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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 심씨

by SOL

소헌왕후는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명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부인이다.

부창부수라는 말을 이분들을 보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남편에 훌륭한 아내의 귀감이 되는 부부이다.


<왕가의 며느리에서 왕비로, 그리고 찾아온 불행>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소헌왕후 역시 결혼할 때는 남편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고, 그저 왕가의 부인으로 평생을 살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아주버님인 양녕대군의 폐행이 계속되고, 시아버지는 자신의 남편을 차기 왕으로 점찍은 듯한 행동을 계속 하는데.. 그녀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좋았을까 불안했을까..


양녕대군을 아꼈던 원경왕후(소헌왕후의 시어머니)와 양녕대군의 부인(소헌왕후의 형님)이 소헌왕후를 견제하는 행동을 계속 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 행동들을 받아들였을까..

그녀는 왕비가 되고 싶었을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녀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니 그녀의 의중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사건들은 흘러갔고, 시아주버님인 양녕대군은 폐위되고 둘째 아주버님은 스스로 중이 되어 왕위를 양보하고, 남편인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고, 또 뒤이어 시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자 왕이 되었다.


남편이 왕이 되었지만, 그야말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상왕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큰 존재인 시아버지가 뒤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권확립에 너무도 강한 의지가있었던 시아버지와, 세상 모르고 권력이 높아졌다고 신이 난 친정아버지 사이에서 심씨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그녀의 불안이 현실이 되어 친정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사약을 받아 죽고, 친정어머니는 관노로 전락하고, 자신은 폐비가 될 위기에 닥쳤을 때.. 그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드라마에서는 그냥 폐비를 시켜달라고 세종에게 이야기하는데.. 이미 자식을 다섯이나 둔 어미였던 소헌왕후가 정말 그렇게 말했을까..


실록인지 야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신하들의 심씨의 폐비 주청이 이어질 때, 태종이 소헌왕후를 불러, "너는 어느 집안이냐" 했을 때, "심씨와는 상관없는 이씨 집안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친정가문에 대한 정체성이 매우 강했다.

소헌왕후보다 100년쯤 더 후대 사람인 신사임당도 결혼 후 20여년 간 친정에 살면서 시집간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보다 친정에서 딸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소헌왕후보다 150년 뒤의 사람인 인목대비는 자신의 친정이 화를 입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친아들을 내어줄테니 친정집안의 화를 거두어달라고 청할정도였고, 또 300년뒤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정집안에 대해 변명하고자 친히 <한중록>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시대, 특히 조선 초기의 여인들은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심씨라고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심씨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심씨가 아닌 이씨 집안이라고 했을까..

살고싶어서? 이미 자신이 왕비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노비로 전락한 상태인데 자신이라도 살고싶어서?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남은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말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소헌왕후는 친정집안이 몰락하는 그 크나큰 아픔을 겪어내고 왕비로서의 삶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사건은 매우 절망스럽고 한이 맺히고도 남을 사건일 것이다.

그녀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왕비가 되었고, 그 결과가 사랑하는 친정집안의 몰락이었으니, 원치않는 크나큰 불행을 맞았음이 분명하다.


소헌왕후도 한동안은 시아버지를, 남편을 원망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과 혼인하고 거의 1~2년 터울로 아이들을 계속 낳았는데, 그 사건이 있은 후 5년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리고 소헌왕후의 첫 딸인 정소공주가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에 걸려 죽자, 소헌왕후는 자신이 시아버지를 너무 원망하는 나쁜 마음을 품어 벌을 받은 것 같다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더이상 원망하는 마음도 걷어내고자 애쓴 것 같다. 정소공주의 죽음 이후 세종과도 화해를 하고, 뒤이어 아들을 넷이나 더 두게 된다.


또한 겉으로 내색하긴 힘들었겠지만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원경왕후는 죽고 없고, 태종이 죽음에 임박할만큼 허약해지자, 소헌왕후가 직접 태종을 간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 심성이 고왔나보다.


한 개인에게 닥친 불행은 다양할 수 있다. 그 어떤 불행이 어떻게 갑자기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 그 불행은 누구도 예측 못하는 사고일 수도 있고, 우리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후의 대응방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녀의 선택이 참 현명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바탕에는 분명 그녀의 자식들이 존재했으리라도 생각된다.



<소리없이 강했던 여인>


소헌왕후는 앞서 신덕왕후나 원경왕후와는 달리 조용히 내조하는 성격이었다. 남편 앞에 나서는 법이 없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


시아버지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후궁을 아주 많이 두었듯, 남편 세종 또한 시아버지의 정책에 힘입어 많은 후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니 내명부가 거대해졌고, 그렇게 되다보면 내명부에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소헌왕후가 왕비로 있을 때는 조선역사상 내명부가 가장 안정된 시기로 볼 정도로 소헌왕후는 소리없이 강하게 내명부를 다스렸다.


관리가 필요한 후궁이나 후궁의 자식들은 사람을 심어 철저히 관찰하고 필요에 따라 강하게, 또는 약하게 그들을 관리했다. 물론 자신의 자식도 예외는 아니어서 잘못한 경우 엄정하게 벌을 내렸다.

특히 첫아들 문종의 부인, 심씨에게는 며느리가 되는 세자빈을 세 번이나 교체한 것은 왕실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세종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는 후궁은 자신도 존중하고 대우하겠다는 의미로 자신의 친아들을 그 후궁에게 양육하게끔했다.

세종이 자의로 들인 후궁이자 세종이 소헌왕후 다음으로 자식을 많이 봤고 또 사랑했다는 신빈 김씨에게 소헌왕후는 자신의 갓 태어난 막내아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세종이 멀리 사냥을 나갔는데(당시 사냥은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사찰의 의미도 있다), 궁에 불이나자 당시 정승이었던 황희는 소헌왕후에게 지시를 부탁했고, 소헌왕후는 당시 임신한 몸으로 진두지휘하여 불을 진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정도로 소헌왕후는 때론 부드럽게, 또 때론 강하게 소헌왕후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처리했던 것이다.


훗날 세종은 자신의 치세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해 부인인 소헌왕후에게 그 공을 돌렸는데 아마도 빈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당시 한글창제는 기득권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받는 일이었는데 그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한 세종은 그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창제했고, 세종대왕이 그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소헌왕후의 지지와 응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한글창제에는 그들의 자식인 문종, 정의공주,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의 도움이 컸다고 하니, 아마 가정 안에서 세종을 그만큼 지지하고 믿었기에 당시 불필요하다고 조롱받던 일임에도 끝까지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화만사성이라고 세종이 업적을 이뤄내는 데에는 소헌왕후의 지지와 내조가 분명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훗날 정조가 세종 이상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가정이 불우한 것이 그에게 큰 마이너스가 된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어쨌든 소헌왕후는 친정집안이 몰락하는 아픔도 대의를 위해 인내하였고 또 용서하였고, 서운했을테지만 그래도 남편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현명함과 성실함으로 해내었던 정말 정석에 가까운 왕비였다.


또한 옛날 이야기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왕비는 왕과 결혼하여 아들딸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소헌왕후는 현명한 왕 세종과 결혼하여 8남2녀(조선왕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음)를 낳고, 마지막까지 남편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또한 자식들도 그 어머니의 한스러운 삶과 그것을 승화하는 삶을 보았기에 효를 다하였다고 한다.



<첨언>


불행보다 그 불행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 소헌왕후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대처방법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불행한 상황에 닥치게 되면 원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인데 그 후에 계속 그 감정을 끌어안고 사느냐, 또는 어떻게 일어나느냐로 나뉜다.


어떻게 일어나느냐할 때 공익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승화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여유있는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헌왕후처럼 그 감정을 보내버리고, 현재 주어진 삶을 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정도만으로도 정말 충분히 잘 이겨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면에서 소헌왕후의 삶은 충분히 가치있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

신덕왕후나 원경왕후처럼 가지지 못한 것을 새로이 쟁취하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 진취적인 삶도 멋지지만

소헌왕후처럼 원하든 원치않든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이 더 향기로운 것은 왜일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또 양면이 있는 법이다.

소헌왕후는 8대군을 둔 어머니인데, 그 아들들이 모두 쟁쟁한 아들들이었다. 왕재가 너무 많았던 탓에 왕위 다툼과 형제간의 살육이 일어난다.

큰아들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죽고, 장손인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단종을 죽이고, 또 형제인(소헌왕후의 8대군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이게 된다.


그것을 못보고 일찍 죽은 것이 그녀에게는 다행인걸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수양대군이었기에, 만약 그녀가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왕실에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절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다면 그녀의 이른 죽음은 큰 불행인걸까..


그 누구의 삶도 한 마디로 좋다 나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나누어 말할 수 없지만, 그녀의 삶은 더더욱 그러한 의문이 많이 남는 삶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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