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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pr 06. 2022

나는 전업주부다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업주부로 이렇게 오래 지낼 줄은 몰랐다. 첫째 임신이 잘 안 되어 시험관 아기를 할 때부터니까, 전업주부로 지내는 게 올해로 8년차에 접어든다. 중간에 계속 복직을 염두했기에 그동안은 전업주부로서의 정체성도 없었고, 또 그다지 성실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곧 복직할거니까 전업주부 생활은 잠시 지나가는 시기라 생각하고 대충 했다. 그런데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휴직이 예정된 가운데, 아이들은 한참 잘 먹여야 할 7,5세인지라, 요즘의 나는 완전히 전업주부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전업주부로서의 하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 기상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는데, 아이들 쉬를 시키고 공복에 사과를 먹이고, 아침을 준비해서 먹인다. 아이들 밥 먹이는 일이 대체로 가장 힘든데, 일단 식탁에 계속 착석하게 하려면 주의를 끌어야 한다. 나는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근에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신화를 이야기해주었다. 뭔가 기가 빠지는 아이들 식사가 끝나면, 내 식사를 간단히 하고 치우고, 그 후 반찬을 잠깐 하거나 집안일(최근에는 봄을 맞아 커튼을 빨았고, 겨울옷이나 겨울신발을 세탁했다. 또 겨울가전은 들어가고 여름가전을 꺼내어 씻었다)을 잠깐 하면, 다시 점심시간이 된다. 아이들 점심을 해서 먹이고, 아침점심 모아둔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과 잠깐 놀아주고, 아이들이 어지른 집을 치우고 청소기를 민다.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다시 저녁을 준비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힘든 일인 저녁을 먹이고 나면, 남편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한다. 남편이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하고 인덕션을 닦고 싱크대 하수구까지 닦아두면 집안일이 끝난다. 아이들 책을 좀 읽어주고 함께 잠자리에 들면 나의 전업주부로서의 하루가 끝난다.  


물론 중간중간에 인터넷 서핑도 하고, 멍도 때리고, 가끔 피곤하면 나혼자 낮잠도 잔다(요즘은 둘이서 제법 논다). 아이들과 함께 간식도 챙겨먹고(때때로 함께 요리하기도 한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새로운 책들을 야금야금 꺼내 읽거나 교구나 게임을 함께 하거나 하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그리고 하루종일 집에 있지 않고 외출하는 날도 있다. 그러니 내 하루가 집안일에 치이는 날들은 분명히 아니다.


다만 매일 인덕션을 닦고 싱크대를 닦을 때면, 나는 내 이십대 때 공지영 작가님의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사실 정확한 책제목과 구절은 기억나지 않고,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남편과 나는 같은 대학을 다니며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금 남편과 나의 관심사는 천지차이다. 남편은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내일 반찬을 생각한다. 나는 어제 닦은 접시를 오늘 또 닦는다. 그리고 내일 또 닦을 것이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어제 닦은 인덕션을 오늘도 닦고 있고, 내일도 또 닦을 것이다. 어느덧 내 수첩에는 아이들의 식단 계획이 주요하게 적혀있다. 그것은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아이들이 많이 어릴 때는 아침마다 출근을 하는 남편에게 질투가 났다. 잘 때 입는 옷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고 난잡스러운 집을 나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남편이 부러웠다. 너무 부러웠다. 남편에게 1년만 바꿔서 살아보자고 했다가 자기만큼 벌 수 있으면 그렇게 하자는 자존심이 상하는 대답을 듣고, 나는 창업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깟 돈 좀 더 번다고 유세 떠는 남편이 그렇게 눈꼴시렸는데, 이제는 나보다 돈이라도 더 버니까 참는다로 생각이 바뀌긴 했다.


오늘은 유독 피곤하다. 어쩌다 내일 1박으로 여행을 예약하게 되었는데, 마음이 무겁다. 경주에 벚꽃이 예쁘대서, 남편없이 아이둘만 데리고 여행을 가려고 한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지금은 많이 아프다. 펜션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아들 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순 없는데...

괜히 남편도 원망스럽다. 왜 그렇게 바쁜 직업이라 평일에 휴가를 못 내는 것은 물론이요 토요일도 출근하는가 싶다. 마음이 무거운지라 설거지를 하면서 오늘 후식은 생략을 할까하다가 힘을 내어 참외를 깎아주었다. 그런데 첫째가 와서 참외 말고 오렌지로 달란다. 오늘은 그냥 후식을 생략하라고 말했다. 혼자서 참외 두 개를 다 먹는 남편의 뒷모습도 괜시리 밉상스럽다.



이십대 때 공지영 작가님의 저 구절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안 살 줄 알았다. 반찬은 시켜먹거나 하면 되고 설거지를 매일 나만 하겠나 싶었다. 나도 일을 하러 나갈거니까 집안일이 내 일만은 아니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그 여성이 선택한 몫이라고, 나는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매일 인덕션을 닦으며, 내일 반찬을 고민하며, 후식을 무엇을 줄지말지를 고민한다. 나는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왕비 이야기 구독자가 느리지만 꾸준히 늘고 있는데, 그 구독자분들을 생각하면 새로운 글쓰기가 민망하다. 역사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구독하시는 걸텐데, 매일 육아하고 집안일하는 이야기만 올라오니 실망스러울까봐 걱정이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냥 전업주부이다. 주 2~3회정도는 와주시던 시터이모님께서 요즘 못 오고 계시기에 더 완전히 전업주부이다. 책 읽을 시간도 없고, 책 읽고 싶은 생각도 안 드는 요즘이다.


하지만 내 생에서 이런 시기가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후내년이 되면 워킹맘을 할테고, 아이들이 더 크면 나는 다시 내 일에 더 몰입할 생각이다. 아이들이 너무 이뻐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내 삶의 한 순간이다. 지치기도 하지만 행복감도 크다. 내 인생에 이런 시기도 있었지 하는 기록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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