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마저 센치한 예술의 도시 '파리'
"봉주르, 메시" (프랑스)
"본조르노, 그라셰" (이탈리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지난 2주간 가장 많이 던졌던 인사다. 의미도 모른 채 가식적이지만(?) 진심을 담은 미소를 자주 지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신혼여행을 간 관광객이었던 나는 단 며칠 만에 처음 마주한 유럽의 멜랑꼴리한 공기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혼여행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와 떠난 여행인데 뭔들 좋지 않았을까. 비교적 충분한 시간(약 13일), 여윳돈(모아둔 자금+축의금 일부), 그리고 유럽에 대한 기대, 유럽의 도시가 눈앞에 펼쳐질 것을 기대했기에 그만큼 좋았을 수밖에 없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은 약간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소위 유럽병에 걸렸다는 말처럼, 폭주할 것 같은 방랑벽을 억누르고, 기다리던 일상에 다시 나의 생각과 마음을 맞추고 있다. 일상은 소중하기에. 어떻게 이 여행의 향수를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책을 샀다.
남부럽지 않은 고위직 공무원으로 살며 여유로우면서도 바쁜 일상을 살던 괴테는, 삶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예술의 혼을 불태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약 2년간 여행을 떠난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 가능한 여행이었겠지만, 괴테는 사치와 유흥, 휴양을 즐기기보다는 이탈리아의 예술과 문명, 소시민의 삶에 집중하며 기록을 시작한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여행이다. 인스타를 위한 여행이 아닌, 밤하늘의 스타를 기록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리며 영감을 채우는 그런 여행이 아니었을까.
서울에 온 외국인들이 서울병에 걸려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돌아온 일상 자체가 여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여행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을 테니. 이건 정신승리를 위한 다짐이다.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축복이라면, 일상 중에는 출근을 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복이다. 축복은 어느 하나의 삶에만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몇 주만 지나면 유럽의 향수가 조금은 흐려지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파리, 한국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행지 1위는 단연 파리가 아닐까. 파리는 단연 정서적 낭만과 예술의 도시다. 파리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도 에펠탑과 센강, 몽마르트르 언덕을 한 번쯤 들어봤을 테니까. 나도 그랬다.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의 감성이, 발 디딘 그곳에도 있었다. 시와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다 보니 더 그렇게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그리고 마땅히 잘 브랜딩 된 곳이 바로 파리가 아닌가 싶다.
월요일 이른 아침, 모두가 출근을 위한 사투를 벌일 시간 그녀와 나는 공항 라운지에 앉아 조식을 먹고 있었다. 출국이고 여행이라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아시아나항공 라운지에는 오목조목 다양한 샐러드와 요거트, 빵이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조금 어울리지 않는 컵라면까지. 결국 컵라면을 먹었다. 김치 사발면이 얼마나 간절해질지는 몰랐다. 프랑스 요리에도 낭만은 깃들어 있지만, 그 낭만이 한국인의 입맛까지 물들이진 못했다.
장차 16시간의 비행, 첫 장거리 비행이라 그런지 몸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시아나 항공사의 여행은 참 친절했다. 대한민국 항공사의 서비스 정신이었을까. 진갈색의 단정한 옷차림을 한 승무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기내식을 차렸다. 선망받은 직업이라고 하지만, 내가 목격한 광경은 결코 쉬워 보이진 않았다. 누군가에겐 일 년에 한두 번 남짓의 여행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일 테니까. 오랜 시간 입꼬리 미소를 짓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즐긴다면 굉장히 멋진 직업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보니 착륙이 가까웠다. 저 멀리 해 질 녘 놓인 에펠탑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12월 22일 오후 5시,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샤를 드골은 프랑스 제18대 대통령)이었다. 하루를 끝낸 파리의 하늘은 진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 한국과는 다른 하늘이었다. 호텔 픽업 서비스를 신청한 우리는 픽업자 분을 기다렸다. 10여분 기다렸을까. 키가 큰 중년의 한국인 남성분이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물론 여행 중이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저녁시간 늘 굳은 표정으로 정신없이 퇴근을 하는 직장인들만 봐와서 그랬는지도. 마음의 여유는 많은 걸 보게 만들어 준다.
픽업 차량을 타고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익숙한 듯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들은 모두 유럽산이었고, 도로 양옆으로 비친 은은한 잿빛 하늘은 도시를 더욱 센티하게 만들어줬다. 픽업을 해주신 분은 대학교 시절 유학을 와서 20년 가까이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가는 동안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한 잘못된 관광객들의 인식과 루머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중 한 가지는 프랑스인들이 불어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일부로 영어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불어는 전 세계에서도 많이 쓰는 언어라서 굳이 영어를 배우거나 쓸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일부로 영어를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져, 그에게 파리에서의 삶은 어떻냐고 물었다.
"좋죠. 그런데 살기는 힘들어요. 곧 한국으로 가야죠."
예상한 대답은 아니었다. 이렇게 건축물도 예쁘고 낭만 있는 도시에서 사는 게 왜 힘들까 싶었다. 하지만 어떤 도시를 봐도 그렇듯 매일 마주하는 일상과, 잠깐 스치는 여행을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경제 불황을 맞이한 건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1달여 전까지 파리에서도 복지 감면 정책에 반대하는 큰 시위가 있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대혁명을 일으켰던 나라인 만큼 국민의 주권과 인권에 대한 의지가 강하구나 싶었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우아한 건물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트리와 전구가 설치돼 있었다.
"와 너무 예쁘다. 여기가 파리야."
"파리는 '파리'에요. 프랑스하고는 달라요."
우리를 호텔까지 친절히 데려다준 후 아저씨는 떠났다. 호텔은 근사했다. 우리가 묵은 시타딘 레알 파리 호텔은 루브르 박물관 등 파리의 주요 관광지와 대통령궁이 위치한 파리 1구에 위치해 있었다. 휴게 공간을 포함한 넓은 로비와 거대한 트리까지 신혼의 첫 밤을 맞이하기에 적당했다.
시타딘 레알 파리 호텔
https://maps.app.goo.gl/jKoLkDVcbht7DmKm6
호텔 체크인 과정부터 험난했다. 도시세를 카드로 결제하는 과정부터, 방이 트윈룸(두 개로 나눠진 침대)으로 돼 있어서 문의를 하는 과정까지. 분명 직원은 영어를 썼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의 영어 실력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버벅거리고 티격태격하다가 겨우 입실했다. 하지만 로비에서 먹은 핫초콜릿은 정말 맛있었다.
늦은 저녁이라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우리는 먼저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파리 도심에는 길가에 설치된 테라스 공간이 굉장히 많았다. 우아한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과 1층에 설치된 테라스들은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파리의 도심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염탐하다가 결국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지 못하고 '빌즈 버거'라는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안에는 젊은 현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키오스크로 결제를 하려는데, 또 위기에 봉착했다. 카드 주입구부터 언어 선택까지 한참이 걸렸다. 핸드폰을 꺼내 챗GPT에게 물어보다가 겨우겨우 메뉴를 골랐다. 직원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음료도 따뜻한(?) 걸 가지고 와 버렸다. 맛은 신기했다. 느끼하면서도 오묘한 식감. 버거킹이나 맥도널드에서 먹었던 촉촉한 버거와 달리 찐득하고 축축한 버거였다. 느끼하지만 먹을만했다. 파리의 음식이 느끼하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배가 많이 고팠기에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녀가 남긴 것까지.
하루를 그냥 마무리하기 아쉬워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가 마트에 들렀다.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이 필요했다. 마트는 이리저리 미로처럼 연결돼 있었다, 한국의 창고형 매장처럼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로 넓은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을 가봐야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곡선의 미인가? 역시 파리는 다른가? 의미부여를 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신선한 채소와 야채, 그리고 치즈와 와인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 치즈와 와인이 유명한 나라라는 것이 여기서 보이는 구나 싶었다.
신혼의 첫날 밤, 그녀와 나는 지구 저편의 한 나라의 호텔방에서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모든 게 새로운 순간, 실수로 여행을 망칠까 놀라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사실 다퉜다기 보단 내가 그녀에게 혼이 났다고 하는 게 더 맞는 상황이긴 하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라 크게 개의치는 않았지만, 완전히 낯선 땅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약 7년을 만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게 어렵고(?) 궁금한 여인이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여인과의 첫 해외여행.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여행동안 그녀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마담(Madame), '마이 마담'이라고. 마담은 프랑스어로 '부인', '여사',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존경하는 성인 여성에게 쓰는 존칭이다.
https://youtube.com/shorts/V6DNNepadQ8?si=ifxpD8f6eV37qF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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