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 한씨는 수양대군, 즉 세조의 며느리이다. 조선 왕실의 며느리라면 왕비이고, 그렇다면 신덕왕후, 원경왕후 등 무슨 왕후라고 불려야 한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로 더 유명하다. 그녀가 실제로 왕비 자리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연산군의 할머니로 유명하기에 대비의 이미지가 강하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매정한 여인, 그로 인해 손자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불행한 여인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68년 인생의 극후반기에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불행한 죽음을 보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지 않다. 그녀의 그 이전의 삶의 모습은 매우 드라마틱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보여준 인내와 노력, 그리고 그 성과에서 배울 점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인생은 어땠을까?
<당대 최고 권력가 한확의 딸>
인수대비 한씨는 한확의 딸이다. 한확은 당시 명나라 황제와 사돈을 맺은 집안으로, 조선 왕실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확의 누이는 당시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공녀로 뽑혔다. 당시 공녀는 명나라 황제나 측근의 소실이 되었는데, 그랬기에 명에서는 좋은 가문에서, 미모와 기품이 뛰어난 여성을 원했다. 공녀라고 해서 한미한 집안의 아무 여성이나 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명에서는 나름 엄격한 심사를 통해 공녀를 뽑았는데, 특히 미모가 출중한 여성을 원했다.
공녀로 명에 가는 길은, 당사자로서는 앞으로의 낯선 삶도 두렵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힘든 일이라 매우 슬픈 일이었겠지만, 그 가족에게는 당장 주어지는 물질적인 보상부터, 더 나아가 집안을 일으킬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경사스러운 일면이 있었다.
한확의 집안 자체가 인물이 출중했는데, 한확의 누이 역시 굉장한 미인이었다. 미모와 기품을 갖춘 한확의 누이는 단숨에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에 책봉되었다. 그런 그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명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은 한확은 명나라의 칙사가 되었다. 명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황제의 총애로 명나라 칙사가 된 한확은, 조선 왕실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한확의 누이 여비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명나라의 순장 풍습에 따라 그녀가 모시던 영락제가 죽으면서 함께 순장된 것이다. 그녀가 명나라의 간 지 7년 만에, 이십대 중후반의 꽃다운 나이로 강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여비가 죽은 지 4년 뒤, 한확은 또다른 누이도 공녀로 보낸다. 여비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었던 명나라에서는 한확의 또다른 누이도 원했던 것이다. 이때 그 여동생은 언니의 최후를 보았기에 오빠에게 저항도 해보았지만, 끝내 공녀가 되어 조선을 떠났다. 하지만 떠날 때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명에서 4명의 황제를 거치며 57년 동안, 공신부인으로 불리며 큰 권세를 누리다 74세로 장수 후 죽었다. 훗날 인수대비는 이 고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무튼 이처럼 한확은 명나라 황제의 최측근의 친족으로 신임 받았기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도,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한확에게 계속해서 고관대작을 제수하였고, 아예 자신의 아들과 한확의 둘째딸을 혼인시켜 그와 사돈을 맺기도 했다.
그렇게 한확은 명나라 황실은 물론 조선의 왕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다. 그리고 인수대비는 그런 한확의 2남 6녀 중 딸로는 막내딸로 태어났다. 인수대비가 태어나던 해가 그녀의 언니가 세종의 아들과 결혼한 해이니, 인수대비는 당시 집안이 아주 잘 나갈 때에,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가졌던 아버지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한씨는, 당대 조선의 또 다른 파워 인물,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을 한다. 물론 그들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차기 왕권에 대한 야망이 있었던 수양대군은 당시 조선의 파워 인물인 한확을 놓치지 않았고, 명예욕과 재물욕이 컸던 한확 또한 수양대군의 손을 잡아 더 큰 야망을 실현코자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모두 성공했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켜 왕이 되었고, 한확은 왕의 사돈, 세자의 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찬탈에 불과했던 수양대군의 왕위를 명나라가 쉽게 승인해준 것은 사돈인 한확의 도움이 분명 컸을 것이다.
한씨가 도원군과 결혼할 때 나이가 17세였는데, 그녀 또한 시아버지가 왕이 될 것을 예상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서 이제 왕실 종친 집안의 며느리로, 그녀 인생의 부귀영화는 앞으로 더욱 보장된 듯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인생은 더욱더 찬란하게 펼쳐졌다. 한씨가 도원군과 혼인하고 열달이 안 되어, 야심가였던 시아버지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다음해 첫출산에서 아들을 낳은 그녀는 며느리로서의 역할도 다하고 있었다. 또 다음해 딸을 출산한 것을 보면 남편과의 사이도 좋았고 자식복도 있었던 그녀였다. 그리고 딸을 출산한 그해 시아버지는 결국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왕실 여인으로 살아갔을 그녀의 인생에서 또 다른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왕이 된 시아버지와 훗날 그 왕위를 이어받을 듬직한 남편과 또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강보에 싸인 귀한 아들과 함께, 위풍당당 거처를 궁으로 옮겼다. 그녀의 인생은 그 이전보다 더욱 탄탄대로일 것으로 보였다.
후덕한 성격의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착실한 며느리 한씨에게 관대했고, 그 둘의 고부관계는 평생 좋았다. 시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자상하고 온화했던 남편과는 금슬이 좋아서 혼인 후 계속하여 자식을 낳았다. 훗날 남편의 뒤를 이어줄 세손인 든든한 아들도 이미 낳았고, 딸을 출산한지 오래지 않았지만 또다시 임신도 했다. 또 그녀가 세자빈이 된 후로 그녀의 친정집도 승승장구하여 친정아버지 한확은 우의정이 되었다. 그렇게 다 가진 그녀는 모든 것이 완벽한 모습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어지는 것이 인생의 진리인 듯, 그녀의 인생에 예상치 못한 돌멩이 하나가 남긴 파장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다.
스무 살의 건장한 남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스무 살의 젊은이었고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지나가는 병환으로 여겼고, 그 무렵 둘째 아들을 출산해야 했던 한씨 역시 남편의 병환을 크게 대수롭진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한씨가 둘째 아들을 출산하기 3일 전에 의경세자는 병으로 피접을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그와 마지막이 되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녀의 남편 도원군(의경세자)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그녀가 둘째 아들을 출산한지 불과 한 달쯤 뒤의 일이었다.
그녀에게 남편의 죽음은 단순히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세자빈 자리는 물론, 궁에서의 보장된 모든 생활의 “끝”을 의미한다. 시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 그녀는 왕비가 되고, 그 뒤를 이어 큰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그녀는 대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당시 한씨의 큰아들은 네 살이었다. 이 아들이 남편을 대신해 왕세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세조에게는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있었다. 만약 한씨의 아버지 한확이 살아있었더라면 혹시 세자 자리가 한씨의 큰아들 것이 될지도 몰랐으나, 한확은 의경세자가 죽기 몇 달전에 이미 죽은 터였다. 한씨는 그녀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던 아버지와 남편을 거의 동시에 잃었고, 현실적으로 세자 자리는 한씨의 큰아들이 아닌 세조의 둘째 아들, 그녀에게는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세자와 세자빈 자리를 시동생 부부에게 물려주고,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어 궁을 나와야 했다. 네 살의 큰아들과 두 살의 딸, 그리고 생후 5개월이 된 막내아들을 데리고, 그녀는 남편의 사당을 지키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탄탄대로처럼 보였던 그녀의 삶이 일순 무너졌다. 이제 스물한 살에 청상과부가 된 그녀는 평생을 남편의 무덤을 지키며,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 그녀의 자식들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천더꾸러기가 되었으니 더욱 몸을 낮추며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그녀는 절망적인 삶을 견뎌내야 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보장되어 있던 최고의 삶도 모두 잃었지만, 그녀에게는 네 살, 두 살, 그리고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한씨가 그 좌절감을 쉽사리 이기기 힘들었겠지만, 어린 세 자녀를 가진 어미로서 어쩌면 그 절망적인 상황을 느낄 여유도 없이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살아있었더라면 훗날 왕이 되었을 그녀의 아들은 이제 왕권을 위협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존재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최대한 몸을 낮추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아가야 했다.
세조는 한씨의 아들들에게 독서를 일삼지 말라고 말했다. 세조는 큰아들의 아들들에게 너희가 할 일은 독서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인즉슨 왕권에 위협되지 않게 풍류나 즐기면서 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씨는 달랐다. 그녀는 원래도 학문을 중시했을 뿐더러, 특히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식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글공부를 시켰다. 이에 세조와 정희왕후는 그녀를 폭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수대비는 타고난 자질이 엄격하면서 반듯하였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에도 조금이라도 허물과 실수가 있으면 전혀 감싸주거나 봐주지 않고 바로 정색을 하고 꾸짖어 바로잡았다. 이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께서는 며느리를 폭빈(폭군 같은 며느리)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하셨다." <내훈>
세조는 한씨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월산대군을 글도 잘 읽지 못하는 무장 박중선의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한씨의 큰아들과 딸은 시아버지 세조의 뜻대로 혼사를 맺었다. 하지만 막내아들만큼은 더 권세 있는 집안과 혼사를 맺고 싶었다. 결국 한씨는 둘째 아들의 혼사에서는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한명회와 사돈을 맺는다.
그렇게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그녀는 이승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된다. 이미 시동생 예종은 왕이 되었고, 아들까지 낳아 차기 왕권도 보장되어 있었다. 이승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는지 그녀는 낫고자 하는 의지도 강하지 않았다. 그렇게 병색이 심한 상태로 1년을 앓았던 그녀는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녀의 삶에는 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개가 펼쳐졌다.
시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시동생 예종이 스무 살의 창창한 나이에, 한씨의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네 살이었기에 다음 왕위의 기회가 그녀의 자식들에게 돌아왔다.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당대 세도가인 한명회가 다음 왕권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씨의 둘째 아들, 열세살의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했다.
당시 자산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표면적인 이유는, 한씨의 큰아들 월산군은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셔야 하기에 예종의 양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산군이 한명회의 사위라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조부부의 암묵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를 한명회의 딸로 얻은 한씨의 노력과 결단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21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으나, 여전히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어린 자식들에게도 늘 단정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켰던, ‘글을 잘 알았고’ 효성스러웠던 며느리에 대해 정희왕후가 주는 보상이기도 했다. 결국 자산군의 왕위는 그녀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가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지 12년 만에, 그녀는 왕의 어머니가 되어 당당히 다시 입궁하게 되었다. 그것도 큰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 왕이 되어.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던 시동생 예종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이 일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식 교육에 힘쓰고, 세도가 집안과 혼맥을 맺어 둔 덕분이었다.
이제 그녀는 대비가 되었다. 예종의 비였던 아랫동서와의 서열 문제로 인해 그녀의 남편은 왕으로 추존되었고, 그녀는 왕비를 거쳐 대비가 된 것이다.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뒤를 이어 이제 명실공히 궁중서열 2위가 된 그녀의 인생이, 이제는 평안한 날들만이 계속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우리에게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그 이후의 일 때문이다.
<며느리 교육에 힘썼으나 쓸쓸한 말년>
성종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 한씨는 그 당시 기준으로 매우 어질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성종이 후궁을 들일 때이면 직접 옷을 지어 나누어 주었고, 당시 섬겨야할 시어머니가 세 분인 격이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자식도 없이 19세의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었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며느리였으며, 또한 인수대비도 좋아할만한 어진 성품을 지녔다. 공혜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해 성종이 공식으로 여러 후궁을 들일 때에도 투기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인수대비를 포함하여 정희왕후와 안순왕후(예종 비)에게 모두 효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크나큰 약점이 있었으니, 자식을 낳지 못했다.
아마 공혜왕후는 스트레스로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폭빈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그 시어머니를 포함하여 윗전을 두 분이나 더 모셔야했고, 여색을 좋아하고, 좋게 말하면 효심이 깊은, 나쁘게 말하면 마마보이인 남편에, 그 남편의 후궁들도 여럿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보통의 여성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이 왕비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길 바랬겠지만, 예종과 결혼한 딸도, 성종과 결혼한 딸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혜왕후는 병을 앓았고, 친정집으로 피접을 나가면 잠시 차도가 있었다가 다시 궁에 돌아오면 악화되기를 반복한 후, 결국 19세의 어린 나이로 죽게 된다.
공혜왕후의 죽음으로 왕비가 공석이 되자, 당시 많은 후궁들 중에서 왕비를 간택하고자 했다. 공혜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공식적으로 들어온 두 명의 후궁 중에서, 당시 임신 6개월이였고, 성종이 특히 총애한, 윤기견의 딸 숙의 윤씨가 왕비로 발탁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숙의 윤씨는 성종이 애지중지했고,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대비)도, 검소하고 삼갈 줄 아는 그녀를 현명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모두의 합의로 숙의 윤씨가 왕비가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이다.
인수대비는 유교적 덕목을 매우 중요시하는 인물로, 손수 <내훈>을 지어 며느리들을 교육시킬 정도였다.
성종은 후궁을 많이 들였기에 이전(세조, 예종)보다 내명부가 거대해졌고, 이에 인수대비는 성종의 치세를 위해서라도 며느리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또 여성도 남성들처럼 성인이 되기 위해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손수 책을 펴낸 것이다.
<내훈>의 내용을 두고 인수대비의 책 간행에 대해 축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내용은 현대를 기준으로 시대착오적인 것이지 당시로 봤을 때는 여성을 교육하기 위한 책 그 자체가 시대를 앞서는 일이었다. 여성을 교육하겠다고 책을 쓰는 일 자체가 매우 선구자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유학을 공부한 인수대비는 여자도 성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당시 성인은 남자만 될 수 있다는 가치관을 넘어서 여성도 성인을 목표로 공부를 해야한다는, 그 발상 자체가 이미 매우 선구자적인 것이다. 조선 후기에 임윤지당과 같은 여성 성리학자라 불릴만한 인물들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 시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지금처럼 책이 많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었고, 조선의 왕 중에도 책을 낸 이는 극히 소수이며 조선 초기에는 한 명도 없다. 그런 시대에 여성을 위한 책을, 여성이 썼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인 것이다. 특히 조선 왕비가 여성교육서를 낸 것은 인수대비가 최초이자 최후이다. 이후 혜경궁 홍씨가 글을 남겼지만 그것은 일기 형식의 수필이지 교육서가 아니다.
인수대비는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책을 낸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난 왕비였던 것이다. 그 내용을 이 시대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 책과 지은이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매체들은 인수대비를 폐비 윤씨를 몰아내는 데 온힘을 쓴 고약한 시어머니정도로 우리 기억에 각인시켜 놓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어린 아들 성종의 치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정희왕후가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거절하며 "글을 아는" 인수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는데, 이는 빈말이 아니다. 인수대비는 단순히 글을 아는 것을 넘어 성리학을 공부한 여인으로 성종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실질적으로도 성종의 치세를 도왔던 것이, 명나라에 공녀로 가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고모의 힘을 빌려 명과의 껄끄러운 외교문제도 유연하게 풀어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어쨌든 책을 간행할 정도로 글을 공부했고, 그 책의 내용처럼 자기를 절제하고 닦으면서 성인에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인수대비에게, 일찍 남편을 여의고 자식만을 바라보며 그 자식의 치세를 바라고 또 바랐던 인수대비에게, 폐비 윤씨는 눈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음은 틀림없다. 특히 성종의 첫째 부인이었던 공혜왕후 한씨와도 더욱 비교가 되었을 폐비 윤씨였다.
요즘 시대 기준으로 보면 폐비 윤씨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여성을 유교에 옭아매려는 시도가 한창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폐비 윤씨는 조선시대 여성들 치고는(성종 실록에 의하면) 감정적인 여인이었다.
폐비 윤씨는 사랑에 열정적이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남편 성종은 왕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성종이 그저 윤씨의 남편이기만 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은 극에 달했고, 그 싸움의 필연적 폐자인 윤씨는 결국 폐비가 되었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
그 과정에서 물론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의사도 당연히 반영되겠지만, 실록에서는 성종이 윤씨에게 정이 다 떨어진 듯 말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후대에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있었고 그 책임을, 오판을 한 남성(성종)이 아닌 고부간의 갈등으로 치부해버려, 우리는 폐비 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만 깊이 간여하고 있다고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의 죽음을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많다. 당시 인수대비보다 윗전이었던 정희왕후가 살아 있었고, 무엇보다 성종은 대간들과의 기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대간들의 기를 꺾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서 기어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까지 내린 것이다. 훗날 숙종이 왕비들을 이용하여 양당을 견제한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폐비 윤씨의 죽음은 단순 부부싸움이나 고부갈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대에 정희왕후도 성종도 죽은 마당에, 연산군의 복수는 살아있는 인수대비에 모두 향해버렸다. 그리고 후대의 우리는 폐비 윤씨를 살해한 책임을 인수대비에게 모두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폐비 윤씨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어쨌든 윤씨의 죽음 이후 성종은 그녀의 죽음을 100년 동안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이후 정국은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인수대비는 새로 들인 며느리 정현왕후의 극진한 효를 받으며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
이후 성종이 죽고,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성종의 뒤를 이어 성정을 펼쳤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으로 변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와 관련된 인물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묘에서 시신을 꺼내서 다시 처형할 정도로 그 복수가 처참하였다. 연산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아버지의 후궁들인 정 숙의와 엄 숙의를 죽이는 것에도 아주 잔인하게, 거침이 없었다. 이제껏 친모로 알았던 정현왕후에게 장검을 들이대기도 했고, 마침내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고도 하고, 처용무를 추며 인수대비를 놀라게 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연산군에 의해 놀란 인수대비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원한에 사무친 연산군은 친할머니의 장례를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도록 명한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상례기간을 단축하고, 제사를 행하지 않았고, 삼년상을 폐지했다. 그렇게 말년의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온갖 냉대와 핍박을 받으며 쓸쓸하고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후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사적인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고, 다른 왕비들에게는 다 있는 시책, 애책, 지문도 전해지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첨언>
인수대비는 명나라 공주가 반해버릴 정도로 미남이었던 아버지, 명 황제들의 사랑을 받았던 미모의 고모들을 닮아 아마도 미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왕실에서도 두려워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집안의 딸이었고, 어릴 적부터 한문과 유학을 공부하여 훗날 조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책을 간행할 정도로 지성미도 갖추었다.
마음이 후덕한 시어머니를 만나 평생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 시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자상하고 따듯했던 남편도 있었고, 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도 계속 낳을 수 있었다. 또 자식들 중에는 유교적 국가를 완성했다는 의미의 시호를 가진 똑똑한 아들도 있었다. 또 그녀의 아들이 성정을 베풀 수 있도록 시어머니가 도와주었고, 또 명나라에는 고모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갖추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모든 걸 다 가진 여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든 걸 다 거저 가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친정집안과 좋은 시어머니, 남편, 자식을 만난 것은 그녀에게 분명히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은 사람이다. 유학을 공부한 그녀는 여성으로서, 유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물인 군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노력 덕에 다른 행운들도 따라와 준 것이다.
탄탄대로처럼 보장된 미래가 남편의 죽음 앞에 산산조각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엄격했던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자신을 일으켰고, 자식들 교육에 더욱 힘썼다. 상황이 바뀌어 기회가 왔을 때에는 그 기회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 즉 아들의 치세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리고 성종의 치세에 그녀도 기여했음은 확실하다.
말년에 손자 연산군의 폭정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68년의 그녀의 인생은 쉼없이 달려왔고, 그녀의 생애가 주는 의미 또한 대단하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책을 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저술가이자 여성 교육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내었고, 후대에 기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녀의 불행한 말년에 대해 물론 그녀에게도 실책은 있다. 폐비 윤씨에 대해 가혹했던 점은 차치하더라도, 손자 연산군과의 관계에서도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
그녀는 평소 엄격한 성격 탓에 아마 손자 연산군에게 따뜻한 할머니이진 않았을 것이다. 연산군이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그의 모후가 폐위되었기에, 연산군은 피접처럼 궁을 나가서 세 돌이 지날 때까지 궁밖에서 양육되었다. 이후로도 궁안과 밖을 왔다갔다 했기에 사실상 인수대비가 어린 연산군을 돌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7-8세가 된 연산군에 대해서도 인수대비가 따뜻한 할머니로 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정을 느끼기는커녕 언제나 무언가 알지 못할 불편함이 느껴졌던 관계였기에 훗날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인수대비의 입장에서 한번더 변명을 해주고 싶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은 명나라를 왔다갔다하느라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집안의 대소사와 자식교육 등은 그의 부인이자 인수대비의 어머니인 홍씨가 도맡았을 것이다. 홍씨는 인수대비처럼 엄격한 성격이었다. 바쁜 아버지와 엄격한 어머니, 그런데 그 엄격한 어머니마저 인수대비가 열네살 때 죽는다. 인수대비는 부모의 따뜻한 정을 느낄 새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혼인 후 5년도 안 되어 사별했다. 역시 남편에게도 따뜻한 정을 오래 느끼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받아 본 사람만이 줄줄도 알 것인데, 인수대비는 그런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따뜻한 성품의 정희왕후나 효심이 깊었던 성종과는 궁합이 잘 맞았을 것이나, 감정선이 세심했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폐비 윤씨나 연산군은 합이 맞이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연산군은 어쩌면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할머니에 대해 복수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줄줄도 잘 몰랐던 인수대비는 대신 자신에게 맞닥뜨린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기는 했을 것이다. 유교적으로 이상적으로 판단되는 방식으로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롤러코스터같은 생을, 최대한 성실히 살아낸, 인수대비 한씨. 나는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추었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엄격했던 그녀가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