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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윤가은감독 / 세계의 주인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by 혜영

호평이 자자한 영화 <세계의 주인>을 드디어 봤다. <우리들> 영화가 정말 좋았기 때문에 기대가 컸는데 역시나 윤가은 감독님이었다. 영화가 너무 다정해서 마지막장면에선 대책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아프고 아름다운 영화였다.

영화는 시작부터, 촵촵 우왁쭈왁... 쭈우왑~~~ 소리로 문을 연다. 이게 무슨...?? 무슨 소리지?? 설마...?? 했는데 주인공 주인이와 남자친구가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로맨스영화에서 보여주는, 호흡과 동선이 계산된 그런 작위적인 키스가 아니라 정말 촵촵 쭈와 아아악~~~ 소리가 적나라한 그런 날것의 키스. 주인이는 이렇게 욕망에 솔직한 발랄하고 당찬 아이임을 보여주고 시작하는 영화.

전교생 모두가 참여한 서명에 주인이 혼자만 참여하지 않아 생기는 일이 영화의 핵심사건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떻게든 밀어붙여야 하는 성격의, 같은 반 남자애가 추진하는 성범죄자 출소반대 서명에 주인이는 참여를 거부한다. 그 남자애가 서명운동 설명글에 쓴 성폭행 피해자 묘사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명운동을 추진한 남자애는 성폭행이 피해자의 인생 전부를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주인이는 동의할 수 없다. 틀린 말이니까. 남자애는 이게 뭐가 틀렸단 말이냐며 서명할 것을 강요하고, 주인이는 계속 거부하다 둘은 결국 큰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서명을 하지 않는 주인이를 보며 설마,,, 설마 주인이도 피해자인가? 했는데 역시나 맞았다. 성폭행피해자였다. 그것도 삼촌에게. 그 일은 주인이 가족을 산산이 부서뜨려놓았고 아빠라는 작자는 병을 핑계로 산속에 은둔하며 살고 있다. 주인이와 남동생까지 아이 둘을 키우며, 어린이집 원장으로 돈을 벌며 주인이 어머니는 힘겹게 살아가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모습이 나와 설마설마했더니... 역시 거의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딸이 그런 일을 겪었고, 남편은 경제적 책임도 돌봄의 책임도 회피한 채 저따위로 산다면...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많은 이들이 꼽는 세차장씬. 와... 놀라웠다. 주인이는 엄마에게 소리친다. 왜 날 내버려 뒀냐고, 왜 나에게 그런 일을 겪게 했냐고. 다른 집 아이들만 보지 말고 나 좀 봐주지!!! 왜 왜 그런 일을 오랜 시간 겪게 만들었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펑펑 우는 주인이의 울부짖음을 엄마는 옆에서 그저 가만히 들어준다. 기계식 세차장에서 차가 깨끗이 씻기듯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며 미친 듯이 소리치는 주인이의 마음이 씻겨지고 있었다. 엄마는 조용히 휴지를 건네고, 그다음엔 물을 건넨다. 내가 부모라서, 주인이 엄마의 그런 위로방식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저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자식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을까. 더 고통스럽고 더 죽고 싶지 않을까. 죄책감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 건데. 내 자식이 저런 고통을 품고 사는데 어느 부모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엄마는 담담히 최선을 다해 그 울부짖음을 듣고 휴지와 물병을 건넨다음 말한다. "한 바퀴 더 돌까?"

남동생의 편지장면도 정말 좋았다. "삼촌, 누나에게 편지 보내지 마세요. 저는 삼촌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까지 쓴 편지. 가해자 종특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비는 건지 사람 속뒤집을 목적인건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지 마음 편하자고 보내는 건데 주인이 남동생은 누나에게 온 그 편지들을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가 올 때마다 남동생은 삼촌에게 보낼 편지를 몇 번이나 쓰다 지운다. 하루하루를 사는 게 너무 버거운 엄마, 밝고 건강하지만 분명 아픔도 큰 누나 곁에서 이 작은 남자아이는 이렇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누나를 위로하며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 녀석. 분명 좋은 어른으로 자라겠구나 싶어 참 뭉클하고 좋았던 장면.

자원봉사공동체에서 제일 큰언니로 보인분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성폭행 피해자들이다. 고민시가 자기 재판을 돕는 왕언니에게 "언니는 재판 못한 한을 나 도와서 풀려고 하는 거지?" 하니 맞다고, 내가 아버지 신고 못한 한을 니 아버지 벌 받게 하는 걸로 풀 거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하... 상처가 상처를 위로한다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타인을 위로하는 게 왜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과 연결되는지를 너무 잘 보여준 장면.

영화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편지장면이다. 주인이는 익명의, 자신을 공격하는 쪽지를 3장 받는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밝혀질까? 궁금했는데 결국 마지막 편지를 통해 편지를 누가 보낸 건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젠 정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라는 대사가 마음에 남는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누가 듣든 듣지 않든 말해야 하는구나. 참 직설적이고 선명한 영화구나. 그런데 이런 메시지를 이토록 다정하게, 섬세하게, 뭉클하게 담아낼 수가 있구나... 참 좋은 영화구나.

주인이의 장래희망은 사랑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과거의 고통은 나를 짓밟아놓았지만 주인이는 회복해나가고 있고 자기 삶을 스스로 가꾸는 능력을 키우고 있다. 어쩌면 아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주인이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엄마가 있다. 조용히 누나를 위로하는 동생이 있다. 주인이의 얼굴을 오래 바라봐주는 친구가 있다. 주인이가 외친 소리에 느리지만 결국은 용기를 내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있다. 무엇보다 주인이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세계의 주인으로 용기 있게 살아가겠지. 그런 주인이의 용기가 이 영화를 통해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기를 바라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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