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진눈깨비, 갓쇼츠쿠리, 그리고 서양인 관광객들
스산한 겨울바람이 분다. 왠지 모르게 바람이 평소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오늘 아침 9시, 전라남도 무안에 위치한 무안국제공항에서는 착륙 중 여객기가 폭발해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가 있었다. 여러 뉴스 보도에 따르면, 해당 여객기에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을 맞아 설레는 맘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던 많은 분들이 탑승해 있었고, 승무원 2명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생명을 달리했다.
정확히 1달 전 29일 나고야행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었기에, 괜스레 마음이 울적하다. 지금도 무안공항에는 유가족 분들의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있을 터. 뜨거운 화염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을 그 마음을 감히 어떻게 기릴 수 있을까.
부디 사고가 잘 수습되고, 또다시 이런 참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 분들에게 부족하지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고야 여행 3일 차,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으로 알려진 시라카와고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섰다. 밖에는 뜻밖의 설경이 펼쳐졌다. 거세게 날리는 눈발과 차가운 공기가 아침을 뒤덮고 있었다. 한국에서 맞는 눈과는 또 다른 분위기.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버스가 올 수 있을까?"
걱정을 안고 정류장에 섰다. 길에 난 바퀴자국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예정 시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설마"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저 위에서 라이트빛이 비쳤다.
버스를 타고 달리며 본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동생과 나는 한동안 눈으로 뒤덮인 창 밖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사이사이, 작은 지붕 위까지 어느 하나 빠진 곳 없이 눈이 빼곡히 가득 찼다. 내렸다는 말도다 가득 찼다고 얘기할 만큼. 아름다웠다. 카메라로 이리저리 담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역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눈으로만 담을 수 있나 보다.
"눈을 못 볼까 봐 걱정했는데, 여기 와서 올해 눈구경은 다하고 가네요."
시라카와고로 향하는 버스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탑승했다. 한국인은 우리가 거의 유일했는데 괜스레 뿌듯했다.
1시간여 눈발을 헤치고 달려 도착한 시라카와고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불과 3일만에 햇살과 비와 눈을 모두 만났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의 연속, 일본에는 역시 '날씨의 아이(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날씨를 바꾸는 아이가 등장한다)'가 있어 날씨를 계속 바꾸는 가 싶었다.
시라카와고(白川郷)는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오래된 전통 가옥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다. 짚을 겹겹이 쌓아 올린 지붕인 양식인 '갓쇼츠쿠리'가 가장 큰 특징이다.
'갓쇼즈쿠리'는 일본의 에도 시대부터 시작된 양잠을 위해 지붕 안에 선반을 설치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눈을 보다 쉽게 치우고 동시에 지붕 내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경사도를 높였고, 그 방식이 지금의 독특한 세로지붕 형태로 굳어졌다고 한다.
시라카와고 마을은 4계절 모두 특별한 매력을 선사한다. 갓쇼즈쿠리 지붕의 모습이 계절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곳곳에 서 있는 특이한 집들을 보며, 언젠가 벚꽃이 만개하는 봄과 낙엽이 푸른 여름에도 한 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을 1시간여 걷다 보니 쌓인 눈만큼 피로가 많이 쌓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마을에 있는 한 음식점에 들렀다. 매콤한 가락국수와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일본이 동양에서는 관광강국이긴 한가 봐요."
몸을 녹이는데 다양한 서양인 관광객들이 계속 오고 갔다. 한편으론 부러웠다.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에는 이렇게까지 서양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는데... 전통을 유지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매우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지켜온 전통은 뭐가 있을까?
난로옆 바테이블에 앉아 꼬치와 함께 따뜻한 사케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여행을 왔을 텐데, 이 시간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할까. 순간 이런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오후 3시경, 감성이 넘치는 소도시 시라카와고를 뒤로한 채 나고야로 돌아왔다. 3시간여를 달렸을까. 해가 저물어 하늘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시라카와고와 달리 나고야의 날씨는 맑고 포근했다. 시골과 도시, 도시와 시골, 두 공간은 서로 다른 느낌이지만 모두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기다려왔던 '된장 돈까시'를 검색했다. 찾고 찾아 들어간 돈가스집. 외관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과장하지 않고 지금껏 먹어봤던 돈가스 중에서는 가히 최고였다. 한국에서는 맛본 적 없는 된장돈가스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밤이 아쉬웠다. 그래서 분위기 좋고 너무 시끄럽지 않은 이자카야에 들렀다. 예약제라 자리가 없었다. 결국 재떨이가 있는 야외 스탠딩 테이블을 배정받았다. "한국인이라 무시하는 거 아니야?" 괜한 우스갯소리도 해봤지만, 모든 걸 낭만으로 포장했다. 오가는 젊은 일본 커플들, 부장님에게 한 잔 더 사달라고 하는 직원들, 한국인이라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고야의 마지막 밤은 고요하고 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갔는데, 마지막 밤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하천을 중심으로 나고야 시내를 세 바퀴 돌았다. 그냥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았다. 나고야에서의 마지막 러닝이었다. 언젠가 또 오게 되면, 이 공기와 네온사인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날을 잘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잘 돌아갈 수 있기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