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뜻해지는 1인 가구 살림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항상 시험이 끝나면 청소를 했다. 시험을 망친 것 같아 기분은 좋지 않은데 컨디션을 관리한답시고 어젯밤 너무 푹 자서 생각을 비울 방법으로 청소를 택했다. 시험이 끝난 후 뿐 아니라 학기가 끝난 후, 졸업을 한 후, 그냥 마음이 힘들 때 나는 언제나 청소를 했다.
1. 청소는 언제나 물건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했다. 이제 쓸모없는 유인물, 교과서, 문제집 등등 내 방을 채우는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갖춰놓는 것이 첫 번째 청소였다. 다들 보관하는 중고등학교 교복도 졸업하자마자 버렸고 내 어릴 적을 가늠할 수 있는 물건이란 앨범 몇 개와 아빠가 끝까지 보관하고자 했던 작은 운동화 하나 뿐이다. 나는 버리고, 또 버리고, 버려왔다. 내 방 안에서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물건을 살아남지 못했다. 미니멀리스트라는 단어를 모를 때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버리기를 좋아했다.
2. 다음 단계는 최적화다. 물건을 원래 있던 자리에 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기 편리하게 배열했다. 내게 가장 필요한 물건들, 자주 쓰는 물건들의 순위는 달마다 바뀌었다. 그래서 매달 위치를 다시 정해주곤 했다. 마치 노트북 배경화면에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의 바로가기를 거는 것처럼 방도 그렇게 꾸몄다. 최근에는 늘어난 전자기기들 때문에 콘센트를 재배열했다. 핸드폰, 아이패드, 노트북, e-book 리더기 등을 손쉽게 충전하고, 이동할 때 쉽게 충전기까지 빼서 가져갈 수 있도록 다시 셋팅했다.
되돌아보면 1인 가구가 되기 전에도 나에게 꼭 맞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필요없는 것들은 버리고, 내가 자주 쓰는 물건들을 사용하기 쉽게 배열함으로서 내 몸과 방의 합을 최대화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내 방이라도 완전한 내 공간이 아니었다. 얼마뒤면 이사갈 집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집에 돈을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에 집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1인 가구다! 이 집의 세대주는 바로 나!
혼자 살면서도 끊임없이 버리고, 물건의 위치를 바꿔가며 나와 집의 합을 맞추는 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집의 총책임자 = 엄마'였다면, 지금은 '집의 총책임자 = ME?!'가 되어서 집과 나를 동일시하는 성향이 더 강해졌다. 집이 더러워지면 나도 우울해지고, 집이 깨끗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 그러니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고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을 때 청소를 하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환경들 속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내 방의 청결도이기 때문일까.
청소가 조금 더 즐거워진 것도 있다. 천연세제나 화학용품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 듯 하다. 특히 화장실 타일의 경우 청소 전과 청소 후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시작할 때는 한없이 귀찮지만 하고 나면 얻는 뿌듯함은 정말 대단하다. 또 냉장고와 세탁실, 주방도 내가 청소담당자이기 때문에 해야 할 것들이 잔뜩 늘어났지만 뿌듯함 역시 잔뜩 늘어났다.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은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가득 채워두면 요리가 즐거워진다. 천연세제로 한번씩 가스레인지를 반딱반딱하게 닦아두면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집은 애정을 갖고 보살피고 꾸밀수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 된다. 서울에서 와서 얻은 첫 자취방에는 애정을 쏟지 않았다. 2년이면 이동할 건데 괜히 짐 늘리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2년은 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집이 편안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카페를 가고, 외식을 했다.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이 많이 들었다. '그냥 이 생활비로 더 좋은 집을 구할 걸'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집도 2년 계약이고, 아마 계약이 끝나면 이동할테지만 아낌없이 애정을 쏟고 있다.
무엇보다 방을 청소하는 것은 단순히 '깨끗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더러워진 방을 치우는 것은 여러 생각들로 범벅이 된 내 마음을 정돈하는 일 같이 느껴진다. 모두가 싫어하는 집안일이지만 나는 사실 조금 좋아한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은 사실 대부분 내가 시험이 끝나고 내다 버렸던 물건들처럼 자리만 차지하는 별로 쓸모없는 생각인 경우가 많다. 그 생각들과 감정들을 몸을 움직이면서 덜어내고, 깨끗해진 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요즘 나의 큰 기쁨이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매일매일의 기쁨도 쌓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의 피로와 슬픔도 쌓인다. 이 피로와 슬픔들을 누군가는 취미로, 수집으로, 드라마로 풀어낸다. 모두 좋은 방법이지만 내겐 청소와 살림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어지러웠던 방이 내가 움직일 수록 깨끗해지는 데서 오는 시각적 만족감과 통제감, 꼭 해야하는 싫은 일들로 마음과 머리를 비워냈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1인 가구는 더더욱 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다. 혼자 살면 외로울 때도, 슬플 때도 혼자인 경우가 많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보다 아무래도 밥을 덜 챙겨먹게 된다. 그러니 방이라도 깨끗해야 한다. 방을 치우고 돌보는 것이 곧 나를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자취생활을 하며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