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선 공주이야기-경혜공주

by SOL

조선 시대 공주 중 경혜공주만큼 인생의 굴곡이 심했던 공주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시의 조선여인이 누릴 수 있었던 최상의 삶과 조선시대 신분계층의 최하의 삶을 모두 경험한 공주였다.


경혜공주는 자식이 귀했던 문종의 하나뿐인 딸이었고, 그로 인해 당시 세자의 후궁이었던 어머니를 세자빈, 훗날의 왕비로 만들어준 기특한 딸이었다.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 경혜공주는 조선시대 다른 공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녀가 시집간 후, 숙부 수양대군이 남동생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그녀의 삶도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남편 영양위를 따라 유배길에 올랐고 평민들도 겪어내기 힘든 갖은 고생을 다 겪어야 했다. 남편 영양위가 역모죄로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능지처참)을 받아 죽은 뒤에는,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이 관노(관아의 노비)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조선 시대 최고의 신분인 공주에서 최하의 신분인 노비로, 하루아침에 신분이 곤두박질한 것이다.


누구보다 귀하게 자란 경혜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모든 삶이 무너져 내렸다. 숙부 수양은 경혜의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과 남편을 죽게 만들었고, 자신을 고귀한 공주의 신분에서 최하층 관노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녀의 아들과 딸 역시 연좌하여 노비의 신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숙부 수양에 대한 경혜의 분노가 어땠을까. 그 몸서리치는 분노를 경혜는 어떻게 다스려야 했을까.



<어머니를 왕비로 만든 딸>


경혜공주의 아버지인 문종은 몸이 병약했고, 여색에 관심이 없었다. 또 그는 아내복이 없었던 것인지, 세자 시절 두 차례나 세자빈이 바뀌기도 했다.

문종이 세자 시절 첫 번째로 맞은 부인은 휘빈 김씨였다. 그때 문종의 나이가 14살이었는데, 그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런 문종의 관심을 사고 싶었던 휘빈 김씨는 민간 주술을 이용하였는데, 그것이 그만 시아버지 세종에게 발각되었다.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세종은 휘빈 김씨를 세자빈에서 쫓아내 버린다.


이후 두 번째 세자빈을 들이게 되는데, 그녀는 순빈 봉씨였다. 그런데 여전히 여색에 관심이 없었던 문종은 순빈 봉씨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이 여러 차례 문종을 불러 훈계하였지만,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부부간의 일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새로 세자빈을 맞이한 지 2년이 넘어가도록, 세자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후사를 걱정한 세종은 더 이상 순빈 봉씨만을 믿을 수 없었다. 이에 세종은 세자에게 후궁을 들이도록 하는데, 그리하여 홍씨, 권씨, 정씨 세 명이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문종은 이 중 홍씨와 권씨를 좋아하게 되었고, 문종이 20살 되던 해 권씨로부터 첫 딸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난 직후 죽었다. 하지만 문종의 마음을 얻은 권씨는 2년 후 다시 딸을 낳을 수 있었다.


이렇게 권씨가 문종의 사랑을 받자, 세자빈 봉씨는 속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녀는 크게 소리 내어 울며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부모와 남편은 그녀를 부덕한 여인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렇게 욕구불만에 가득 찼던 그녀는 결국 궁녀와의 동성연애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발각되었고, 시아버지 세종은 또다시 며느리를 궁에서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세자빈을 내치게 되자, 세종은 또다시 세자빈을 들이는 것에 고심하게 된다. 새로 세자빈을 들인다고 해도 문종이 그 세자빈과 잘 지낼 것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시의 법도를 어겨가며 이미 있던 세자의 후궁들 중에서 세자빈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문종은 후궁 홍씨과 권씨를 가까이 했는데, 문종은 홍씨에게 조금 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후궁이 된지 5년이 지났지만 홍씨에게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이에 비해 권씨와의 사이에서는 이미 딸을 두었기 때문에 또다시 아들을 낳을 가능성 역시 권씨 쪽이 더 많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후궁이었던 권씨가 세자빈이 되니, 그녀가 훗날의 현덕왕후 권씨이다. 그리고 이 때 어머니를 세자빈, 훗날의 왕비로 만들어준 문종의 하나뿐인 딸이 바로 경혜공주이다. 자식이 귀했던 문종에게 경혜공주는 그야말로 금지옥엽의 딸이었고, 어머니인 현덕왕후에게도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 준 기특한 딸이었다.



<하나뿐인 딸, 귀한 공주>


경혜공주는 문종의 유일한 딸로, 아버지 문종은 물론 할아버지인 세종의 사랑 또한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런 경혜공주가 7살이 되던 해, 드디어 어머니 세자빈 권씨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비운의 왕 단종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경사도 잠시, 세자빈 권씨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하여 경혜공주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된 것이다. 이후 문종은 새로 세자빈을 뽑지도 않고, 왕이 되고 죽을 때까지도 왕비자리를 비워둔다. 그리하여 문종의 자식은 경혜공주와 단종이 유일하다.


경혜공주는 보통의 공주들에 비해 혼인이 늦어졌는데, 그 이유가 더 오래도록 아버지의 곁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아내 없이 외롭게 지내는 홀아버지에게 경혜공주는 유일한 위안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만큼 문종에게 경혜공주는 소중한 딸이었다.

그러던 중 세종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경혜공주의 혼인이 서둘러졌다. 세종이 죽는다면 3년상 이후 혼인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경혜공주의 혼인이 너무 늦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정한 혼처가 참판을 지낸 정충경의 아들 정종이었다. 경혜공주의 혼처가 정해진 후 바로 세종이 승하하여 신혼집 마련은 3년상 후로 미뤄졌다. 이렇게 경혜공주는 혼삿길이 다소 험난하게 되었다.


문종은 어머니 없이 자란 안쓰러운 딸, 무엇을 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딸을 위해, 향교동의 집 30여 채를 철거하고 그곳에 딸의 호화로운 신혼집을 만들어 주었다. 당시 향교동은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곳의 집을 30여 채나 철거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반발이 있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하나뿐인 귀한 딸을 위해 그곳에 집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경혜공주는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과 정성이 담긴 화려한 혼례를 올리며 시집을 갔다. 그리고 문종은 하나뿐인 딸의 살림집을 마련해주고,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을 끝낸 한달 뒤 승하했다.



<곤두박질하는 인생>


아버지 문종의 넘치는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귀한 경혜공주도 그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내리막길 인생이 시작되었다.

원래부터 병약했던 아버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년 만에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뒤이어 경혜공주의 남동생이자 문종의 하나 뿐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비운의 왕 단종이다.

문종이 죽었을 때 경혜공주의 나이 18살이었고, 단종의 나이는 12살이었다. 보통 왕이 어리면 그를 대신하여 대비가 수렴청청 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당시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해 줄 대비도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할머니가 되는 세종의 비 소헌왕후도 세종보다 앞서 죽었기 때문이다. 왕실에 단종을 도와줄 어른은 없었고, 대신 세종의 다른 장성한 아들들, 즉 문종에게는 남동생이 되는 쟁쟁한 왕족들은 넘쳐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었다. 부모 없는 그들 남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같았다.


경혜공주에게 동생 단종은 그냥 동생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안타까운 동생이자, 혈육이라고는 그 하나 뿐인 애틋하고도 애틋한 동생이었다. 단종 역시 그런 누이를 끔찍이 따랐는데, 단종은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궁궐보다 향교동의 누이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계유정란이 일어나는 그 밤에도, 단종은 궁궐 대신 향교동 경혜공주의 집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은 계유정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쿠데타의 배경이 된 것이다. 아버지 문종이 딸의 행복을 빌며 애써 지어준 그 집에서, 문종이 아들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던 그 조정대신들이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때로 경혜공주는 어린 동생을 대신하여 수양숙부와 대적하기도 했다. 단종이 무서운 숙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경혜는 숙부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또 때로는 단식투쟁으로 수양대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단종이 상왕이 되고, 금성대군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가 귀양가게 되었을 때, 경혜공주는 불만의 표시로 단식투쟁을 하였다. 경혜공주가 몸저 누웠다는 소식에, 살아생전 형 문종이 그리도 끔찍하게 사랑했던 조카 경혜가 음식을 거부한다는 소식에, 수양대군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혜공주의 뜻대로 영양위를 귀양에서 풀어주었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수양대군의 질주는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경혜공주가 그에게 대적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권력의 이치를 꿰뚫는 수양대군이 상왕 단종을 그냥 둘리 없다. 하늘 아래 두 명의 왕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이 된 수양, 즉 세조는 사육신 사건 이후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내고, 결국은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든다. 그때 단종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었다.

경혜공주도 하나뿐인 어린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그저 지켜봐야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불행이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 영양위가 세조의 정권에 계속 불만을 품는다는 이유로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 문종이 물려준 그 많은 재산을 다 몰수당하고 빈털터리가 되었고, 두 살의 아들과 뱃속에 있는 딸과 함께 관노가 되어 끌려갔다.


경혜공주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의 남편 영양위는 유배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이 능지처참을 당하며 죽었다. 문종은 하나뿐인 딸이 자신이 직접 골라준 그 사위와 호화로운 신혼집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종이 죽고 5년 만에,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크나큰 비극이 딸에게 닥친 것이다.



<노비가 된 공주>


경혜공주는 문종의 유일한 딸이고, 어머니를 왕비로 만들어 준 기특한 딸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인 세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아내 없이 외롭게 지내던 문종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는 소중한 딸이었다. 향교동 부자동네의 집 30여 채를 철거하고 신혼집을 마련해 줄만큼, 왕실에서도 귀하디귀하게 여긴 공주였다. 그런 경혜공주가 노비가 되었다. 그것도 뱃속에 아이를 임신한 채.


세조는 관아에서 경혜공주를 특별 대우할까 염려하여, 경혜공주에게 노비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엄벌을 내릴 것이라 미리 엄포를 놓았다. 그리하여 관아의 수령이 경혜에게 다른 노비들과 똑같이 일을 시키려 했다. 이에 경혜공주는 무서운 눈초리로 소리쳤다.

“내 남편이 죄인이라 나도 죄인이 되었다 해도, 나는 왕의 딸이다.”

말은 그리 당당하게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막막하고 기가 막혔을까. 어린 동생과 남편을 고통 속에서 떠나보내고, 어린 자식과 뱃속의 아이를 품은 채 관노로 전락한 이 여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쩌면 경혜공주는 이미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버지 없이 커야하는 두 아이가 있었다. 쉽게 삶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노비생활이 길지는 않았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는 시숙인 문종과 그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정희왕후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철저히 믿었다. 그리하여 이미 죽은 단종에게는 그 죄를 갚을 수 없지만, 문종의 하나 남은 혈육이자 세조의 왕권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경혜공주가 그런 모진 운명을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생각했다.


정희왕후 덕분에 관노로 끌려간지 3일만에 경혜공주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경혜공주는 바로 출산을 하였고, 출산 후 바로 출가하였다. 경혜공주의 3살, 1살인 두 아이는 정희왕후에게 맡겨진다. 정희왕후는 경혜공주를 대신하여 어린 두 아이를 궁에서 키워주었다. 삶의 의지를 잃은 경혜공주는 아이들을 키울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슬픔을 가진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있는 정업원이라는 절에 들어가 버렸다. 그때 경혜공주의 나이 27세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용서>


정업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 경혜공주는 그곳에서 남동생과 남편의 명복을 빌며, 세조에 대한 원망을 불심으로 다스리려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혜공주의 어린 아이들은 정희왕후의 도움으로 궁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희왕후는 후덕한 여자였다. 그녀는 경혜공주의 자식들을 성심으로 보살폈다. 공주의 자식들은 다른 대군과 공주 못지않게, 궁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들은 역적의 자식이고, 노비의 신분이었다. 십대가 되어가는 경혜공주의 아들은 노비의 신분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열 살이 넘으면 궁에서 나와야 한다는 궁중법도에 따라 경혜공주의 아들은 얼마 후면 궁에서 나와 살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도망노비가 되어 쫓길 수도 있는 처지였다.


정희왕후는 경혜공주를 불러 이야기한다. 세조를 알현하고, 아이들의 노비 신분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라고. 하지만 경혜는 세조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가 아닌가. 세조를 알현하여 그를 왕으로 인정만 한다면 자신의 아이들이 면천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경혜공주는 힘든 결심을 하게 된다. 모성애라는 걸 가진 어머니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들과 함께 문안을 드리러 온 경혜공주를 보자 세조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몇년사이 경혜공주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자존심 강하게 살았던 경혜공주는 더이상 왕의 딸이 아니었고, 대역죄인인 지아비를 잃은 채 노비 신분이 된 가련한 여인일뿐이었다. 세조는 경혜공주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훗날 예종이 되는 아들에게 경혜공주의 두 아이를 연좌시키지 말라고 직접 전지를 쓰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경혜공주의 두 아이는 공식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경혜공주는 세조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 아닌지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세조를 대면하고 자식들이 면천 받은 후, 그녀는 공주의 신분을 회복 받고 세조가 준 집에서, 세조가 준 곡식을 먹고, 세조가 준 노비를 부리며 살게 되었다.

세조가 준 집에서 노비를 거느리고 곡식을 받아먹고 사는 것에 경혜공주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절에서 수행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으로 세조를 용서하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세조를 용서하고 인정한 것처럼 살아야했을 것이다.


그녀의 그런 노력 덕에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돈녕부 직장에 임명된다. 돈녕부 직장은 십대의 어린 나이에는 오르기 힘든 종7품의 높은 벼슬이었는데, 이는 정희왕후가 경혜공주를 위로하기 위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경혜공주의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줌으로써, 그가 노비가 아닌 양반임을 만천하에 공고한 셈이었다. 그 벼슬에 임명되자 조정대신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세조가 굳이 예종에게 전지를 쓰게 했다는 건,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예종도 죽고 어린 성종을 대신해 정희왕후가 섭정할 때인데, 정희왕후는 조정대신들의 강한 반발을 무시한 채 정미수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렇게 아들이 양반임을 확실하게 인정받자, 경혜공주는 이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후 7개월 만인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keyword
이전 04화정희왕후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