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캠퍼스의 향기, 그날의 초상
한연의 비너스 2화 with GPT
카페에서 나온 근은 이어폰을 주섬주섬 꺼내서 아이폰과 연결했다. 어디론가 갈 때,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마음을 조금 편하게 먹고 싶을 때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에서 멀어져 나만의 외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아버지의 불륜의 기억과 본능에서 나오는 성적인 욕망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저 계절을 느끼며 걷고 싶었다.
근은 긴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의 안감으로 스쳐가는 그의 바지 핏은 끝없는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의 수면처럼 길게 떨어져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캠퍼스 곳곳에 펼쳐져 있는 은행들은 구리면서도 새콤달콤한 향을 내고 있었다.
"아우, 똥 냄새."
지나가는 학생들은 똥 냄새가 나는 것을 강조하며 걸어갔다. 근은 그 은행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밝은 황금빛을 내며, 여기저기 약간의 채도를 바꿔가며 떨어져 있는 것들이 꼭 금구슬 같았다.
'저게 똥 냄새가 나는 금구슬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저걸 줍기 위해 모여들겠지. 그리곤 서로가 더 많이 줍겠다고 싸우다가 누군가는 거친 주먹에 맞아서 기절할지도 몰라.'
근은 이상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꼭 그림으로 스케치해서 보관했다.
학생회관 옆의 아동 앞에는 큰 광장이 있었다. 지식과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하는 대학교답게 광장은 참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학생들이 휴식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특이한 학생들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는 날,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 등장하는 큰 광장처럼 많은 학생들은 그곳을 지나다녔다. 항상 지나다니는 캠퍼스의 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지날 때는 뭔가 모를 설렘과 열정이 샘솟는 듯했다.
근은 광장 중앙에 서 있는 한연의 비너스를 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그녀는 웃으면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가식을 떠는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웃으며, 한편으론 울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감정을 담을 수 있었을까? 근은 속으로 속삭였다. 어쩌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웠다.
근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예쁘다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자신의 페니스가 흔들리게 하거나 치골 옆의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은 학교 안의 예쁜 여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녀들이 모두 창녀처럼 생겨서도 아니고, 아나운서처럼 조신한 인상과 성숙한 느낌을 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또한, 그녀들의 뇌가 성숙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매력인 섹시한 뇌를 가지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그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근은 하얀색 건물로 굉장히 밝은 느낌을 주는 이 캠퍼스 안에 그 밝음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그런 성녀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의 의식이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탐색 작업에 한창일 때, 그의 스마트폰은 정신없이 울어대고 있었다. 문명의 발달은 갈수록 인간을 바쁘게 만들었다. 알람을 안지한 근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현철에게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야, 오늘 패션 디자인과 여자애들 2명이랑 한잔할래? 학교 앞에 새로 생긴 포차 가보자."
근은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다면, 신선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예쁜 여자애들과 앉아서 남녀 간의 헌신적인 사랑과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야 하는 이유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알코올과 함께 밤을 보내기가 싫었다. 의미 없는 하루가 되면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미안, 나 오늘 좀 바쁘다. 미안."
현철의 제안이라 거절하기 더 그랬지만, 근은 자신의 생각을 따랐다.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려 방으로 가려는 근의 눈에 뭔가가 포착됐다. 너무나 뚜렷하게 검은 생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앉아서 한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낌이 싸했다. 귀신같기도 하고 그냥 동상 같기도 했다.
근은 항상 한비보다 아래쪽에 앉아서 그녀를 그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높은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사진을 찍어서 높은 곳에서 각도를 잘 잡아서 찍으면 더욱 아름다운 사진들이 많이 탄생하니까. 새로운 한비를 그릴 마음에 근은 기분이 좋았다. 높은 강의실에 올라가서 그릴지 아니면 옥상에 가서 그릴지는 방에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하늘에서는 여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흐릿한 날씨는 아동의 광장에 서 있는 한비를 더욱 신성하게 만들었다. 마치 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 신전의 모습과 흡사했다. 신들의 올림푸스 신전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들이 한비의 온몸을 스쳐가기도 하고 그녀의 회색 팔꿈치를 핥고 있었다. 하지만 한비는 흥분되지도 않는 듯했다. 떨어진 빗방울들은 한비의 눈가를 촉촉이 적셨고, 한비의 눈은 떠나가는 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랜 날의 밤의 추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은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한비는 알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근은 다른 어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손을 씻었다.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항상 손을 많이 씻었다. 하루에 30번은 씻는 듯했다.
찝찝하고 기름기가 있는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종이에 검은 기름때가 묻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근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항상 샤워를 하고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큐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유명 작가들의 특이하고 괴상스러운 집필 방법들 같은 것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체로 글을 쓰는 소설가, 여성의 벗은 척추 위에서 작업을 하는 화가,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만 딱 집필을 하는 극작가와 같이 이보다도 훨씬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세상이 더 재미있는 것이다. 손을 씻은 근은 바로 다음 차례인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어질러지는 방은 참 신기했다. 어제 청소를 했지만 또 더러워지고 어질러지는 것이었다.
혹시, 몇해 전 개봉한 손현주 주연의 영화 ‘숨바꼭질’처럼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근은 종아리에서 허벅지를 타고 마른 허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작년에 봤던 그 영화는 굉장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불안 공포’에 순식간에 떨게 한 것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참으로 끝이 없고 가끔은 정말 기괴하기도 하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굉장히 흉악하기로 소문난 중범죄자들 중에는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근은 ‘하느님이 세상을 더 어지러운 미로처럼 만들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청소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 그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굉장히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근은 믿고 있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뭐, 쿨한 것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요즘, 청년들의 사이에서는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근은 마지막으로 청소기를 켜서 청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켜져 있는 노트북의 네모난 화면 속에는 노골적인 포즈를 취한 여성의 사진이 있었다.
네이버 연합 뉴스
‘톱스타 A양, 과거 남자친구가 누드사진 유포.’
평소에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던 연예인이었다. 찢어진 눈에 가녀린 사지는 봉긋함을 넘어 왕성한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더욱 돋보이도록 했다. 전형적인 여우상이었다.
‘저런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하겠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한때는 그녀가 무대에 올라와 흔들어대는 탱탱한 젖가슴을 보며, 터져가는 페니스를 휘어잡고 마구 흔들었던 적도 있었다.
만약, 근이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다면, 근의 페니스는 울화가 치밀어, 생명의 힘을 가진 눈물을 토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냥 관심 없는 연예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차이고, 다시 한번 화끈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저런 짓을 한 것이겠지. 저런 짓을 하는 남자는 대개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녀와 더 이상 섹스를 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이 가장 욕망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아까부터 근의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혼자서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근의 심기를 조금씩 건드렸다. 결국, 근은 폰을 열었다.
"오빠 맞죠? 나, 애리예요."
"오랜만이네요, 같이 밥 먹을까요?"
"내일, 시간이 어떻게 돼요?"
한연대학교 성학과 2학년 신애리였다. 1년 전, 여름방학에 1년 동안 진행했던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서 가는 여름 방학 해외 봉사단에서 처음 만난 여자애였다.
해외로 떠나는 날, 근은 초록색 원피스에 흰색 클러치를 들고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그녀는 패션워크에 워킹을 하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녀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
운명이 도박을 하고 와서 기운이 없었는지 그 여자애는 근의 옆에 앉았다. 안 그래도 저가 항공사의 좌석이라 좁은 데다가, 그녀는 자꾸 다리를 꼬고, 몸을 꿈틀거렸다. 근은 그때부터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정말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할리우드 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처럼 동그랗고 쌍꺼풀 짙은 눈에 갸름한 얼굴, 그리고 밑 입술이 도톰한 섹시함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자꾸 옆에서 조잘대는 모습이 꼭 대낮부터 배고프다고 찡찡대면서 울어대는 참새들 같았다.
근은 억지로 그녀의 만담을 받아주면서 가까스로 그 여정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에도 계속해서 근에게 연락을 해온다는 것이었다. 봉사가 거의 끝날 때쯤, 근은 그녀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 기생하고 있는 성학과 소속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성학과 학생이라 호기심이 많아 저렇게 말이 많은가 생각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같이 밥을 먹자며 연락을 해왔다. 캠퍼스 내에서 한비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마주친 애리는 항상 옆에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남자아이들이 근이 보기에는 너무나 별로인 아이들이었다. 애리가 탐나서 그녀를 뇌 속에 들여놓고 싶어서 난 질투가 아니었다. 정말로 별로인, 청춘이라는 매력 지수로도 어필할 수 없는 그런 지질한 놈들이었다.
애리가 연락을 해올 때마다 근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친구와의 약속, 교수님과의 상담, 과제, 동아리 등 신입생이 싫은 선배와 술을 먹기 싫어서 늘여놓는 귀여우면서도 진지한 핑계들이었다.
학교에서 직접 마주칠 때면 그녀는 이상한 억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근 오빠~"
부담스러웠다. 애리는 정말로 특이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반말과 존댓말을 이상하게 자꾸 섞어서 사용했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살다 와서 한국말이 조금 서툰가?라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근은 어김없이 또 하나의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 내일은 집에 좀 일이 있어서..."
"그래요? 알겠어요! 다음에 먹지 뭐!"
돌아오는 시원한 대답, 역시 신애리였다. 한연대학교의 퀸카가 해야 할 반응이었다. 근은 폰을 내려놓고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학자금과 장학금 문제, 그리고 아르바이트 업주와의 불화 문제 등 너무나도 사소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골치 아픈 걱정들이었다.
"항상 사랑같은 낭만적이고 불확실한 것만 고민하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근은 또 쓸데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시계의 분침을 정확하게 봤다. 18시 25분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혼자서 생각하는 동안 꽤 긴 시간이 흘러갔다. 완전히 밤이 들어서면 한연의 비너스를 제대로 그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근은 서둘러야겠다고 혼자서 다짐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그림과 펜, 그리고 이젤을 챙겼다. 참으로 간단하고 참한 구성이었다.
팔레트와 포스트 컬러, 물감, 붓, 물통 등의 귀찮고 덜렁거리는 것들을 챙기지 않고 오직 흑연의 감촉으로 수만 가지의 폭을 나타낼 수 있는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것은 너무나 황홀한 이야기였다.
검은색 나일론 롱 코트를 걸친 근은 다시 방을 나섰다. 방 앞의 편의점에서 싸구려 캔 커피 한 개를 집어든 근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특유의 뚝뚝한 걸음으로 아동을 향했다. 광장 입구에 켜진 가로등은 왠지 평소보다 더 밝아 보이는 듯했다. 그 가로등은 한비의 왼쪽 라인을 전부 비추고 있었다. 근은 아동에 빠르게 도착했다.
습한 저녁의 공기들은 대기 중에 떠서 자신들의 가벼움을 강조하면서 뿌듯해하고 있었다. 근이 지나가자 그들은 모두 숨죽였고, 발랄함을 숨겼다.
밤의 캠퍼스는 굉장히 조용하고 고요하다. 하지만 낮의 캠퍼스는 많은 학생들이 지나다니며, 여대생들이 여고생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듯이 수다를 떠는 장소이다.
웃음소리와 청춘의 심장이 뛰는 경쾌한 소리, 정말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공간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면 상황은 조금 변한다. 청춘의 현실은 이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든 열정을 가지고 해낼 수 있다는 용기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속내에는 삶의 고단함과 미래에 대한 막연함, 그리고 사회 구조에 짓눌리고 싶은 패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양면의 얼굴을 한 청춘은 그 어떤 캠퍼스에도 존재했다.
근은 서둘러 3층을 향했다. 온통 불이 꺼진 건물 안은 꾀나 섬뜩했다.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축지법 귀신이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았다. 닭살이 돋은 근은 축지법을 떠올리면서 허경영씨를 떠올렸다.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대선 공략을 내세웠던 그를 생각하면 조금은 웃음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2층에 계단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얇은 구두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3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근은 몸을 벽에 기댄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구두 소리는 점점 근의 숨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때, 밑에서 두 남녀가 큰 신음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근은 몸을 숨기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가 반대편 코너 쪽에 숨었다. 누가 봐도 엄청난 소리를 내며 두 야생마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미쳤다. 미쳤어.”
근은 혼잣말로 속삭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학교 안에서 저렇게 뛰어다니는 이유가 무엇일지 심히 궁금해졌다. 사실, 궁금하기보다는 어둠 속에 갇힌 두려움과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싶었다. 그 구두소리는 여성의 높은 하이힐의 굽 소리가 확실했다.
여성의 구두에 굉장한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근에게 그 정도 소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여성의 G스폿을 자극하는 일만큼 쉬운 일이었다.
'구두소리는 왜 이제 나지 않는 거지?'
근은 그 소리가 계속 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 근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무엇인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5분쯤 지났을까? 근은 문제의 강의실로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잔뜩 끼어있는 그곳을 더 이상 빛이라는 놈이 없이 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근은 스마트 폰을 꺼냈다.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카카오톡 알림 창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근은 가볍게 무시하고 플래시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밝은 형광색의 플래시 사방을 강하게 밝혔다. 근은 무서운 좀비가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 세상에 좀비 같은 것은 존재 할리가 없다. 하지만,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실제로 좀비 바이러스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곤 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 없다면 이 세상 자체도 생길 수 없었을 테니까. 근은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근의 시선이 향한 왼쪽 중간의 강의실에는 AH304라는 강의실 명이 써져 있었다. 헷갈렸다. AH303도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근은 좀 더 가까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3년을 다녔어도 적응되지 않는 이 강의실 냄새, 근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쳐다봤다. 그는 용기 있게 손잡이를 붙잡았다.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두려워졌다. 선뜻 열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마지노선에 몰린 패잔병처럼 근은 선택해야 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 건물에서 뛰쳐나갈 것인지. 아니면, 문을 열 것인지. 근의 의식은 조금 선명해졌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뭔가 강한 숨을 내쉬며 속삭이는 소리 같았다.
‘설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근은 뭔가 서글퍼졌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근은 엄지와 검지로 문고리를 강하고 잡고 단 하나의 소리도 기어나가지 않게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첩보영화에 나오는 특수요원처럼 조심스러웠다. 문고리를 다 돌린 근은 조금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강한 바람이 강의실 안의 창문과 문을 통해 몸을 비볐다. 격렬한 싸움 후의 섹스처럼 강렬한 바람이었다. 안의 존재들은 그 바람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교탁 위에 앞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성은 고개를 젖히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깊은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진짜 어린아이라면 큰일이겠지. 근은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부드럽고, 강하고, 하나가 된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
행복의 조건이라고 현대인들이 떠들고 다니는 속궁합 같은 걸로 설명할 수 있는 행복이 아니었다. 모든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당신과 나만의 숨소리가 공존하는 세계인 듯했다. 머리를 들이 밀고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성스러운 나체 옆으로 한비가 근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비는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비춘 가로등은 대범했다. 그 어떤 노을과 빛보다도 깊고 잔잔했다.
남자의 등 뒤로 무엇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지중해 바닷가에서나 볼 수 있는 에메랄드 빛 보석이었다. 보석들은 그의 황토 빛 들판을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화면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근의 시신경을 따라 헤모글로빈들은 온몸의 모세혈관으로 그 느낌을 옮기고 있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근이 었다. 근은 지금까지 그렇게 격렬하면서도 환상적인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신선한 충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충격은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