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추억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몸은 환경에 정말 빠르게 적응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선명한 기억들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실체가 없는 기억이 어딘가에 살아 숨 쉰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제주에 다녀온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일이 휩쓴 후 남겨진 섬처럼 정돈되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정리의 시간이 필요하다. 미친 듯 쌓이는 일들을 그냥 둘 수가 없다. 미쳐버릴 것 같다. 생각의 쓰레기통을 그만 비워내고 싶다. 염증에서 진물이 나듯 일상에서도 적잖은 고름이 나온다.
아무렴, 모든 게 편안하게만 느껴졌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산일출봉 근처 제주도 아침 바다와 섭지코지 일대. 오전 9시경 빛이 바다에 녹아든 풍경이 장관이었다.
돌이켜 보면, 제주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건 멋진 관광지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저 해안가를 달릴 때 느껴지는 해방감이었다. 해방감은 일종의 들뜬 기분인데 묘사하면 일상에서 나를 짓누르던 마음의 중력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영혼의 이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도착지에 멈춰 섰을 때 온전히 풍경을 느끼는 시간은 잠시잠깐. 조금만 지나면 카메라를 꺼내 들고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완전히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찰나를 기억하고픈 욕심에 지고 만다. 차라리 살랑이는 바람과 파도에 녹아든 햇살을 조금 더 깊이 느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제주 섭지코지에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바다였다.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속이는 건 우리 자신이다. 남들처럼만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따라 해도 내 삶이 될 순 없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런 줄 알면서도 "저 정도는 해야지. 이것도 저것도 중요하니까 다 해야지." 라는 말에 자주 흔들린다.
살다 보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든 자연의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처럼. 수백 번 부서져도 다시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내는 파도처럼. 필요한 일이라면 마치 그 일을 좋아하는 듯 웃으며 해내는 사람. 그 일을 사랑하듯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성산에서 애월로 가는 바닷길 위에서
▲여행을 기록하는 이유
지난 여행의 추억을 기록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꼭 의미가 있어야 할까. 사실 난 일종의 강박에 이끌려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기록은 항상 옳다.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 나를 짜내는 모습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기억이 선명할 때 썼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땐 그럴 수 없었다고 나에게 속삭인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의 나에게는 제주의 바다,바람, 파도 그리고별들이 새겨져있다.
카페 '조은기록'에서, 서울에서 온 다정한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애월 해변에서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게스트하우스에서 주최하는 파티에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는혼자 해변가에 앉아 치킨을 뜯었다. 깻잎 치킨.
꽤 멋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초라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집필 여행의 본질을 지켜냈으니까. 솔직히 다시 간다고 말할까 고민도 했지만 취한 얼굴로그곳에앉아있을 나를 생각하니 별로였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