.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 관광객으로서 느낀 일본의 첫인상이었다.
나고야역으로 가는 길의 풍경, 도시 중앙을 달리는 열차
나고야역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하다는 장어덮밥을 먹었다. 비싼만큼 맛은 있었지만 간이 좀 쎘다. 중반 이후로는 김치가 절실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첫 식사인만큼 남기지는 않았다.
계산을 하는데 젊은 여성 점원이 수줍은 미소와 함께"칸코쿠? 안녕하세요. 감사하무니다." 하고신기한 듯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표정에서 한국인과는 또 다른 오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상냥하지만 상당히 절제된 예의였다.
메구르버스를 타고 나고야성을 가는 길
배를 채운 뒤 나고야성으로 가기 위해 도심의 관광지를 순환하는 메구르버스를 탔다. 버스 이름에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물씬. 동전을 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한국과 다른 점은 기사 아저씨가 정거장마다 일일이 안내를 해준다는 것.
괜스레, "저 아저씨는 집에 가서도 저렇게 하이톤으로 친절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고야성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입장 시간(오후 5시 입장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갔다.
나고야성은 나지막한 공터 안에 위치한 거대한 성이다. 일본의 에도 막부 시대에 지어진 성으로, 장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또 다른 장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궁과는 또 달랐다. 굉장히 화려하고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 강했다. 나고야성의 지붕에는 수많은 까마귀들이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반쯤 둘러보는데 고령의 경비원들이 "곧 마감을 하니 나가달라"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우리나라와 여러 여러 인연이 있는 일본의 역사적 건물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역사에도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다짐도 한 순간이었다.
나고야성 일대 내부
나고야성 근처 공원 부지 일대
나고야성을 나오자, 어느새 햇살이 지고 나른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도로를 바라보는데 지는 하루가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현지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하루겠지만 나고야를 처음 마주한 내겐 감명 깊은 순간이었다.
여행의 좋은 점은 누군가의 일상을 감동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일상을 사는 현지인들은 모른다. 그렇게 보면, 나의 오랜 서울살이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때론, 누군가 내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사는 도시의 저녁은 참 멋지다고. 당신의 삶도 그렇고.
나고야 시내 위치한 미라이타워
나고야의 저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미라이타워에 올랐다. 타워로 향하는 길, 거리에서도 횡단보도에서도 한국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은 도리어 그래서 좋다고 했다. 전에 도쿄나 후쿠오카에 갔을 때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여행을 온 느낌이 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고야는 완전한 타국에 와 있다는 느낌과 함께 짙은 해방감을 선사했다.
미라이타워에서 바라본 나고야 시내 전경
빌딩 옥상에서 바라본 나고야는 영락없이 평범한 도시였다. 생각보다 큰 빌딩도 없었고 엄청나게 밝은 네온사온도 없이 고요했다. 멍하니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던 열망이 떠올랐다.
여행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10여년 전 떠났던 배낭여행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순진한 자유를 느꼈던 순간. 이미 오래전 굳어버린 책임과 불안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웠던 그때를 다시 한번 맛볼 수 있었다.
나고야 시내에 있는 건축물 '오아시스21'
저녁의 감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 느낌의 술집에 들렀다. 나고야 직장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역시나 관광객은 없었다.
사케와 삿포로 생맥주, 따뜻한 라멘과 닭날개튀김을 주문하고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부장님 연배의 머리까진 아저씨와 젊은 여직원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까지. 그들은 하루의 고단함을 술잔에 털어 넘겼다.
이방인으로써 느끼는 신선함. 말 그대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였다. 특히, 잔 가득 채워준 사케와 닭날개튀김은 그 조합이 정말 일품이었다.
나고야 시내에 위치한 로컬술집에서 먹은 음식
나고야에서의 첫날이 저무는 것이 아쉬웠다. 숙소까지 걸으며 귀가하는 현지인들을 감상했다.
오목조목 구성된 도시. 특히 거리가 상당히 깨끗했다. 약 30분을 걷는 동안 그 흔한 쓰레기봉투 하나 볼 수 없었다. 일본의 거리는 깨끗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려 잠깐 들른 편의점에는 동남아 외국인 분들이 모두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작지만 꽉 찬 도시, 잘 정돈된 책장 같은 도시. 나고야의 첫 느낌이었다. 고요함 속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고야 사람들. 남은 날들도나고야를 조금이나마 온전히 느끼고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