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윤씨는 수양대군, 즉 세조의 비이다.
그녀는 세조의 비로 유명하기보다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비로서, 왕의 권력 아래 가려졌던 다른 왕비들과 달리 왕이 가지는 최고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여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정희왕후는 참 복받은 생이다. 조선시대라는 보수적인 시대에 여자의 몸으로 남성들 위에서 그들보다 높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수렴청정은 어린 손자를 대신한 것인데 이 말은 정희왕후가 아들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정희왕후는 두 명의 아들을 모두 스무살의 젊은 나이로 보내고, 손자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자식이 없었을 때에는 정희왕후가 참 멋지고 부러운 인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둘 생기고 다시 정희왕후를 생각해보니, 정희왕후의 가슴에 멍이 들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비,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지 들여다보자.
<윤번의 막내딸, 수양대군과 혼인하다>
정희왕후는 조선역사상 첫 수렴청정을 한 왕비이다. 왕이 어릴 때 왕실의 최고 여성어른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수렴청정 제도를 실제로 처음 수행해낸 왕비인 것이다.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 왕과 같은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인데, 그 최초의, 최고의 권력을 잡은 여인이 정희왕후인 것이다.
그렇게 최고권력자였던 정희왕후인데,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 이유가 그녀의 아버지 윤번이 권력형 부정축재자였기 때문이다. 양반들의 유교사회에서 부정축재를 한 것은 매우 부끄러운 것으로, 윤씨 집안에서도 윤번에 대한 기록을 거의 하지 않은 탓이다.
윤번은 과거에 합격하지도 못했고, 음서로 관직에 나갔는데 그마저도 부정축재로 명예를 더럽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번은 크게 기죽지 않고, 좋은게 좋은 거라는 성격으로 살아간 듯 하다.
그리고 그런 윤번의, 좋게 말해 유연하고 뒷끝없는, 나쁘게 말하면 욕심많고 능청스러운 성격을 정희왕후도 닮은 듯하다.
파평 윤씨집안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시작해 조선 초기 아주 명문이었다. 그래서 왕실과도 혼인을 많이 한(태종의 사위 17명 중 4명이 파평윤씨) 가문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왕과는 거리가 있는 둘째아들이었기에, 세자빈 간택하듯 처녀들을 궁으로 직접 부르진 않았고, 왕실에서 보낸 상궁이 적당한 혼처를 방문해 후보되는 사람을 살펴보고 왕실에 보고하는 식이었다.
원래 수양대군의 부인감으로 정희왕후 윤씨의 언니를 보기 위해 상궁이 방문했는데, 정희왕후가 언니가 선보는 그 자리에 함께 나온 것이다. 그때 윤씨의 어머니가 "네 차례는 멀었으니 들어가라"고 혼냈다고 하는데, 정희왕후를 본 감찰상궁이 "기상이 심상치 않다."며 다시 보기를 청했고, 결국 언니의 혼처는 정희왕후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정희왕후는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었고, 기상도 비범치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일화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성격은 그녀의 생애 전반을 통해 증명되기도 한다.
어린 정희왕후는 그렇게 수양대군과 혼인하였지만, 수양대군은 둘째아들이었기에 그녀 또한 왕비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결혼적령기보다도 어린 11살의 이른 나이로 결혼한 정희왕후는 결혼과 동시에 영의정부인인 정경부인보다 높은 대군부인인 삼한국대부인에 책봉되었다.
<왕비가 되다>
앞서 말했듯 정희왕후가 결혼을 할때까지만해도 왕비를 꿈꾸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아주버님인 문종이 몸이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의 아들인 단종은 너무 어렸기에 차기 왕좌가 불분명하다는 여론이 알게모르게 퍼지게 되었다.
또한 세종의 30년간 치세로 조선이 많이 안정되긴 했지만, 할아버지 태종이 그랬듯 왕족이라면 누구든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남아있었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편인 수양대군은 매우 막강한 인물이었다. 정희왕후 역시 어린 시절 언니의 혼처를 탐냈던 것처럼, 왕비 자리도 탐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문종이 왕이 된지 2년만에 승하하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 나이 열두살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어린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할 왕실어른 또한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신하들을 존중하고 적극 등용했던, 세종이 아꼈던 조정대신들이 있었다.
조정대신들이 워낙 든든했기에 처음에는 수양대군도 어찌할 상황이 못되었다. 오히려 조정대신들에 의해 수양대군이 처단을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던 상황이었다. 수양대군은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봤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오히려 명나라 사신을 자청해서 다녀온다.
정희왕후는 남편이 명나라 사신을 자청했을 때 눈물로 막았다고 한다. 그전에 세종이 수양대군을 좀 주저앉히기 위해 중신인 박팽년의 딸을 수양대군의 소실로 들일때에도 정희왕후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않을 정도로 자신의 부정적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최소6개월이 걸리는 사신길에, 혹여나 그동안 가족들이 나쁜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로,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지금은 자신이 조선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 생각했다. 지금의 판도로는 하늘의 뜻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6개월 뒤에 판세를 보고자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판세가 바뀌었다. 6개월동안 조정대신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 단단했던 세력이 나뉜 것이다. 단종을 보필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던 그 세력에 틈이 생기자, 수양대군이 그 틈을 파고들어 일부는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일부는 쿠데타로 진압하여.. 결국은 자기가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쿠데타였으나, 수양대군의 명석함과 판단력, 포섭력, 추진력, 실행력은..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정희왕후도 왕비가 되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성공한 데에는 당연히 정희왕후의 지지와 내조가 있었다. 아들의 혼처를 구하는 데서, 윤씨의 야심이 드러난다.
수양대군 부부의 큰아들의 혼처를 물색함에 있어, 당대 최고 권력가 집안인 한확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것이다. 이는 분명 왕권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혼처를 구하는 것은 대체로 여자의 일이었기에 정희왕후는 남편 수양대군의 야심을 주저앉히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응원하는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한 밤, 김종서를 치는 일은 다들 두려워했기에, 모인 군사들조차 몇몇은 달아나고, 왕에게 먼저 아뢰어야 한다는 등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은 더 지체해서는 도리어 당할 것 같다고 판단하여 혼자 가겠다고 나섰다는데, 이때 준비한 듯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준 사람이 정희왕후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마음놓고 진행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안사람, 파트너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앞서 신덕왕후와 원경왕후가 그랬듯, 정희왕후도 그의 남편이 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그 후는 시증조할머니나 시할머니와 다르게 행동했고, 다른 삶을 살았다.
<왕비가 된 윤씨>
남편의 쿠데타의 성공으로 왕비가 되어 입궁하게 된 정희왕후는 앞으로의 행복을 꿈꾸었을 것이다. 비록 쿠데타로 얻은 자리이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 왕으로서의 능력이 충분했던 남편, 그 뒤를 이를 증조할아버지의 기상을 닮은 건장한 아들, 그리고 그 뒤를 이를 손자도 있었으며,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했던 며느리까지. 모든 게 완벽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동생들, 이복동생들과 조카를 죽이고, 조정의 유능한 대신들도 아주 많이 죽였다. 정확하게 기록으로 확인되는 인물만 70여명에(아마도 기록은 최소한으로 축소했을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 및 죽인 신하들의 아들이라 죽임을 당한 이들, 또 그들의 여자 가족을 노비로 만들어버린 수까지 합하면 계유정난의 희생자들은 수백명이 족히 넘는다.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한명회, 권람, 신숙주를 비롯한 그의 공신들의 질이 얼마나 낮았느냐하면(종종 그들을 정치깡패라 부르기도 한다), 단종의 편에서 죽임을 당한 신하들의 부인과 첩, 딸자식들을 노비로 나눠가졌고(이는 성적으로도 충분히 착취가능함을 의미한다), 심지어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를 서로 가져가겠다고 언쟁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고, 단종 사후 정순왕후 송씨는 비구니가 되어 절(정업사)로 들어가버렸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은 세조의 주선이었는데,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는 세조의 절친한 벗이었다. 자신이 주선하여 왕비자리에 앉힌, 자신의 절친한 벗의 딸을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겠지..
정순왕후 송씨를 따로 다루진 않지만, 그녀 또한 얼마나 구구절절 사연많은 삶이었을까..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14세, 그녀가 15세에 혼인하여, 단종이 17세에 죽고 18세의 그녀가 비구니가 되어 절어 들어간 후 , 81세까지 살다가 죽는다. 기구한 삶인데..장수를 누리긴 했다.
잠깐 계유정난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수양대군이 일으킨 왕위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많이 엇갈린다. 부정적 평가로는 당연히, 항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조카를 죽이고 본인이 왕이 된 파렴치한 사건이며, 아버지 세종이 닦아놓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신권중심의 왕조국가가, 세조가 공신들을 죽이고 무력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학자 중심의 신하들이 배제되어 세종이 닦아놓은 유교중심의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정국이 변질되었고, 사림이 득세하고 사화가 일어나고 붕당정치가 발생하는 등, 조선 망조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극단적인 의견까지 있다.
긍정적 평가로는 어린 단종의 정치적 역량보다는 세조의 정치적 역량이 더 훌륭하다고 보는 견해인데, 세조는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작업뿐 아니라 그 후 한글번역사업도 적극 참여하는 등 문과적으로 인재였고, 무장으로서 능력도 있었고, 정치감각도 있었기에, 어린 단종보다 세조가 왕이 되어 훗날 성종대까지의 치세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을 오히려 긍정적인 사건으로 보는 견해이다.
포인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의견이므로.. 아직 부족한 지식을 가진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읽는 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다시 돌아와서
단종의 어머니이자, 수양대군에게는 형수가 되는, 정희왕후에게는 손윗동서가 되는, 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 권씨의 원혼이 궁을 떠돌며 세조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세조는 그 소문이 무서웠는지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치기도 했다.
수양대군(세조)과 정희왕후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무척 건장한 청년이었다.(잔병치레는 잦았다고 하는데, 체구가 몹시 건장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태종)와 아버지의 무장 기질을 이어받은 매우 건장했던 스무살의 의경세자는 그의 둘째아들이 태어난지 한달만에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현덕왕후의 원혼이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라고 말한다는 소문이 사실이 된 것 같았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몹시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 소문이 사실처럼 된다면, 그들 왕조의 정통성까지 위협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명회의 딸과 혼인시킨 둘째아들이 있었다. 세조와 한명회가 세운 그들의 왕조가 똑같이 그들 후손에게 물려주는 게 하늘의 뜻인양 보여준다면, 그들의 정통성도 더 확신받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위로하며 의경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 해양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니 그가 훗날의 예종이 된다.
하지만 하늘의 뜻은 역시 그들의 편이 아니었나보다. 둘째아들 예종도 즉위 1년만에, 형과 똑같이 스무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이미 남편도 죽고, 큰아들에 이어 둘째아들까지 먼저 보낸 정희왕후의 마음이 어땠을까
남편이 저지른 살생(물론 그녀도 합의된)의 모든 죄를 그녀가 남아 다 받아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이후 정희왕후는 예종의 아들도 아니고, 의경세자의 큰아들도 아닌, 의경세자의 둘째아들(훗날 성종)을 왕위에 앉히고, 앞서 말했듯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는 왕비가 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성종의 부인이 한명회의 딸인 이유가 컸다.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결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년간 무탈하게 수렴청정을 했고, 그것을 그만두는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수렴청정을 그만두고도 무난히 편안하게 여생을 마무리했다.
(물론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도 할 이야기가 많다.. 조두대라는 여성이 있는데, 최근 최순실게이트에서 그녀들이 비교되기도 했다.)
<첨언>
세조는 총각때 여색을 즐기기로 유명했으나, 왕이 되고 난 후에는 후궁을 한명도 더 들이지 않을 정도로 정사를 돌보는 데에만 힘쓰고, 정희왕후에 대한 의리도 지켰다.
세조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때론 결단력있게 행동하는 정희왕후를 존중했으며, 내명부 일은 자신에게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일을 처리할 수 있게끔 따로 도장을 만들어 줄 정도로 그녀를 신임했다.
정희왕후의 시부모가 되는 세종내외에게 정희왕후는 매우 사랑스러운 며느리였다. 세종의 첫째아들인 문종의 부인을 두번이나 갈아치울 동안, 정희왕후는 시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며느리였다.
정희왕후가 첫아들 의경세자를 낳을 때도 궁중 법도를 어겨가며 친히 궁에서 해산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세종부부에게 첫 손자를 안겨준 이도 정희왕후였기에, 시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며느리이다.
정희왕후의 며느리가 되는 인수대비 한씨는 훗날 <내훈>을 직접 저술할 정도로 유교적인 여인으로, 시부모께 효성을 다하는 며느리였다.
그렇게 정희왕후는 남편복, 시부모복, 며느리복, 또 사위복은 최고였다고 할 정도이나 친자식은 달랐다.
비록 야사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큰딸은 아버지의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아 가문에서 제명되다싶이 했고, 두 아들은 똑같이 스무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정희왕후가 남편복이 있었고, 시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정치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한들..
나는 이렇게 두 아들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에 그녀의 나머지 축복들로도 결코 부러운 인생이 되지 못함을 이제는 알겠다.
아이가 없을땐 아들둘 일찍 죽은 것보다 다른 것들이 더 커보였는데, 아이엄마가 되고보니 그 모든 게 다 부질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부질없는 왕좌를 위해 죄없는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동조한 그녀조차도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권력욕이 그 어떤 사랑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던데, 내가 그 권력욕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희왕후에게 배우고 싶은 점은, 그녀의 성격이 넉넉하고 유연했다는 것이다.
신덕왕후와 원경왕후와 비교했을 때, 그녀는 훨씬 유연했다.
물론 그 기여도가 다르기는 했지만, 남편을 왕으로 만든 후 신덕왕후와 원경왕후만큼 많은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고 남편의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속상했을테지만 함구했다. 그런 처신이 세조가 그녀를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내가 생각하는 정희왕후의 최대의 장점이 이거였다.
지나치게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적당히 인내하며 살 줄 아는 것. 그랬기에 최고권력자가 되고 난 후에도 무난하게 적당하게 정국을 잘 이끌어나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개인의 성격보다 시대의 가치관이 개인의 행동에 더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서 정희왕후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난하고 유연한 것을 좋아하는 게 정희왕후의 성품도 성품이겠지만 시대가 변해서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도 조금 달라진 데에서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를 살았던 신덕왕후와 원경왕후는 여자들의 입김이 그렇게 큰 게 당연한 시대를 살았던 것이고, 태종이후 유교적 세계관을 뿌리내리고자 노력했던 시대를 거쳐, 정희왕후처럼 남편의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모른 체하고, 정치같은 대외적인 자리에서 여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교육(?)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또 그 시대상황만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 정희왕후에게는 손자며느리 되는 폐비 윤씨의 경우는 또 성격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변화한 시대상황과 그녀의 기본 성격이 함께 잘 작용하여, 그녀는 남편과도, 훗날 조정대신과도 꽤 원만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남편의 쿠데타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에 그녀도 동의하고 일조했지만, 그 후 그녀는 그 죄를 갚기위해 많은 애를 썼다. 문종의 하나뿐인 딸이자 자신에게 3촌 조카가 되는, 세조의 쿠데타로 하나뿐인 남동생과 남편을 잃은 경혜공주와 화해를 하기위해 많은 애를 썼다. 또한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도 노비신분에서 회복시켜 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신경을 썼다. 그리고 평생을 자신과 남편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듯 부처님께 기도드리며 생을 마감했다.
만약 그녀와 왕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죄를 다 빌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세조가 지은 죄에 상관없이, 그들 아들이 스무살에 죽었더라면, 최소한 죄의식은 없진 않았을까
나는 정희왕후가 평생 자신의 죄로 아들들이 죽었다고 자책하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삶이라 생각된다.
물론 정희왕후는 나처럼 예민한 성격이 아니기에 그것마저도 잘, 훌훌 털어버렸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