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생존당시 명망있던 사대부들에 의해 산수화와 포도 그림의 화가로 기록되었던 신씨가
현대의 우리들에게 현모양처와 초충화가로 기억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500여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 시간동안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1551년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공식적인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584년 율곡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 김장생이 스승의 행적을 정리하며 쓴 <율곡행장>에서이다.
김장생은 스승의 어머니였던 신사임당에 대해 "천품이 뛰어나고 옛 여자의 법도를 잘 아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살아생전 화가였던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신사임당은 화가가 아닌 율곡의 어머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신사임당은 그저 율곡의 어머니로 기록만 되었을 뿐,
극적인 미화나 신성화된 스토리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신사임당이 현모와 초충화가로 재탄생하는 데에는 단연 송시열의 역할이 컸다.
17세기 중반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노론 세력은 율곡을 문묘에 배향하는 등 그를 현창하는 일에 전념했다. 이는 당시 첨예했던 당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던 의도였다.
자기 학파의 학문적 연원을 높이고 정치적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성현 율곡을 낳은 신사임당의 재능을 이용한 것이다.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사람의 힘으로는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하다고 칭송했지만,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그녀가 "대단한 아들을 낳을만했다"는 결론으로 항상 이어졌다.
송시열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서인노론학파들에 의해 꾸준히 계승 발전되어, 18세기에 이르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그저 율곡이 존재하는 것을 도운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신사임당의 부덕으로 율곡이 탄생했고, 그녀의 그림첩은 그저 위대한 율곡을 돕는 역할 정도로 기록되는 것이다.
그렇게 16세기 "화가 신씨"였던 신사임당은 17세기 "신부인"이라는 호칭을 거쳐 18세기에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 그 호칭이 변화해갔다.
살아생전 산수화와 포도 그림에 대한 기록만 있었을 뿐,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현재 5만 원권이나 교과서에서 신사임당은 초충화가로 소개된다.
17세기 초반 문헌까지는 16세기의 기록을 바탕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묵죽, 산수 난, 초충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었다.
16세기 소세양이 칭송한 신씨의 산수화는 율곡의 종증손인 이동명이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 그림을 본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산수화가 못마땅했다.
송시열의 세계관에서 스승의 어머니의 그림이 여성의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전문적인 수준이었으며,
스님이 등장하며, 남성(소세양)이 여성 그림에 발문까지 쓴 것이다. 남녀의 분별이 엄격한데 여성의 그림에 남성의 시가 쓰여진 것을 송시열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의 내용 또한 남녀유별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이 전문적인 그림에 대해 전업 화가의 그림이지 부녀자의 그림일 리가 없다고 단정하며, 신사임당 산수화를 위작으로 평가했다.
그렇게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송시열의 입김 아래 가라앉게 되었다.
대신 송시열은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자그마한 초충도에 주목하게 된다.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초충도를 칭송한 이후,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초충도가 대거 등장하게 된다.
송시열의 제자 송상기는 어려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며 신사임당의 풀벌레 그림을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이야기도 남겼다.
송상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살아생전 한 번도 언급된 적 없었던 신사임당의 초충도 솜씨가 구전으로 전해져, 신사임당이 별세한 지 16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송상기에 의해 처음 기록이 된 것이다.
살아생전 당대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에 의해 산수화에 능한 화가로 칭송받으며,
규모 있는 작품을 제작하며 당시 병풍이나 족자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얻었던 그녀의 커다란 산수화 대신,
그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자그마한 초충도를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신사임당은 산수화나 포도그림의 화가가 아닌, 초충도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