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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Feb 14. 2022

추억의 공간이 주는 위로

나는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이 많은 성격이다. 그래서 헤어짐이 늘 어렵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엮여있던 사람과의 이별은 물론이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이별을 앞두면 마음이 많이 쓰였다. 대학 1학년을 함께 보낸, 하지만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던 남자동기가 군대에 갈 때, 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 그 모습을 본 나의 (여자)친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니 혹시 자 좋아했나?"(대구 사투리 번역하자면, "너 혹시 쟤 좋아했어?")

당연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학교에 가면 늘 보던 얼굴인데 갑자기 못 본다고 생각하니 훅 허전하고 슬펐다. 짧아진 머리를 하고 복학생 선배들에게 군대 구호를 배우는 친구의 모습, 괜시리 안쓰럽게 느껴다. 어쨌든 그래서 마음이 북받쳤던 기억이 난다.


교사시절에도 학년이 바뀌는 3월은, 새로운 학생들에 대한 반가움보다 작년 반 아이들이 보고싶어서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늘 헤어짐 쿨하지 못한 편이어서, 어느새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때는 미리 헤어짐을 염두해두고 마음을 다치지 않고자 방어벽을 치게 되었다.


사람과의 헤어짐만큼은 아니지만, 공간의 변화에도 나는 마음을 크게 쓰는 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 예전 동네가 너무 그립다. 다행히 어린 시절에는 이사를 잘 다니지 않았다. 한 곳에 오래 살았던 덕에 그런 감성을 느끼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결혼 후 처음, 내가 삼십년 넘게 살던 대구를 떠나 창원으로 이사했다. 결혼과 이사라는 아주 큰 변화를 동시에 겪으며, 처음에는 대구에 대한 향수가 너무 컸다. 다행히 곧 3월이 되고 대구에서 대학원을 다니게 되어 그 핑계로 평일의 반은 대구에서 머물렀는데, 그렇게 걸치며 지낸 덕에 순조롭게 새로운 곳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창원에 적응하자마자 1년여만에 다시 대구로 돌아왔는데, 대구로 오니 또 창원이 너무 그리워서 남편과 거의 주말마다 창원에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이 크다.


두번째 신혼집은 대구에서 칠곡지역이었다. 남편의 직장과 내 직장이 모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훗날 아이들 학군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출 좋은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뱃속의 둘째도 아들인 것을 확인하자, 남편이 학군지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참고로 남자아이를 둔 부모가 더 경쟁적이라는 논문의 연구결과가 있다. 둘째가 딸이었어도 이사를 갔겠지만, 어쨌든 시점이 둘째도 아들임을 확인하고 바로 이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칠곡에서 산 5년동안 집값의 차이가 너무 벌어졌다. 5년 전에는 칠곡과 수성구의 아파트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세네 배가량 차이가 나는 거다. 부동산 가격의 꼭대기에서 집을 사는 기분이었지만, 우리는 투자의 목적이 아니라 학군 때문에 가는 거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학군지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값의 반 이상을 대출을 내서.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한 동네로 이사를 갔지만, 나는 아들둘을 데리고 계속 칠곡에 놀러를 다녔다. 언니가 칠곡에 살고 있기도 했고, 왠지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예전 살던 아파트 놀이터를 가고, 자주 가던 마트와 음식점을 다녔다. 심지어 주말에 남편과 넷이서도 자주 칠곡으로 놀러갔다. 언니가 왜 자꾸 이 동네에 놀러오냐고 웃었는데, 왠지 그곳에 가면 마음이 푸근했다.


오늘 내가 근무했던 칠곡의 학교에 마지막으로 가서 휴직계를 쓰고 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테다. 그 학교에 십년이 넘게 적을 두며 민폐를 끼쳤지. 너무나 익숙한 그 곳을 다녀오며, 지나는 길에 자연드림에 가서 장을 봤다. 거의 3년만에 간 곳인데, 다 기억이 났다. 어떤 제품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말 이상하게 다 기억이 났다. 거기서 두 살의, 세 살의 내 큰아들과 함께 장을 봤다. 그땐 코로나가 없던 때여서 빵 시식 코너에서 아들이 빵 시식도 많이 했는데.. 적당한 크기의 매장에서 작은 내 아들이 정말로 신나했는데.. 그때의 내 아기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눈에 선한 듯했다.


또 지나는 길에 버거킹에 들러 좋아하는 버거를 샀다. 버거킹 맞은 편은 내가 두 아이를 낳았던 산부인과가 있다. 2년을 진료를 다녔고, 두 아이를 무사히 낳았던 곳.. 그 앞에는 첫아이를 낳고 간 산후조리원이 있고, 그 옆의 식당에서는 내 남동생이 아빠가 된 순간 내가 밥을 사주러 갔던 식당이 있다. 또 그 옆에는 우리 아들 둘 성장앨범을 찍은 사진관도 있다. 그 거리를 수없이 걸었다. 큰아들과 둘이서 걷기도 했고, 둘째 임신 후 혼자 산부인과를 다니면서 걷기도 했고, 둘째를 아기띠 하고 첫째랑 남편과 함께 걷기도 했다. 그 거리를 보고 있자니, 나의 모습이 수없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차를 운전해서 칠곡을 빠져나왔다. 국도처럼 신호등 없이 잘 빠진 도로가 길게 있는데, 그 도로는 우리 아들들 재우는 도로였다. 그 도로를 서너번 돌면 어김없이 아들들은 잠들었다. 하지만 한 바퀴라도 덜 돌고 재우고 싶던,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애썼던 내가 떠오른다. 그 도로를 들어가기 전에 음식점이 많은 길이 나오는데, 둘째 입덧이 심할 때 그 거리만 가도 울렁거렸다. 첫째를 재우기 위해 그 도로로 가던 길, 그 음식점 간판들을 보며 토가 나올 것 같은 걸 억지로 우겨넣으며, 운전을 했다. 이상하게 오늘 그 길을 지나가는데 그 때의 그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공간이 주는 추억의 힘은 정말로 큰 것 같다.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 이제, 칠곡에 살던 나의 언니도 우리집 근처로 이사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도 우리집 근처로 이동했으므로, 나는 아마 당분간 칠곡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신혼을 살고, 내 아이 둘을 어렵게 임신해서 낳고 키우고 했던 그 곳..  거리거리마다, 임산부인 나, 어린 아이인 내 아들둘이 생각나는 그 곳이, 왠지 마음에 아리게, 하지만 따뜻하고 고맙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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