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내게 첫째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그저 "고마운 존재"이다. 임신이 되지 않아 고생하던 내게 결국 시험관 시술로 임신에 "성공"하게 해준 아이이고, 순한 그 아이를 키우면서는 내가 좋은 엄마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둘째를 키우며 내가 좋은 엄마였던 게 아니라 아이가 순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둘째 출산 때 수술대에 누우면서 느꼈던 공포를 첫째를 떠올리며 참았고, 떼를 쓰는 둘째에게 자기 장난감을 내어주며 내게서 둘째를 데려가준 아이였다. 가끔 저 아이가 나를 도우러 내게 와주었나 싶을만큼, 첫째는 내게 정말 고마운 존재였다.
내가 첫째를 고맙게 생각하는만큼 나 역시 첫째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둘째에게도 못하진 않았는데, 남편과 친정엄마는 내가 첫째에게 온 정성을 다 들였다고 표현한다. 첫째는 남편과 더 잘 놀고 둘째는 나의 껌딱지라 우리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진 않지만, 첫째와 나 사이는 남편과 둘째가 끼어들 수 없는 끈끈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내향적인 성격의 첫째는 외출을 싫어하고 집에서 혼자서 무언가를 조립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걸 좋아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첫째는 그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충분히 했다. 그러다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 매일 초등학교에 가야하니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내가 충분히 설명해줬고 순한 아이라 학교를 다녀야 하는 걸 받아들이고 잘 다니고 있지만, 아이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심했나보다. 말로는 학교가 재미있었다고 하는데, 입학 후 아이의 짜증이 심해졌다. 아이는 별 것도 아닌 일에 내게 반항적인 눈빛을 쏘아대며 퉁명스럽거나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고, 동생에게 많은 걸 양보했던 아이가 이젠 동생이 자기 물건을 만지면 소리를 지르며 끝내 양보를 하지 않았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이 낯설어 힘든만큼, 나는 아이가 낯설어 힘들었다. 사실 너무 서운했다. 어떻게 내게 그런 눈빛과 말투를 하지? 내가 그동안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힘들어하는 게 안쓰럽기보다는 반항적인 아이의 모습에 서운한 내 마음이 먼저였다.
내가 뭔가 잘못 키워서 아이가 저렇게 되었나? 나는 자책하며 육아서를 하루에 한 권씩 읽기도 했고, <금쪽같은 내새끼> 프로그램도 찾아서 봤다.
여러 육아서와 오은영박사님 말씀을 종합해보면, 그래 부정할 수 없이 나의 잘못이 크다. 내가 무지했고 부족했던 탓이다. 아이를 더 잘 이끌고 더 잘 보듬었어야 하는데, 엄마인 내가 부족했다. 남자아이에게 지나치게 청결관념을 심어주어 아이가 외부활동에 강박을 느끼게 했고, 원래도 소심한 아이에게 너무 통제적으로 양육하여 아이의 도전정신을 막았다. 나이별로 해야할 과제를 무시하고 미루며 아이를 온실 속에서 크게 한 면도 있다. 아이를 친구처럼 대하려한 것이 정말로 친구정도의 마음가짐밖에 안 되어 아이를 크게 감싸주지 못한 것도 같다.
아 결국은 엄마인 내 잘못인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너무 억울한 것도 같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잘 몰랐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지 어떻게 해야되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잘못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잘한 것도 있지 않은가. 내게 비난을 퍼붓는 듯한 육아서와 오은영박사님께 나도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자책과 억울함의 복잡한 마음일 때, 봄꽃을 봤다.
지난 봄에 피었다가 올 봄에 다시 피어주며 기쁨을 주는 봄꽃.
나는 그 꽃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그 꽃은 작년에도 올해도, 또 내년에도 피어 나를 기쁘게 해줄 것이다. 내가 그 꽃을 만지고 향기를 맡도록 허락해줄 것이다. 나는 그 꽃이 피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
그래서 우리 엄마들이 그렇게 꽃을 보고 미소를 지으셨나보다. 자식은 그렇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엄마탓이다. 자식도 엄마탓이고, 사회도 엄마탓이고, 엄마 자신도 엄마탓이다. 자식이 잘 된 건 자식이 잘나서이고, 자식이 잘못 된 건 엄마탓이다. 꽃은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아도 이렇게 이쁘게 잘만 피어나는데, 자식에겐 온 정성을 다 들여도 잘 안 된다.
이제 고작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니, 선배엄마들이 코웃음을 보낼 것 같다. 고작 반항적인 눈빛과 짜증스런 말투로도 이만큼 서운한데 앞으로 겪을 사춘기이며 갈등들을 생각하면 앞길이 막막하다. 미취학 시절이 아이가 효도하는 마지막 시기라더니.. 나는 이제 좋은 시간 끝이고 힘든 시간만 남은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역할을 놓지 않고 책임을 지려는 우리 엄마들..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다. 더이상 스스로나 남에게 비난받지 말고 응원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엄마. 마흔이 넘은 딸에게 여전히 엄마탓을 듣고 엄마덕을 보려는 딸 때문에, 우리 엄마가 참 고달팠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살면서 힘든 순간마다 엄마에게 짜증을 냈었다. 엄마 때문에 짜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엄마탓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은 내 아이가 너무 예뻐서 몰랐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많이 힘들다는 것을. 내가 엄마에게 기쁨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많은 슬픔과 좌절이기도 했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딸인 나에게 불만을 쏟아내지 않으시고 나를 이만큼 키워내신 우리 엄마가 새삼 존경스럽다.
이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참 훌륭하다. 올봄에도 예쁜 꽃들이 활짝들 피어서 우리 엄마들을 기쁘게 해주겠지? 그 봄꽃에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미소를 지을테니, 그 봄꽃들이 진정 효자고 효녀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