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20대 때부터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난 이렇게 살고 싶다"는 해답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겐 여행 작가가 그랬다. 누군가 "현실 도피를 위한 수단이 아닐까?"라고 질문한다면 아니라고 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도 그런 삶을 꿈꾸고 있는 나를 보면 언젠가 어떤 모양이로든 그런 삶을 살고 있게 될 것만 같다.
그 삶의 퍼즐을완성해 가기 위해 올해는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잘 한다고 여행도 가본 놈이 잘 가지 않을까. 올해의 여행 컨셉은이걸로정했다.
"틈만 나면 여행."
■ 자연과 大도시가 공생하는 도시, 부산
설 연휴에 짧지만 굵은 알짜배기 여행을 떠났다. 행선지는 부산. 부산은 개인적으로 추억이 많은 곳이다. 군시절 부대에서 제일 친했던 동기의 고향이라 휴가 때마다 갔던 곳이다. 21개월 동안 딱 네 번의 휴가를 나왔는데 그중 2번을 부산에 갔으니 기억이 없을 수가 없다. 물론 그 당시에는 억압된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술과 유흥을 즐기기에 바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부산의 가장 큰 매력은 굽이친 남해안을 아우르는 해안 도시와 그 사이를 감싼 높은 산새다. 단순히 바다와 도시가 함께 있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도시와 사람 둘 다 서울보다는 토속적이지만 그렇다고 현대적인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부산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풍기는 이미지가 강력하다. 특유의 경남 사투리가 주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부산 출신들은 그랬다. 투박하지만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거칠며 정이 있지만 때론 매정하다. 그래서' 대도시와 자연, 따뜻한 정(情)과 시크함'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부산 여행을 추천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느낀 또 하나의 감성.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도착 안내음. 배경 음악으로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울린다. 전날 밤까지 정신없이 업무를 하고 온 탓이라 서울을 떠날 때도 여행을 실감하지 못했다. 시외버스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뜻밖의 소리에 "그래, 왔구나" 생각했다.
크고 작든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작은 진실이 하나 있다. 아무리 큰돈을 써서 좋은 곳을 가도 마음이 그곳(여행지)에 있지 않으면, 그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것. 그래서 여행을 갈 때는 다른 무엇보다 마음을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
■ 누가 뭐라 해도 "그곳을 향해", 부산 아재가 말했다
난 여행을 갈 때 음식과 쇼핑보다는 그 도시의 풍경과 자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체험을 선호한다. 지방 도시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액티비티 시설을 운영한다.
10년 전 단양에서는 패러 글라이딩을, 21년 여수여행에서는 해안 케이블카를, 23년 동해 무릉별 유천지에서는 알파인 코스터를 탔다. 그렇게 찾아보던 중, 부산에서도 감성 충만한 콘텐츠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해운대 블루라인파크'란 곳이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 중 부산의 바다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블루라인파크는 '해변 열차와 스카이캡슐(바다 옆을 천천히 달리는 롤러코스터)' 두 개의 열차를 운행한다. 스카이캡슐이 프리미엄 바다 관람차라면, 해변열차는 아날로그 바다 열차다. 스카이캡슐은 미포에서 청사포까지 해별열차는 미포에서 송정까지 왕복 운행한다.
스카이캡슐은 연인이나 가족, 해변열차는 친구 혹은 지인들과 타기를 추천한다. (이유는 비밀, 가 보면 알게 된다) 정거장 입구에는 연휴를 앞두고 가족들과 여행을 온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지금 자신이 여행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거 생각했다. 만약 잠깐이라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그 순간 표정은 굳어질지도 모른다.
해운대 블루라인 파크는 부산의 바다를 즐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은 부산 아재의 한 마디도 나의 삶을 북돋아주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잠시청사포 정거장에 내려 바다를 감상하고 돌아가려던 차, 아무 때나 열차를 탈 수 있는지 몰라서 건널목에서 안전 관리를 하고 있는 직원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기요. 이 왕복 티켓이 있는데 아무 때나 해변열차를 타도 상관없나요?"
"어데 가는데?"
"송정 해수욕장이요."
"네가 가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 할긴데? 타고 싶을 때 타는 기지."
기대했던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한 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이것이 부산 남자인가?" 생각하다가, 거침없는 그 말이 내 마음을 잡고 있던 무거운 족쇄를 풀어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빼곡한 빌딩 숲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족쇄를 채우고 살아가는 걸까? 어울리지 않는 일, 원하지 않는 관계, 맞지 않는 가면. 그리고 내 길이 아닌 길,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어느새 숨 쉴 틈 하나 없는 도시를 닮은 내 마음이 보였다.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가고 싶은 길, 살고 싶은 삶을 만들어 가기로.
송정 해변에서 미포 정거장으로 돌아가는 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부산 초고층 빌딩 '더베이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