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언론, 오묘한 갑을 관계
지금 써 내려가는 이 사건은 약 두 달 전에 직접 겪은 일이다. 흔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그다지 자랑하고 싶지도 숨기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의 일상에 큰 파장을 남긴만큼, 조금은 사적인 이 공간에 남겨두기로 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또 다르게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근로자로서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하던 회사가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했다. 곧바로 나는 검찰로부터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이후 회사는 경영에 큰 타격을 입었고 (재정상 영세한 환경에서 운영해 오던 회사였다) 일터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수십 년 동안 사명감을 가지고 언론사와 언론단체를 운영해 왔던 대표님 그리고 신입 팀원들과 함께 비전을 가지고 일했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저널리즘과 먹고사니즘의 경계에서 잘 되기를 고민하던 중 이 일이 터졌다. 회사 구성원 모두는 당황했고 책임과 진실을 묻기도 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평온했던 봄날, 점심을 먹고 돌아온 사무실에는 처음 보는 손님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00 지검에서 나왔다는 수사관들은 "00 사건의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다"며, 기자들의 컴퓨터와 노트북 등 전자기기 사용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처음 겪는 일인 만큼 태연한 척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주체는 모 대기업(고소 주체)이었다. 내가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와 연관이 있었기에 어떤 경위로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해당 사건은 총수일가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영장에는 모 기업 측에서 주장한 대표님의 혐의점이 기록돼 있었다. 그 내용에는 일련의 사실과 주장이 포함돼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재계의 큰손이라는 이름 하에 건넸던 그들의 미소와 얼마뒤 찾아온 압수수색이라는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영악하거나 순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키고 싶은 사회적 체면과 막대한 자본이 있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선을 넘어서라도 펜대를 굴려서라도 그 허들을 넘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협상의 테이블에 있던 당사자들만 알 수 있겠지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던 기자로서는 허탈함과 무력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렇게 여러 감정이 드는 이유는 나의 서투름과 부족함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내가 당한 이 일에 대해 "대기업이 법조계 인맥을 동원해 무리한 수사를 유도했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이 또한 나의 주장일 뿐이다. 영세한 언론이 가진 게 뭐가 있어 대기업과 싸운다는 말인가. 발악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게 현실인 것을.
하지만 그렇기에 언론은 더욱 원칙을 지키고 저널리즘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그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하는 고민만큼이나 어렵다. 먹고사니즘과 저널리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기름과 물 같은 관계일까.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몇 년 전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저자 이소룡/가명)'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20년간 한 메이저 언론사에서 기자로 생활하며 직접 경험한 언론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짚은 전직 기자의 반성이 담긴 회고록이다. 나에게는 그 정도의 내공과 실력은 없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작게나마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를 읽고 1,2>
https://brunch.co.kr/@rhkrwndgml/303
https://brunch.co.kr/@rhkrwndgml/304
기사를 빌미로 한 언론과 기업의 금전 협상은 오랫동안 이뤄진 관행이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으며 그 어떤 언론과 기자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는 옳고 어디까지는 그른지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법과 언론의 잣대가 서로 다르듯, 저널리즘과 생존의 잣대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