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이미지 변화2-근대시기

by SOL

1900년대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시대의 자녀 "교육"은 주로 집안의 남성 어른에 의해 이루어졌고, 여성들은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양육"에 보다 많은 역할이 주어졌다.


하지만 근대 시기에 부국강병을 달성할 일원(아들)을 길러내는 역할이 어머니에게 주어지며,

즉 여성에게 자녀 교육에 대한 임무가 새로이 부과되면서, "자녀 교육을 잘할 어미니"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성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양반사회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던 상황에서, 양반가의 딸들을 교육을 목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때 조선시대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인물"로 신사임당이 소개된다.

경서를 읽었고 시서화에 능했던, 즉 교육받은 여성이었기에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었던, 신사임당은 당시 교육받은 여성, "신여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소개되던 신사임당은, 얼마 뒤 현모양처로 급 변신을 하게 된다.




조선후기에서 근대시기 초반까지 주로 "현모"로 존재했던 신사임당이, 1930년대 이후 "양처"의 모습으로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18세기 서인노론학파들이 봤을 때도 현모로서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지 몰라도 양처로서의 모습은 찾기가 어려웠고, 심지어 조선시대 양처의 의미는 양인과 결혼한 양반여성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현명한 아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신사임당이 "양처"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이후 여성교육이 강조되며 등장한 신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진다.

나혜석 등의 교육받은 신여성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신여성과 반대점에 있는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신사임당을 소개하고 칭송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1900년대 교육받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소개되던 신사임당이

1930년대 들어 신여성과 대척점에 있는 현모양처로 둔갑한 것이다.





1940년대 이후 일제강점 말기에 이르러서 신사임당은 군국의 어머니, 총후부인의 모습으로까지 형상화된다.


1945년 매회 2500명의 관객이 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연극 <신사임당>에서 신사임당은 인내와 희생으로 가정을 지키는 군국의 어머니, 총후부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었다.



1900년대~1920년대에는 재능과 예술이 부각되며 신여성의 상징이 되었던 신사임당은

1930년대 현모, 양처로 형상화되다가,

일제강점말기에는 재능이나 예술과는 전혀 관련없이 인내와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즉 신사임당의 실제와는 상관없이 위정자들의 필요에 의해 그 이미지가 마구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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