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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강씨

by SOL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 일등공신으로, 조선 최초의 왕비로 등극한 신덕왕후 강씨.

이성계의 첫째 부인 한씨가 개국 1년 전에 죽었으므로,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비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은 태조 이성계의 차비 신덕왕후 강씨이다.


하지만 신덕왕후는 조선의 왕비 26명 중 유일하게 탄생 연도가 전해지지 않으며, 무덤도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은 왕비이다.


분명 태조 이성계와 함께 왕비로 등극하였고, 그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태조 이성계는 그녀가 죽자, 그녀를 위한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덤이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고, 300여 년간 종묘에도 모셔지지 않았다.


조선 최초의 왕비이자, 역대 조선 왕비들 가운데 남편에게서 가장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신덕왕후 강씨는 살아서는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죽어서는 그 모든 것이 철저히 부정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몰락한 권문세족가의 막내딸>


신덕왕후 강씨는 고려말 유명한 권문세족가의 막내딸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나 삼촌은 당시 충으로 시작되는 왕들의 최측근으로, 강씨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 집안이었다.


고려 말 원에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충-왕으로 이름지어졌는데, 그 중 충혜왕은 건달 같다고 할 정도로 정사는 돌보지 않고 놀러만 다니고, 그런 건달짓을 잘해서 반란도 직접 진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충혜왕의 가장 가까운 폐행(아첨하여 총애받는 사람)이 신덕왕후 강씨의 할아버지 강서였는데, 강서는 충혜왕이 반란을 진압할 때 직접 같이 싸워서 일등공신이 되고, 그후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훗날 강씨의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강윤충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충혜왕 이후 충목왕 충정왕 대까지도 삼촌은 그 왕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강씨 집안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상상이 갈만하다.


하지만 권력은 늘 그렇듯 영원하지는 못한다. 공민왕이 등장한다.

그동안은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왕이었는데, 공민왕은 이름부터 반원임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부원 세력을 척결하는 일에 매진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부원 집안인 강씨 집안은 당연히 그 표적이 되었다. 삼촌 강윤충은 사형당하고, 다행히 강씨의 아버지(강윤성)는 과거 출신에 스스로 선비임을 자처하며 그동안 크게 나서지 않았던 덕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어쨌든 집안은 폭삭 망하고 만다. (하지만 몇년 후 또다른 대거 숙청 과정에서 아버지도 사형당한다.) 이렇게 집안이 몰락한 것이 강씨가 태어나기 1년 전쯤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강씨의 할아버지를 비롯, 삼촌이 왕의 비행을 함께하는 "폐행"이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건달같았을까?

아니다. 어쨌든 한 나라의 왕, 최고 권력층의 베프가 되려면, 그들 나름대로 잘난 면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는 동성애도 유행했던터라, 우선 아주 미남들이었다. 함께 시도 짓고 음악도 타고 놀려면, 그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 즉 나름의 학문적 문화적 예술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반란을 진압할 정도로 활도 잘 쏘고 말도 잘타고 호방한 기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집안 출신인 강씨 역시 미인으로 알려져있고, 비록 몰락 후 태어나긴 했지만, 오랫동안 귀족집안이었던 덕분에 나름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며 성장했을 것이다.


강씨 집안의 미모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면, 앞서 이야기했던 충혜왕부터 3대 왕의 베프였던 강씨의 삼촌(강윤충)은 하도 미남이어서 여자들이 그와 합방하고 싶어 안날났던 일화들이 여럿 전해진다. 충혜왕의 왕비조차 그에게 매혹되어 충혜왕이 죽은 후로 그 둘은 공공연한 부적절한 관계였고, 왕비는 그를 끝까지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 덕분에 오랜시간 대비였던 그녀와 더불어 강윤충은 엄청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강씨의 언니 또한 매우 미인이었다고 한다. 강씨의 언니는 당시 엄청난 권력가인 신귀와 결혼했는데, 역시 공민왕의 숙청으로 신귀는 귀양가게 된다. 그때 남편이 부재한, 너무나 미인인 강씨에게 온갖 권력층 남성들이 대쉬를 해대어서 스캔들이 떠들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강씨를 낙향시키는 것으로 무마하였다고 한다.


그때 5세정도였던 신덕왕후 강씨는 어머니와 그 미인 언니와 함께 곡성으로 낙향하였다.



<신진 무장세력 이성계와의 혼인>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을 물을 떠 주기를 청했다. 이에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버들잎 한 줌을 물에 띄워 주었다. 고약한 행동을 한 이성계는 여인을 나무라며 화를 냈다. 그러자 여인은 대답했다.

“제가 뵈옵기에 갈증으로 급히 달려오신바, 냉수를 급히 드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드시라고 일부러 그리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도취되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혼인을 하는데 그 여인이 바로 강씨였다.

이는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첫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둘의 첫 만남이 꽤 낭만적이지만 실제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둘의 결혼은 서로의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었다.


당시 십대 후반의 강씨는 나이차이가 20년쯤 나는 늙은 유부남인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으로 혼인을 하게 된다.

더구나 당시 이성계에게는 한씨라는 부인이 살아있었다. 훗날 신의왕후 한씨가 되고, 2대왕인 정종과 3대왕인이방원을 비롯한 6남2녀를 낳은 첫번째 부인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는 멀리 떨어진 함흥 지역의 유력가였다. 함흥 지역에 기반을 둔 신흥무장세력인데, 당시 연이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 권위가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경의 중심 귀족은 아니었던 탓에, 중앙정계로 진출하기에 무언가 기반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비록 지금은 몰락하였지만 왕년의 세도가로서 저력이 있는 강씨 집안과의 혼인을 통해 개경의 귀족 세력에 편입되고자 했다.


앞서 말했듯 강씨는 몰락한 권문세족가의 딸이다.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20년이나 차이나는 남자의 후처로 혼인하지 않았겠지만, 몰락한 집안이었으므로 당시 급부상하는 이성계와의 결혼은 재기를 노리는 그녀의 집안에 분명 이득이 되는 결혼이었다.


강씨는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데, 첩은 아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정식 부인을 여럿 둘 수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가 유명해지기 전에 결혼하여 고향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운 첫번째 부인 한씨는 향처라고 불렀고, 이성계가 유명해지면서 개경세력과 연결되고자 결혼한 두번째 부인 강씨는 개경에 있는 부인이라 하여 경처라고 불렀다.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강씨와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첩이 아닌 후처인, 강씨를 어머니로 깎듯이 모셨다. (이방원과는 열살정도 차이가 났다)


그렇게 이성계와 강씨는 나름의 이득을 위해 혼인을 하게 되었지만 훗날 두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당시 이성계는 건장한 삼십대의 남성으로, 위험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당대 최고의 신흥 세력이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가 48세였을 때, 그의 활 솜씨를 처음 본 한충과 김인찬이 “도령의 활 솜씨가 대단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낯빛이 도령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성계는 동안에 미남이었다. 또한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답게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 또한 부하들을 살뜰히 챙기는 자상하면서도 호탕한 성격에 정치판에서는 순수하기도 한, 그야말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강씨 역시 집안 내력 상 미인이었을 것이고, 강씨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오빠들은 고려시대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이었다. 오랜시간 개경의 고급 문화를 주도했던 집안에서 태어난 강씨 역시 문화적, 예술적 소양을 갖추었을 것이다. 강씨는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지만 서로에게 깊이 끌렸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부부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평생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된다.



<곡성에서 개경으로>


이성계와 강씨가 혼인 후 바로 개경에서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다. 강씨는 어린시절에 살던 곡성에서 그대로 살았고, 이성계는 여전히 전쟁터를 누비며 다니느라 집에는 잠깐씩 다녀가는 수준이었다. 또 향처인 한씨네 집에도 가야했으니 강씨는 결혼한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강씨는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은 경처인데 개경에 살지도 않았고, 남편 이성계가 전쟁터에서 쌓아올린 명성은, 언제든 전쟁에서 죽으면 바로 무너져버리는, 불안한 명성이었다.


그래서 어서 개경에 뿌리 내리고 정착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개경입성을 원했던 강씨는 첫 딸이 5세쯤 드디어 개경으로 입성한다. 강씨 자신이 5세였을 즈음 집안이 몰락하여 떠밀리다시피 나온 개경에, 이제 5세 즈음인 딸을 데리고 이성계의 부인이 되어 당당하게 입성한 것이다.


그리고 강씨는 개경입성과 함께 더 큰 야망도 품어본다. 처음부터 조선개국의 꿈을 꾼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 개경에서 강력한 세력은 되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그 방법으로 그녀의 집안이 그랬듯, 자식들의 혼인을 이용한다.

남편이 전쟁터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장수이고, 그 죽음과 함께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몰락할 것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가문을 단단히 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강씨가 이성계와 개경에서 생활하게 되자, 고향에서 한씨에게 양육되고 있었던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이 개경으로 유학오게 된다.
이성계의 넷째, 다섯째 아들인 방간과 방원이 개경에 와서 강씨에게 양육되었다.

강씨는 정성을 다해 향처의 아들을 양육하였고, 두 아들도 강씨를 어머니로 극진히 모셨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여전히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야 했기에, 방간 방원의 교육과 혼사 모두 강씨의 몫이었다.

그 중 방원은 특히 성실했고, 또 똑똑했다.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강씨는 "어찌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하는 탄식을 할 정도로 방원은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훗날 이성계의 아들 중 방원만이 과거에 합격했는데, 문과적 기질이 없었고 그에 대해 약간의 컴플렉스가 있었던 이성계는 아들 방원의 과거 합격을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다시 혼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강씨는 자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방간과 방원의 혼사 자리도 성심으로 알아본다.

그건 집안의 번영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비록 예전의 명성만 못하더라도 오빠와 언니들, 다른 친척들이 다른 귀족 세력들과 거미줄처럼 얽혀있었기에 좋은 집안과의 혼사를 부탁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방간과 방원 모두 개경의 명문 거족인 여흥 민씨가문과 혼사를 맺게 되었는데, 그것은 온전히 강씨의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자신의 딸은 명실상부 개경 최고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이인임 가문의 남자와 혼인시켰고, 자신의 큰아들은 무려 고려 왕의 딸과 혼인시켰다. (하지만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훗날 강씨의 큰아들 방번이 조선의 세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고려 왕실의 사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강씨는 남편 이성계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명성을 드높이는 동안, 그녀는 개경에서 남편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노력했고, 향처의 아이들까지 돌보며 최선을 다해 내조하였다.



<남편을 왕으로>


이성계는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하였고, 그에 따라 개경에서의 그의 명성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갔다.


이때 이성계는 정도전과도 어울렸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충의 개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성계는 왕명은 모두 받들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왕이 왕 노릇을 못해 백성들이 고통스럽다면 그 왕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우왕과 최영 장군은 명과의 전쟁을 택하며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명한다. 이성계는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고려와 백성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니, 그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의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면 이성계의 가족은 위험에 처해진다. 회군의 사실을 미리 전해들은 이방원은 친모인 한씨뿐 아니라 계모인 강씨까지 모시고, 아버지 이성계가 있는 동북면으로 피신한다.

그때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했는데, 이때 이방원은 한씨와 강씨, 그리고 강씨 소생의 이복동생들까지도 친히 말에 태우고 잠자리를 봐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는 등 자상하게 모셨다.

이방원의 지극한 배려들 덕분에 그들은 무사히 동북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고생을 시작으로 조선 개국에 이르기까지, 강씨의 삶은 더욱 스펙터클하게 진행되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조정을 장악한다. 그는 왕을 바꾸었고, 최고 실세가 되었다. 왕이 따로 있었지만, 왕을 능가하는 최고 권력은 이성계에게 있었다. 하지만 최고 실세가 되면서, 그에 따라 반대 세력 또한 많아진다.


전쟁터에는 적을 죽이면 그만이지만 정치판에서는 누가 적인지 분간조차 어렵다. 이성계는 그런 정치판에 염증을 느꼈고 수많은 모함에 지칠 대로 지쳤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는 개경의 정치판이 익숙치 않았고, 자주 힘들어했다. 전쟁터를 누빌 때보다 잔병치레가 심해졌다는 것에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공양왕 3년, 이성계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 하지만 그때 그런 이성계를 만류한 사람이 바로 강씨이다.


정치에 순진한 면이 있었던 이성계의 가장 곁에서, 그의 손발 눈귀가 되어주었던 사람이 강씨였다. 이성계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는 강씨를 통해서였고, 때론 강씨가 이성계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을 통제할 정도였는데, 심지어 이성계의 친아들조차도 강씨의 허락하에 만날 수 있었다. 강씨는 자신의 친아들 두명과 이방원만이 이성계가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씨는 본격적으로 남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행해갔다.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살해할 것을 명한 사람도 강씨이다. 이성계는 온갖 위험한 전쟁터를 누비는 뛰어는 무관이었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강씨는 이성계가 정에 이끌려 대사를 그르칠까 경계하면서 방원을 시켜 정몽주를 제거하도록 한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전하자,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도 이방원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심하게 꾸짖자, 이방원은 강씨에게 말한다. "왜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 일은 강씨 시켜서 이방원이 실행한 일이었다.

정몽주의 사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매우 비통해하며 이방원을 나무랐지만, 이를 시킨 장본인이 강씨인 것을 알고 노여움을 거두었다고 한다.


호방한 성격의 이성계는 정의로웠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것을 마음아파했고, 진심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가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열어간다는 것에도 의구심을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강씨와 이방원은 달랐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성계의 개국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아니 조선개국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 여겼기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때에도 강씨의 역할이 컸다. 이성계는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망설였고 실제로 여러 차례 거절했다.


이성계는 문을 닫고 사람들을 들이지 않았다. 해질 무렵, 배극렴 등은 문을 밀치고 곧바로 대청으로 들어와 옥새를 올려놓았다. 이성계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이천우에게 의지하여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대소신료들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렸다. 배극렵 등이 이성계에게 이구동성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하였다.(중략)

대소신료, 한량, 기로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마침내 17일이 되자 이성계는 마지못해 수창궁으로 거동하였다. 백관들이 궐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에 들어가 즉위하였는데 옥좌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태조실록> 권1, 1년 7월 병신조

위의 기록에서 보듯, 이성계는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그를 설득시켜 왕에 오르도록 한 사람이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남편의 마음을 북돋우며 마침내 그녀의 남편이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이성계는 조선의 제1대 왕이 되었고, 강씨는 조선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할 때에 이미 첫 번째 부인 한씨는 죽은 후였으므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첫 번째 왕비 자리에 앉은 이는 강씨였다.


<최고의 협력자에서 최고의 위협자로 바뀐 아들>


이제 신덕왕후에게는 화려한 왕비생활만 남은 듯 하다. 신덕왕후가 야망을 딱 거기까지만 가졌더라면 말이다.


신덕왕후는 조선개국에 자신이 일등공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왕비가 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자신의 공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아들까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성계가 새로운 왕이 된 데에는 분명 강씨의 공이 컸다. 하지만 강씨 이상의 공을 세운 이가 있으니, 바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다.


강씨와 이방원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최고의 파트너였다. 주로 활동은 이방원이 하고, 이성계를 설득하거나 북돋우는 것은 강씨의 몫이었다. 그렇게 둘은 최고의 협력 관계였다. 조선개국이라는 목표에서 강씨와 이방원은 아주 긴밀한 사이였지만 그 목표가 달성되자, 둘의 관계는 정반대가 되었다. 최고의 협력자에서 최대의 정적이 된 것이다.


강씨는 남편이 왕이 된 것에 자신의 공이 크다고 여겼고 그 보상으로 세자 자리를 자신의 소생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방원은 아버지가 왕이 되는 데 있어 아들 중 자신만큼 큰 공을 세운 이는 없다고 자부했다. 조선개국과정에서 목숨을 잃을뻔했던 이성계를 이방원이 구해냈을 때, 이성계는 고마운 마음에 "내 뒷자리는 니꺼다" 라는 암시의 말도 했다. 당연히 세자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자 자리를 두고 강씨와 이방원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최초의 승리는 강씨의 것이었다. 이성계는 누구보다 강씨를 신뢰했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강씨가 원하는 대로 강씨 소생의 왕자에게 왕좌를 물려주려고 했다.


새로운 나라인 조선의 기강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개국 초부터 세자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성계는 조준, 배극렴, 김사형, 정도전, 남은 등을 불러 의논하였다.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조선 건국에 공이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아들 방번을 세자로 세우고자 했다.

이에 배극렴이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의 통의입니다.”하였다. 태조가 불쾌해하면서 조준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조준이 대답하기를 “평상시에는 적장자가 먼저이고, 비상시에는 공이 있는 사람이 먼저입니다. 원컨대 세 번 생각하소서.”하였다.


이에 옆에서 엿듣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는 통곡으로 항의하였다. 이에 태조는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조준에게 주며 “방번”의 이름을 쓰라 하였다.


이렇게 이성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덕왕후 소생의 큰아들 방번에게 세자 자리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방번은 공양왕의 동생의 사위였다. 그런 이유로 신하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타협안으로 강씨의 둘째 아들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렇게 이성계는 적장자인 방우도 아닌, 개국에 공이 가장 컸던 방원도 아닌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강씨 소생의 둘째아들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물론 조선개국의 주인공은 이성계와 신덕왕후였다. 하지만 이방원의 공도 인정해주었어야 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천하의 이방원을 처참하게 무시한 것은 신덕왕후의 오판이었다.

그렇게 부부는 도리에 맞지 않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불행의 씨이 되었다.


어쨌든 신덕왕후 강씨는 그간의 모든 고생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왕이 된 남편, 한 나라의 국모, 남편의 지극한 사랑. 더 나아가 그녀의 아들은 훗날 왕이 될 터였다.


반면 이방원은 그런 강씨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몸을 아끼지 않고 조선 개국을 위해 힘썼다. 개국 공신으로 치자면 그 누구 못지않는 높은 품계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개국 공신 품계에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세자 자리까지 어린 이복동생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덕왕후의 권세 앞에서 천하의 이방원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강씨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방원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더욱 철저히 짓밟았다. 강씨는 이방원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씨까지 제거하고자 아예 정치를 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었다.


그녀는 이방원의 모든 힘을 빼앗고자 했다. 사병혁파를 통해 이방원이 가진 군사력을 모두 빼앗고, 정도전과 손을 잡고 다시는 이방원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버렸다. 무력해진 이방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씨는 훗날까지 모두 대비해 두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 마흔 살의 창창한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던 신덕왕후 강씨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편을 왕으로 추대하고,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등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던 신덕왕후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였다.

<살아생전 누렸던 축복, 죽어서는 모든 것을 잃다.>


신덕왕후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난 뒤, 이성계는 매우 비통해하며 정사도 뒤로 한 채 직접 좋은 묘소를 찾아다녔다. 좋은 자리에 묘까지 만들고도 이성계는 강씨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강씨의 묘인 정릉에 머물며 매일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했다.

이성계는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수라를 들었고, 저녁에도 상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만큼 이성계는 죽은 강씨를 쉽게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강씨의 죽음이 이성계에게는 크나큰 상실과 고통이었지만, 이방원에게는 또다른 기회였다. 강씨 없는 방번은 그저 십대의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성계가 슬픔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는 동안 이방원은 그 유명한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방원은 자신의 목숨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정도전을 시작으로. 세자 방석과 강씨의 큰 아들 방번, 그리고 강씨의 하나뿐인 사위를 하루밤새 모두 죽여 버린다. 그것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보장되리라 믿었던 강씨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2년 만에 어머니를 따라가게 된다.


이를 본 태조 이성계는 비통함에 왕위를 아들(정종)에게 물려주고, 죽은 강씨의 무덤 곁에 머물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데 모든 시간을 썼다.


신덕왕후 강씨는 살아생전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지 불과 2년 만에,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녀의 자식들을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남편 이성계마저 죽은 뒤에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이루었던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버렸다.

왕이 된 이방원이 강씨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강씨에게 복수하였다.


강씨는 엄연히 처였으나, 첩으로 강등되어 왕비의 시호가 없어졌다.

이성계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고르고 고른 그녀의 무덤도 마음대로 옮겨버려 훗날 자손이 제사를 지낼 수도 없게, 무덤자리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강씨는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왕비가 아닌 첩으로, 무덤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 갔다.


그렇게 200년이 지나 선조대에 강씨 후손의 호소로 강씨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그 이후 또 100년이 지난 현종대에 종묘에 모셔지면서 다시 왕비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즉 사후 300년동안 강씨는 왕비로 기록되지 못했고, 종묘에 모셔지기는 커녕 제사도 제대로 모셔지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왕비로 인정하는 모든 기록과 기념물들을 철저하게 없애버렸고, 강씨는 친인척의 족보에서도 이름이 빠졌고, 그녀의 친정집 터도, 능도 모두 잊혀져갔다. 그렇게 그녀는 사후 300여 년간 정식 왕비가 아닌 첩으로 기록되었다.


<첨언>


가세가 기울어가는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이성계와 정략결혼을 한 후, 적극적인 의지와 지략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 가며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된 여인.

조선 최초의 왕비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정도전과 연합하여, 첫째 부인 한씨의 장성한 아들들을 모두 제치고, 자신 소생의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한 여인. 살아서의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에는, 그녀가 살아생전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그녀의 사후 2년 만에 그녀의 모든 자식들은 처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남편 이성계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첩으로 강등되어, 이후 300여 년간 정식 왕비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많은 걸 갖춘 여자였다.

비록 몰락하였지만 소양을 갖추게끔 했던 훌륭한 집안, 뛰어난 미모, 능력있고 멋진 남편, 그리고 그 남편의 대단한 신뢰와 사랑, 남편을 왕으로 만들 정도로 똑똑한 두뇌와 정치적 능력, 아들딸을 당대 최고의 가문과 혼인시킬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 등 그녀는 거의 모든 걸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따르는 수많은 어려움도 잘 극복해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갖추지 못했던 것 하나.. 욕망을 멈추는 것이었다.

만족을 모르는 욕심은, 지금 만족할 수 있는 현실 모두를 파괴할수도 있을만큼 강력하게 위험하다는 것을, 신덕왕후가 알았더라면 그녀의 자식들이 그런 불행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순리대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모두가 말하는 대로 공이 가장 컸던 이방원에게 세자 자리를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왕비로 기억될만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확실하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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