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고, 조선 개국을 위해, 또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어야했던 이방원의 아내로 함께 고초를 겪어냈으며, 결국 남편은 왕이, 자신은 왕비가 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이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또다른 상황을 겪게 되는, 굴곡진 한 평생을 꽉 채워서 살아낸 여인이다.
<신흥 명문거족이었던 친정>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인 여흥 민씨는 고려 말 신흥 명문거족이다. 무신정권 이후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를 다수 배출한 신진사대부 집안으로, 고려왕실에서 인정한 15개 명문에 속할 정도로 명성 높은 가문이다.
원래 고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족내혼으로 그 권력을 유지하였는데(제1왕후가 왕씨여야 한다) ,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 공주가 1왕후가 되어야했기에 족내혼이 폐지되고, 사돈을 맺을 수 있는 명문 가문 15개를 선정하였다. 여흥 민씨가 그 15개 안에 든 것이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지식인을 많이 배출하며 성장한 가문이었기에 더욱 자부심이 넘쳤다.
그런데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아버지 가문과 함께 어머니 가문도 중요했는데, 어머니 송씨 부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당시 민씨 가문이 혼인하는 집안 역시 대단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민씨 집안이 신흥사대부 집안이었다면, 어머니 송씨 가문은 대표적인 부원세력이었고 기황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던 집안이었다. 한때 송씨 가문은 민씨 가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세도와 부를 가졌는데, 그것이 위태로운 까닭은 민씨 집안처럼 과거에 합격하여 이룬 자력에 있지 않고, 다른 세력(원나라, 기황후)에 기대어 있었던 까닭이다.
당시 여흥 민씨 가문은 신진사대부로 자부심이 있었던 반면 부나 세도는 없었을 것이고, 어머니 송씨 가문은 부와 세도는 넘치되 지식인이 부족하였기에 두 가문은 그렇게 서로 필요에 의해 혼인하였으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송씨 가문은 민씨의 부모가 혼인하고 얼마되지 않아 공민왕의 부원세력 척결로 인해 풍비박살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부원세력이자 기황후의 최측근으로 당대 고려 왕실과도 대적할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송씨 가문이 일순간 추락한 것이다. 그로 인해 민씨의 어머니 송씨 부인은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 송씨의 친정가문이 화를 입은 것이 송씨가 첫딸을 낳고 얼마 뒤였고, 그 뒤 송씨가 십년간 자식을 낳은 기록이 없다. 이를 통해 송씨가 친정집안이 화를 입은 것에 대해 상당히 큰 충격을 받고 크게 상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사실에서 송씨 부인은 둥글한 성격이기 보다는 분노나 충격을 쉽게 삭이지 못하는 다소 예민한 성격이었을 것도 예측해본다.
원경왕후 민씨는 송씨가 첫딸을 낳은 뒤 십년만에 낳은 두번째 자식이다. 아마도 민씨 부부는 그 딸이 정말로 귀했을 것 같다.
또한 민씨는 몹시 비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변계량이 지은 <헌릉지>에 따르면 민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숙의총혜하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고 한다.
친정어머니 송씨 집안은 미모가 뛰어나기로도 유명했다. 송씨부인의 작은 할머니는 <고려사>에서 대단한 미인으로 소개되어 있고, 친동생은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민씨도 어느정도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부부가 십년간 보지 못했던 자식을 본 것만으로도 무척 귀한 자식이었을텐데 태어나면서부터 비범해보였다니 어린 민씨는 아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방원과의 혼인>
원경왕후 민씨는 유력한 신흥사대부 가문인 여흥 민씨가의 딸이었고, 미인으로 유명한 송씨 가문의 딸이었으며, 아버지 민제는 과거에 합격한 지식인이었다. 즉 가문도 좋았고, 인물도 좋았을 것이고, 지적 소양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니 콧대도 높았을 것이다.
더구나 민씨 언니의 남편은 당대 최고 가문이었던 조씨 가문의 남자였고, 과거에도 합격한 인물(조박)이었다.
민씨는 언니만큼, 아니 그 이상의 멋진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민씨의 혼인이 늦어졌다. 보통 당시 여성들이 15세를 전후해 결혼을 했는데 민씨는 18세가 되어서야 2세 어린 이방원과 혼인했다. 당시로 보면 노처녀였던 것인데, 아마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어서 늦어졌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방원은 민씨가 보기에도 멋졌던 것일까?
당시 이방원은 신흥무장세력인 이성계의 아들로 떠오르는 가문에 속했고, 이방원 자체가 매우 똑똑하여 (과거시험은 합격 전이었지만) 16세에 성균관에 입학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이성계는 일찍부터 가문을 일으킬 아들로 방원을 지목했고, 계모였던 강씨도 그가 책 읽는 소리에 자신의 친아들이 아님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남은은 곧잘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영기가 하늘을 덮을 정도다"라고 했으며, 훗날 관상을 잘 보는 하륜도 이방원을 가까이서 본 후 섬기기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방원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언가 남다른 면모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민씨가 보기에도 그것이 보였나보다.
열살까지 시골에서 자란 탓에 도시 남자들과는 달리 호방하고 체력적으로도 강인한 면모가 있었을테고, 눈에 띄게 영특한 면도 있었으니 콧대가 높았던 민씨가 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그동안 혼인을 미루었던 민씨는 이방원과 혼인하게 되었다. 민씨는 18세, 이방원은 16세에 둘은 혼인했고, 당시 고려의 결혼풍습대로 민씨의 친정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몇년이 안 되어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했고, 당시 과거에 합격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사람을 자랑스럽게 선달이라고 불렀는데, 사부이자 장인이었던 민제는 제자이자 사위인 이방원을 자랑스러워하며 선달 선달하고 불렀다고 한다.
이방원은 유독 선달 기간이 길었는데 그 이유가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발령이 늦어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비록 백수와 다름없지만 자랑스러운 백수로 처가살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를 왕으로, 하지만 시어머니의 배신>
이성계가 개경의 중심세력으로 점차 상승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남편인 이방원도 바빠졌다.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버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일에 행동대장격인 이방원은 날로 바빠졌고, 위태로워졌다. 이방원이 할 일들은 주로 시어머니인 강씨가 사주한 위험천만한 정치테러 같은 일이었다.
정치테러를 자주 한다는 것은 그 자신 또한 자주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고, 민씨는 남편의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 불안했겠지만, 가문의 영달이 달린 일이며 시어머니가 시키는 일이었기에, 아직 새댁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마음 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수밖에.
당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대신해 인질이 되기도 했고, 정몽주와 같이 정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민씨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민씨는 위로 딸을 둘 낳고, 이후 아들 세명을 낳았는데 내리 세명이 다 낳자마자 죽게 된다. 이는 태아때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금으로 본다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한다. 왜냐하면 엄마의 건강 문제였다면 다음 아기들도 다 그래야 하는데 이후 6명의 건강한 아이들을 잘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엄마가 더 나이가 젊을 때이기도 했으니, 아마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앞서 어머니인 송씨가 집안이 화를 입은 뒤 십년을 아이를 낳지 못한 것처럼(어쩌면 민씨처럼 낳자마자 죽었는데 기록이 없을 수도 있다) 민씨도 어머니의 성격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민씨는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내조해야했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다행히 시아버지의 개국이 성공하였다. 이제 모든 고생이 끝이 났고, 좋은 날만 남아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개국과정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시어머니는 개국이 성공하자마자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처참하게 짓밟기까지 했다.
조선 개국 과정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정치활동을 했던 이방원은 이제 정치백수가 되었다. 사병을 모조리 빼앗기고, 그에게 동조하는 신하들 역시 모두 정치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재기도 불가능하게 말들었다. 사면초가라고 이방원은 이제 할일 없이 집에서 노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민씨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나보다.
개국 후 바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앞선 세 아들처럼 또 죽을까봐 낳자마자 아예 친정으로 보냈는데, 다행히 그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훗날의 양녕대군이다. 그리고 이방원이 정치 백수가 된 후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두 아이는 터울이 1년이 되지 않는다.
특히 셋째아들을 임신했을 때는 마음이 아주 편안했던 것 같다. 그 셋째 아들을 낳은 뒤 할일이 없었던 이방원은 전과 달리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며 귀여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셋째 아들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태교와 어린시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소심하게 한번더 해본다.
< 남편을 왕으로 >
하지만 계속 정치백수로 살 수는 없었다. 정치판은 도태되면 죽음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강씨가 죽고 강씨와 연합세력이었던 정도전은 강씨보다 더 잔혹하게 이방원을 짓밟고자 했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이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을 죽이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이 일을 진행할 무기나 사병이 이방원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모두 민씨와 친정집이었다. 민씨는 이방원의 무기가 빼앗길 때 미리 친정 남동생들을 시켜 무기를 빼돌렸다. 장군이었던 친정남동생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정도전을 치기로 한 모든 계획은 친정 남동생들에 의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도전을 치고, 강씨의 아들들과 사위를 죽인 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왕자의 난의 성공으로 정치백수였던 이방원은 이제 최고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세자였던 이복동생을 죽이고, 바로 자신이 세자가 되는 것이 그랬는지 둘째형에게 왕위를 주는데 그가 바로 조선2대왕 정종이다.
이후 바로 위 동복형인 방간 또한 왕위를 탐내고 이방원을 죽이려는 계획이 발각되자, 이방원은 동복형 방간까지 죽이게 된다. 방간은 방원와 함께 개경으로 올라와 함께 공부할 정도로 친했기에 이방원은 그 싸움에 나아가며 울었다고 하는데 이때도 갑옷을 입혀주며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이 민씨였다고 한다.
강씨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했듯 민씨 역시 남편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조를 했다. 자신의 친정집안 역시 온 힘을 다해 이방원을 도왔다.
2차 왕자의 난까지 성공하자 이제 정말로 이방원의 세상이 되었다. 정조는 왕위를 동생에게 선양했다.
민씨는 이제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은 듯했다. 하지만 앞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펼쳐진다.
<또다른 배신>
신덕왕후 강씨가 남편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데 특등공신이었던 것처럼
원경왕후 민씨도 남편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 데 특등공신이었다. 그녀의 집안도 함께.
이성계는 개국이 아니었어도 그럭저럭 고려에서 재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조선 정치판에서 영원이 도태되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어쩌면 민씨는 강씨보다 더 처절하게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했을 것이다.
이방원은 모든 병력을 빼앗기고 강씨와 정도전에게 감시받는 상황이어서 그야말로 허수아비 같았다. 당시 이방원은 스스로 마음도 많이 울적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갓난아기였던 셋째아들 돌보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군이었던 친정 남동생들을 동원해 이방원의 병력을 몰래 빼돌리고, 남몰래 후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 민씨였다. 그 정도로 민씨는 정치감각도 있었고 진취적인 면도 있었고 치밀한 준비성도 있었다.
그렇게 제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모두 민씨와 민씨 친정집안의 도움이 컸고, 아니 그들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씨는 시어머니 강씨가 그랬던 것처럼 그 영광, 성공의 지분을 당연히 남편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이성계와 달랐다.
이성계가 정이 많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였던 데 반해
이방원은 냉철한 면이 더 강했고 아내에게 자신의 권력을 나누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방원은 국가이성을 자처하며 자신의 권력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려했다. 그것이 아내일지라도.
그래서 강씨와 민씨는 그 남편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한 일은 비슷했지만 그 이후의 삶은 반대로 흘러간다.
모든 일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여흥민씨 가문은 그에게 기댈 언덕이었다. 하지만 왕이 된 후에 그 가문은 그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가문이었다.
이방원은 왕이 된 영광을 함께 나누려는 아내의 입김이 너무 막강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태종이 된 이방원은 심할 정도로 많은 후궁을 보란듯이 들인다.
처음에 원경왕후는 후궁을 내쫓기도 하고, 태종에게 화도 내보고, 단식도 하는 등으로 여러 차례 항거했지만
이방원은 그럴수록 더 많은 후궁을 들이고, 심지어 정식으로 가례도 올리겠다고 했다. 자존심이 매우 강했을 원경왕후가 하다 안되어 울면서 "상감께서 저한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상감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생고생해서 나라를 차지했는데, 이제 저를 잊었단 말입니까?" 라고 하소연하자, 이방원은 가례는 취소하고 후궁만 들이겠다고 일단락 할 정도로 부부 사이는 얼어붙었다.
민씨의 가슴에는 원망과 울화가 가득 쌓여갔을 것이다. 하지만 원경왕후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민씨 집안은 고려를 이어 조선에서도 막강한 힘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리고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어린시절을 민씨 친정집에서 컸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민씨 집안 사람들과 더욱 두터웠다. 이방원은 자신이 죽고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경우 민씨 외척 세력의 발호를 걱정했다.
그래서 민씨 집안을 숙청하고자 한다. 하지만 민씨 아버지인 민제는 자식들에게 조심 또 조심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기에 큰 화를 입을 구실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방원이 갑자기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한다. 당연히 모든 신하들은 격렬히 반대를 했다.. 그게 관행이었다. 조선 후기 영조는 심심하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해서 대신과 당시 세자였던 사도세자가 수시로 추운 겨울에 밖에서 밥도 안 먹고 선위의사를 거둘 때까지 무릎꿇고 앉아 선위를 거두어달라고 사정했다.
이방원도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알겠다고 하고 다시 왕직을 잘 수행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그 쇼를 벌인 이유가 드러났다. 그 선위 사건 때 왕비 민씨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의 낯빛이 밝았다는 이유를 들어 왕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그 둘을 귀양 보내 자진하게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민씨의 남은 두 남동생까지 죄목을 덮어씌어 자진하게 하고, 그렇게 그녀의 친정집안은 몰락하게 된다.
민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남편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든 불안과 고초를 참아내었고, 심지어 자신의 친정식구들도 목숨 바쳐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 데 협조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자신과 친정집안에 대한 배신이었다.
여기에 더해 대신들은 민씨를 폐위시킬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외척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민씨의 폐위는 반대한다.
훗날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말했다. "네 어머니의 공이 유씨의 제갑보다 더 크다"
유씨의 제갑이란 왕건의 부인 유씨가 갑옷을 들어 입혔다는 뜻인데, 궁예를 몰아내는 데 왕건이 주저하자 유씨 부인이 갑옷을 들어 입히고 나가 싸우도록 격려했다는 고사이다. 태종은 왕비 민씨의 내조 덕문에 자신이 즉위할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태종 역시 아내의 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냉철했던 그는 왕의 권력을 아내와 나누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민씨는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허울 뿐인 왕비로 남게 되었다.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에, 민씨는 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였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세 아들을 제외하고도 4남4녀를 둘 정도로 부부금슬도 좋았다.
하지만 이방원이 왕이 되고 민씨 자신이 왕비가 되고 난 후에는 그저 행사 때 왕비 자리에 앉아 있는 이름뿐인 왕비로만 남은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왕비되었을 때, 이성계는 그 공을 알아주고 그 영광을 함께 나누어가졌다. 그 영광을 함께 나누고자 했기에 무리해서라도 그녀 소생의 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준 것이다. 하지만 원경왕후 민씨는 그 영광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정적처럼 처참하게 짓밟힌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모든 게 늘 좋을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이 자식들의 삶에 있어서는 또 신덕왕후와 원경왕후가 반대이다.
신덕왕후의 세 자손은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두 아들과 사위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며느리와 딸은 비구니가 되었다.
이에 비해 원경왕후 민씨는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으며 삶을 마무리했다. 이방원(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원경왕후 민씨도 대비가 되었고, 궁을 떠나 왕비가 되기 전에 살았던 살림집을 궁으로 고쳐,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56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큰아들, 작은아들, 그리고 세종인 셋째아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살았다.
우애가 좋았던 세 형제는 셋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큰 갈등없이 여생을 잘 살았으며, 셋째 아들은 대대로 성군으로 기억되는 세종대왕이다.
자식들의 삶에 있어서는 신덕왕후 강씨에 비해 원경왕후 민씨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원경왕후는 유일하게 왕비가 되어 낳은 막내 아들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죽자, 더이상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인지 급격히 앓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첨언>
이렇게 그녀의 생애를 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있어 진정 행복했던 시기와 불행했던 시기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고려 시절, 시아버지 이성계가 큰 명성을 얻으며 남편 이방원이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 하지만 동시에 남편 이방원이 정치테러범의 역할을 하며 마음 조리던 시절.. 그래서 조산을 연달아 세번이나 했던 시절..
조선 개국 이후, 시어머니의 배신으로 남편 이방원이 정치 백수가 되어 목숨조차 위태롭게 느껴졌던 시절, 하지만 세 아들을 연달아 건강하게 낳고 키우던 시절, 특히 남편이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고 했던 그 시절..
그리고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왕비가 되었던 날들.. 하지만 많은 후궁을 들이고, 친정집안을 박살내버린 남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날들..
그리고 그 모든 배신들을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남은 생을 그저 허울뿐인 왕비로 살며, 그래도 그런 어머니의 한을 이해해주는 아들들의 효도를 충분히 받고 살았던 말년의 삶..
완벽에 가까웠던 친정집안,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지성을 갖추었던 그녀, 당대 최고의 남자를 남편으로, 그리고 왕비가 되기까지.. 짦게 그녀의 삶을 정리하면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당찬 왕비의 삶이었다싶지만,
조금만 자세히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삶에서 어느 순간이 진실로 행복했을까에 대한 답이 딱 어느시기라고 확실히 말할 수없을 것이며, 또는 그 답이 겉으로 보이는 그녀 삶의 영광과는 전혀 관련없는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나는 그녀의 삶을 보면서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왕비의 자리.. 그것이 정말 행복을 주는 꿈이었나, 아니면 그저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건가..
나 역시 현재에 만족하기보다, 현재에선 도달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꿈꾸며 현재를 살았다. 십대 학창시절에는 대학을 꿈꾸며 힘들게 공부하며 살았고, 대학생활에는 취업을 꿈꾸며 또 현재를 내어주며 살았고, 취업한 뒤에는 훌륭한 남편감을 찾기 위한 연애를 하며 살았다.
늘 그 다음에 주어진 나의 미래의 과제를 위해 현재를 즐기거나 현재에 집중하며 살지 못했다. 그러니 현재에 즐겁지도 않았고, 그 다음에 온 현재에 감사하기보다 그 다음 미래를 준비하느라 늘 조급한 마음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늘 아이들을 조금만 더 키워놓고 나도 일하러 나가면 행복할거야 하는 생각으로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 당시를 가장 즐겁게 몰입해서 살았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삶을 통해 나는 생각해본다. 진정한 행복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때 얻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그 꿈이 정말 꿈인지 욕망인지.. 그것이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해줄 가치있는 일인지..
그것을 가진 미래의 나보다 지금의 나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지나간 그녀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기억되길 바라며 원경왕후 민씨의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