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화가로 기록되었던 신씨

by SOL

신사임당(申師妊堂, 1504∼1551)은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그 기록이 남아있다.


소세양(蘇世讓,1486~1562),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정유길(鄭惟吉,1515~1588), 이문건(李文楗,1494~1567), 어숙권(魚叔權, 16세기 전중기), 그리고 아들 이이(李珥, 1536~1584)의 기록이 그것이다. 비록 그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조선시대를 살았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동시대를 살았던 사대부들의 글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16세기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관료 학자 소세양은 신사임당 생전에 그녀의 산수화를 보고 두 차례에 걸쳐 시문을 지었다.

소세양은 사임당 그림에 대한 깊은 감탄을 보냈는데, 그의 감상시의 내용 중 ‘몇 자(尺)의 비단(純)’이라는 단어에서 신사임당의 산수화가 적어도 1미터가 넘는 크기였고, 그 바탕이 고운 고급 비단임을 알 수 있다.

즉 신사임당의 그림은 상당한 규모에 높은 품격을 가진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사룡 역시 사임당 산수화에 대한 감상시를 남겼다.

정사룡 문집의 제화시들을 살펴보면, 이전 세대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 생몰미상)의 산수화, 문인화가 신잠(申潛, 1491~1554)의 묵죽(墨竹), 이불해(李不害, 1529~미상)가 그린 초상화의 경우에만 화가의 이름을 시 제목에 명시하였다.

정사룡이 「題申氏山水圖」라고 화가 신씨의 이름을 제목에 밝힌 것은, 그의 신씨에 대한 칭송과 예우가 당시 국내 일류급 화가들과 동등했음을 알려준다.


정유길은 신씨의 포도 그림에 대한 발문에서 “신이함이 엉겨 조화로움이 묘하니, 붓질로 빼앗아 참된 생기가 발하네.” 라고 하여 사임당의 싱싱한 포도 그림에 대해 찬사를 남겼다.



즉 16세기 문헌 기록을 보면, 신사임당은 생존 당시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었고, 화명이 거론된 이례적 존재였다.


신씨의 그림에 대한 발문을 남겼던 소세양, 정사룡, 정유길은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던 관료 문인들이었다. 즉 신씨의 그림 솜씨는 당대의 고위관료층의 안목에 들었고, 신씨가 가장 잘 그렸던 그림은 산수화와 포도 그림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사임당 그림의 감상 시가 아닌 그녀를 언급하고 있는 문헌 기록으로는 이문건과 어숙권, 그리고 아들 율곡의 기록이 있다.


이문건의 1557년 1월 1일 일기에 이원수를 처음 만난 일을 쓰면서 신사임당도 언급되어 있다.

이문건은 이원수를 ‘산수화를 잘 그린 신씨’의 남편으로 기록했는데,

양반 사회에서 서로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기록하면서 ‘누구의 남편’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은 ‘아무개의 아들이나 아버지’ 또는 ‘아무개의 몇 세 후손’ 등 가계를 헤아리고 기억하는데 이문건은 이원수를 ‘신씨의 남편’으로 적어두었다.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이 포도와 산수를 매우 잘 그려서 안견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조선시대 산수화에 뛰어난 세 명 중 한 사람으로 신씨를 들고 있다.

어숙권은 서얼 출신이지만 학문이 출중했던 사람으로, 이 책에서 신사임당을 뛰어난 예술가로 두 번이나 언급했음은 의미가 크다.


마지막으로 아들 율곡의 「선비행장」에서도 어머니 신사임당이 안견의 화풍을 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그 그림들을 모사해 병풍이나 족자로 만들어 세상에 많이 전해진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신사임당이 당대 유명한 화가로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음을 말해준다.


즉 신사임당은 꽤 규모 있는 그림을 제작하였으며, 이에 따른 모종의 경제적 보상도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화가로서 신사임당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당대 사대부들에게 공통된 증언이었다.




비록 남아있는 작품이 없다 해도 당대에 신사임당을 예술가로 평가한 사람들, 특히 그 사람들은 모두 명망 있는 사대부였다는 점에서 그녀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사임당 생전에는 율곡의 명성이 없던 때이므로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평가받은 셈이다.


한편, 현재 신사임당을 구성하는 가장 큰 이미지인 현모와 관련된 당대의 기록은 찾기가 힘들다.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에 관련된 다른 자료는 없으며, 아들 율곡이 남긴「선비행장」에서 자녀교육과 관련된 간단한 언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7백여 자로 구성된「선비행장」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내용은 “子女有過則戒之” 단 일곱 글자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기리며 쓴 글에서도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에 관한 특별한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7백자 중 일곱글자라 함은 비중으로 치면 1프로에 해당한다.

「선비행장」의 대부분의 내용, 즉 99프로의 내용은 신사임당의 재능과 성품에 관한 설명이었다.

아들 율곡의 시선에서 어머니 신사임당은 자녀 교육에 특별했던 인물이기보다는 ‘재능 있는 화가’이자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즉 신사임당 생존 당시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신사임당은 산수화와 포도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성씨로 부르는 방식대로 ‘신씨’라고 불리면서 산수화를 잘 그리고 글씨를 잘 쓴다는 평가를 받았다.


살아생전 신사임당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산수와 포도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로 인식되었고, 어머니로서의 모습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기록에서 현재 신사임당 그림으로 유명한 ‘초충도’에 대한 언급 역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신사임당이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현모양처와 초충화가로 남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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