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지 2주가 흘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있다. 지금 도심 속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2주 전 저기 저 푸른 섬 제주의 카페에서 바라보았던 풍경은 확실히 다르다.
(왼쪽) 제주 함덕 해수욕장 근처 카페 델문도에서 바라본 해변, (오른쪽) 서울 신대방역 근처 카페 탐앤탐스에서 바라본 도로
여행기 1편을 쓴 지 보름이 지나서야 자리에 앉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바빠서'다. 여행이 끝나자마자 많은 일들이 불어닥쳤다. 이직, 행사, 마라톤 대회까지 쉼을 통해 얻은 에너지가 벌써 고갈된 것만 같다. 하지만 두 번째 여행기를 쓰며 다시 한번 그때를 추억하며 힘을 내보려 한다.
▲ 미치도록 아름다운 바다, 최고의 라이딩
본격적인 자전거 일주의 시작. 숙소가 있는 제주동문시장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자전거 대여점으로 향했다. 여행 출발 일주일 전만 해도 '흐림과 비'로 일관했던 기상 예보는 금세 맑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고의 시나리오. 도착한 대여점에는 2박 3일간 나와 함께할 자전거와 형형색색의 헬멧이 준비돼 있었다. 들뜬 기분에 맞춰 흰색 헬멧을 골랐다.
전기자전거의 대여료는 2박 3일에 75,000원. 자전거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 3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뒷좌석에 등에 묶었다. 사실 처음에는 배낭을 직접 매고 갈까 생각했지만 사장님께서 자전거에 묶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알려주셨다. 역시 여행은 현지 베테랑의 말을 들어야 한다. 2박 3일 동안 녀석을 매고 갔다면 아마 어깨가 아작 났을 것이다. 꿀팁을 알려주신 것도 모자라 여분의 가방까지 제공해 주신 '상상하이킹' 사장님께 감사하다.
제주도의 해안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현무암의 짙은 고동색과 에메랄드-민트-코발트블루가 적절히 섞인 바다. 둘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자전거 일주를 하면 관광을 위해 잠시 들를때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바다를 맞이할 수 있다.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 이상 해안가를 달리다 보면, 마치 바닷속을 헤엄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 푸른 하늘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제주도 해안가는 자전거길이 굉장히 잘 조성돼 있다. 라이딩에는 최고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이 정도로 멋진 라이딩을 할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지 않을까 싶다.
제주도 집필 여행 2일차, 제주국제공항에서 성산일출봉까지 약 50km의 코스 중간에 찍은 사진들
▲ 익숙함 그래서 더 잊기 쉬운 감사함
아름다운 바다를 안고 수시간 달렸지만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했다. 약 2시간쯤 지났을까 바다에 대한 나의 감동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다리도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지도를 확인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감동의 순간은 참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순간들은 시간과 함께 익숙함이라는 배경으로 바뀌어갔다. 너무도 당연한 듯 삶에 물든 순간들,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순 없지만 그때의 감동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글쓰기도 그런 감동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함덕해수욕장 부근 카페 델문도와 전경
25km를 달려 도착한 함덕 해수욕장에는 푸른 해변 옆에 자리한 카페 델문도라는 카페가 있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사이를 뚫고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엇을 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 카페 안의 온도와 밝은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카페테라스에서 맞았던 바람만이 추억 속에 새겨졌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왼쪽으로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졌지만 반대쪽으로는 제주민들의 삶의 현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작업을 하는 농민과 이주노동자들, 잡아온 고기를 옮기는 항구의 어민들, 미역과 한치를 말리는 주민들까지.
나에게는 모든 게 낯설고 아름답기만 한 이곳 제주는, 누군가에게는 매일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몇 년 전부터 젊은 층에서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여행 프로젝트가 유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한 달 살기 프로젝트는 철저히 여행자의 입장에서 제주도를 바라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낭만적이게 느껴졌는지도.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이 우리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냥 아름답기만 한 일터는 없듯, 아무리 멋진 곳이라도 그곳이 생존의 현장이 되는 순간 낭만의 크기는 줄어든다. 또 한편으로 보면 제주가 이렇게 아름다운 관광지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제주민들이 굳건히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 질 녘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일출봉에서 일몰을 본다니 계획을 잘못 세운 듯싶었다. 하지만 뭐 어때.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자 봉우리 안 깊숙한 곳에서 많은 생명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행복했다. 앞으로도 영영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길 바랐다.
게스트하우스 측에서 저녁 파티 참여 여부를 물어왔다. 잠깐 고민은 했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 후 근처 카페로 향했다. 집필 여행인 만큼 뭐라도 써야지. 하지만 정작 몇 글자 끄적이지 못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