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떠올려보는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래서인지그때의 장면들이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부 사라진 건 아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귓불을 스치던 바람과 바닷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맑고 높았던 제주의 하늘이 다시 들려온다. 참 기분 좋은 상상이다.
잊은 줄 알았는데 모두 마음에 남았나보다. 역시여행은 마음이 하는 일이다.
애월 해변에서 제주국제공항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지막날까지 제주의 바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아름다웠으며햇살과 바다, 바람과 온도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이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아무 고민 없이 이렇게 며칠을 달리고 또 달려본 적이 언제였는가. 그리고 언제 또 달려볼 수 있을까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한 가지 큰 깨달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때 묻지 않은 자연이라는 것이다. 난 예전에도 자연 예찬론자였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확신하게 됐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작품도 자연의 눈곱만큼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물론 인간도 그런 신을 닮아 창작 욕구를 가진 것이겠지만 결코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수 없다. 자연의 순리대로살아가는 사람들이 새삼 더 멋지게 느껴진다.
이호테우 해변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총 200km를 달렸다. 전기 자전거라 비교적 수월했다. 물론 쉬웠다고 할 순 없지만 온전한 내 힘이 아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 다음에는 좀 더 힘든 방식으로 날 것의 몸으로 바다와 만나고 싶어졌다.
오직 바다를 안고 달릴 수 있다면 그 고통은 고통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잡생각을 비우고 오직 바다만을 가슴으로 안는 시간을 한 번 계획해 봐야겠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획한 여행의 테마가 집필-라이딩이라 자연과 나의 내면에 집중하긴 했지만그래도 사람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람에게서만 느끼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이 있듯, 제주에서 만난 인연에게만 나는 향기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내 삶에 제주라는 섬나라 친구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든다. 여러모로 참으로 뜻깊은 여행이었다.
"제주야. 조만간 또 보자. 건강하게만 있어줘."
<끄적인 문장들>
#해안도로 78km
해안도로를 달렸다. 한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가 나를 반겼다. 이 길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제주의 해안이 유독 더 아름다운 이유는 짙은 고동색의 현무암과 푸른 바다가 적절히 잘 석여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주도 사람들
제주민들은 저 멋진 바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산항에서 고기를 잡아올리고, 아침부터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를 깐다. 현무암처럼 깊은 색으로 그을린 얼굴들. 모두 돌하르방 같았다. 나도 제주에 오래 살면 저렇게 익어갈까. 그들의 삶은 거칠면서도 부드러웠다. 구릿빛 피부의 제주 아낙네. 젋고 예쁜 아낙네를 떠올려본다.
#혼자라는 것
혼자라는 것.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신경써야 할 것이 많다. 사진을 찍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침묵에 잠긴다. 물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또한 어디든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다는 점도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혼자로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인생 자체가, 열심이 살아낸 삶 전체가 외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주 바람
제주도의 바람은 한결같다. 마음이 심란한 이들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따스한 엄마의 손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