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는 성종의 왕비였고,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폐비가 되었고, 한때는 깊은 사랑을 했던 남편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여인이다.
왜 그녀가 폐비가 되어 사약까지 받아야 했는지에 대해, 사실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성종실록에 실린 내용대로 전적으로 그녀의 부덕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고, 현대에 와서 그녀를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하는데 온전히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그 중간의 어디 언저리에서 설명하기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조선시대의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그것도 부부간의 일이었던 그 사건의 진실을 완벽히 파헤치기는 어려울 것이고, 다만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당시를 추측해볼 뿐이다.
<간택후궁으로 들어오다>
가끔 드라마에서 보면 폐비 윤씨는 궁녀였는데 빼어난 외모로 성종의 눈에 띄인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것은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부인 공혜왕후 한씨가 왕비가 되고 5년이 지나도 임신을 하지 못하자, 후사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간택한 후궁이다.
후사를 목적으로 간택했다는 것은 왕의 어머니가 될 가능성을 염두한 것이므로, 외모뿐 아니라 가문도 보고, 성품도 봤다는 이야기이다. 폐비 윤씨는 세종 시절 집현전 교리였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지낸 윤기견과 그의 두번째 부인 신씨의 막내딸이다.
그런데 윤기견은 젊은 나이로 죽었고, 그에 따라 그의 가솔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윤씨는 어린 시절을 곤궁하게 살았다. 그녀가 간택후궁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당대 실력가였던 신숙주와 그녀의 어머니 신씨가 먼 친척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여부가 확실친 않지만 간택후궁은 그 정도의 연줄이 있어야 할만큼의 자리였다. 그녀와 함께 간택 후궁으로 들어온 다른 여인도 윤씨인데, 그녀는 파평 윤씨로 정희왕후 윤씨의 가까운 친척이다. 매우 권력가 집안이었던 파평 윤씨와 함께 간택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폐비 윤씨도 가문적으로 한미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종의 후사를 위해 간택후궁으로 들어온 두 여인이 19세의 폐비 윤씨와 12세의 파평 윤씨이다. 당시 성종은 17세였다. 당대 관례상 초야를 치르는 것은 15세 전후여야 했으므로 12세의 파평 윤씨는 어쩌면 후일을 위한 예비 장치였고, 현재는 19세의 폐비 윤씨만이 어엿한 간택후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폐비 윤씨가 간택후궁으로 궁에 들어올 당시는 그녀에게 모든 상황이 좋았던 것이다.
정비인 공혜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병색이 짙었고, 함께 들어온 후궁은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고, 후사를 목적으로 들어온 만큼 삼전(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대비)들도 그녀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또한 성종이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빼어난 외모에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두살 연상의 폐비 윤씨에게 성종은 금세 빠졌던 듯하다. 성종은 윤씨를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하늘도 그녀의 편이었는지 윤씨가 간택 후궁이 된지 1년만에 공혜왕후 한씨가 죽고 왕비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후궁에서 왕비가 되다>
공혜왕후의 상을 치르는 2년 동안에도 성종과 윤씨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드디어 공혜왕후의 상이 끝나고 새로운 왕비를 들여야 했는데, 새로 왕비를 간택하지 않고 후궁이었던 윤씨가 왕비로 승격되었다.
간택 후궁은 말 그대로 간택된 후궁이었기에 왕비자리에 올라도 무방할 정도의 가문이었고, 그 당시 윤씨는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윤씨가 임신 6개월이었다. 공혜왕후의 상중에도 둘은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당시의 성종실록 실린 정희왕후의 말은 윤씨가 왕비로 완벽하게 적임자임을 말해준다.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요, 나 또한 그가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만하다. 윤씨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내가 더욱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성종7년(1476년) 7월 11일
성종이 애지중지했고, 삼전도 좋게 보았는데, 왕비 자리를 사양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 검소하고, 남편은 높이고 자신은 낮추고, 사양할 줄 알고, 특히나 아버지가 이미 죽어 외척의 발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까지, 그녀는 왕비로서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듯했다.
그렇게 화려한 왕비 책봉식을 통해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4개월 뒤 낳은 자식은 아들이기까지했다. 이는 조선왕실에서 정식 왕비가 원자를 낳은 첫번째 경우이다. 그동안은 왕과 왕비가 되기 전에 사저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폐비 윤씨가 낳은 연산군은 아버지가 왕이고 어머니가 왕비인 상황에서 궁에서 태어난 최초의 적장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성종의 첫부인 공혜왕후 한씨가 오래도록 임신을 못해서 당시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근심걱정이 컸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폐비 윤씨의 아들 출산은 큰 경사이었고 왕실은 축제분위기였다. 실록에도 그때의 기쁨이 서술되어 있었다.
이렇게 왕비 윤씨는 남편 성종의 사랑과 윗전의 두터웠던 신임에 이어, 적장자까지 낳았으니 왕비로서의 입지를 아주 단단히 굳힌 셈이었다. 그런데 그 적장자를 낳고 겨우 4개월 뒤, 그러니 왕비에 책봉된지 8개월만에, 급작스럽게 그녀의 성격이 바뀌게 묘사된다.
<두 차례에 걸친 폐비 논쟁>
때는 왕비 윤씨가 주관했던 친잠례 행사가 치러진 바로 며칠 뒤였다. 친잠례는 왕실에서 왕비가 주가 되어 치르는 가장 큰 행사로, 왕비를 중심으로 내외명부 여인들이 함께 하는 행사인데, 그 화려했던 친잠례 행사를 통해 왕비 윤씨는 원자를 낳은 왕비로서의 위상을 다른 여인들과 세상에 다시 한번 공포한 셈이다. 그런데 그 친잠례가 치뤄진 며칠 만에 폐비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내가 당초에 사람을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중궁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원자가 있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할까? -성종8년(1477년) 3월 29일
정희왕후가 자신이 사람을 잘못보아 부끄럽다는 내용이다. 한편으로 정희왕후는 윤씨가 왕비자리가 공석일 때는 왕비가 되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 정도로 윤씨의 언행이 왕비가 되기 전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단시간에, 그러니까 왕비가 된지 겨우 8개월만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되었을까?
조선 시대 태교에 관한 기술들을 보면, 여자가 임신을 하게되면 성관계를 금기시한다. 스무살의 혈기왕성했던 성종은 당연히 왕비 윤씨가 아닌 다른 후궁을 찾았을 것이다. 후사가 많아야 왕실이 튼튼하다고 믿었던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두 명의 후궁을 더 들여주었고, 그 중 한 후궁이 총애를 받아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그리고 윤씨는 약간의 산후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다. 원래도 막내딸로 자란 성품도 있을 터인데, 산후우울증까지 겹친 것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왕비가 된 후로 남편은 다른 여인들만 찾고, 아들을 낳자 윗전들의 관심은 그 아들에게 쏠려버려 자신은 관심 밖인 그런 상황을 많이도 서운해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후궁에서 왕비가 된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녀의 친정은 그녀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그녀의 전후 왕비들을 보면 시할머니 정희왕후는 조선초 대단한 가문인 파평 윤씨, 시어머니 인수대비는명나라 칙사였던 한확의 딸,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로 남편을 왕으로 만들 정도의 가문이었다. 폐비 윤씨의 뒤를 잇는 정현왕후 윤씨 역시 정희왕후의 가까운 친적인 파평 윤씨였다. 그에 비해 폐비 윤씨는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집안은 궁핍할 정도였으니 아무런 친정 뒷배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진 것은 왕의 총애뿐이었는데, 그 총애가 다른 후궁을 향해 있었고, 그 총애를 받는 후궁은 왕비 윤씨를 대놓고 견제했던 것이다.
산후우울증을 겪는 중에, 부빌 언덕이라곤 남편의 총애뿐인 그녀에게, 그 남편의 총애를 가져가고 자신을 위협하는 후궁들의 모습을 왕비 윤씨는 참아내기 힘들었던 듯하다. 만약 친정집안이라도 든든했더라면 아들까지 낳은 마당에 그녀의 입지는 굳건했겠지만, 그녀는 그런 뒷배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들은대로 민간 주술 행위를 통해 성종의 후궁을 해치려하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성종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을 해치려 했던 그 사건이 발각되고, 그녀의 침실에서 독살에 쓰이는 약까지 발견된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과거 세종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주술행위를 한 것만으로도 폐빈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왕의 자식을 임신한 타인을 해칠 목적으로 주술행위를 했다는 것은, 또한 독약을 소지했다는 것은 당시로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왕비의 자질을 의심할만한 충분한 실책이었으며, 그 독약은 왕인 성종까지도 해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정희왕후는 성종의 어선 근처에 윤씨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다.
만약 주상이 편치 않을 때를 만나면 독을 어선(왕의 음식)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는 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성종10년(1479년) 6월 5일
그렇게 왕비 윤씨는 남편의 사랑과 윗전의 신뢰를 모두 잃은 상황이 되었으나 어쨌든 원자의 어머니였다. 왕손이 귀했던 당시에 폐비 윤씨가 낳은 아들만이 성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낳은 윤씨를 쉽게 내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비가 된 지 8개월만에 있었던 그때의 폐비 논쟁은 모든 죄를 윤씨의 몸종인 삼월이가 뒤집어쓰고 끝났다. 그리고 생후 1년정도 되었던 윤씨의 아들, 훗날의 연산군은 모후의 그런 면을 닮아서는 안된다는 왕실어른들의 뜻에 따라 피접의 명목으로 궐밖으로 보내 기르도록 했다. 이후 3년이 넘도록 연산군은 궐밖에서 자랐다. 윤씨는 피접 나가는 원자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그 사건 이후로 부부 관계는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윤씨도 어느정도는 자중했을 것이고, 성종도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왕비 윤씨는 둘째도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윤씨가 둘째 아들을 출산한 후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폐비 논의가 일어난다. 첫번째 폐비 논의가 있고 2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그 폐비 논의가 일어난 것은 그녀의 생일 다음날이었다. 윤씨의 생일날 또 큰 부부싸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날 성대한 잔치를 해주지 않은 것에 불만이었는데, 그날밤 성종이 자신의 처소가 아닌 다른 후궁의 처소에 든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그 두번째 폐비 논의가 나온 그 다음날 바로 그녀의 폐비가 결정되었다.
폐비 윤씨가 폐비가 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드라마에서는, 그녀의 생일날 다른 후궁을 찾은 남편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많이 그려지는데, 사실 그것은 실록에 있는 내용은 아니고 훗날 지어진 책 <기묘록>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런데 그 <기묘록>은 성종대가 아닌 인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이미 200년 가까운 뒤의 책이다. 당대였어도 구중궁궐의 일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몇백년 뒤에 서술된 책이 그다지 정확하진 않을 것이다. 즉 그 손톱자국 사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에서도 폐비 윤씨의 성정과 그들 부부의 파국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부부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실록을 통해서도 다수 확인할 수 있는데, "폐비 윤씨가 시비에게 "지금은 비록 네게 죄 줄 수 없더라도, 장차는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같은 마음으로 원자를 가르친다면 옳겠는가?" 라고 성종은 말했다. 부부싸움 후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 편지를 보내 "주상이 나의 빰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가 살겠다"고 했다.
성종은 아내 윤씨의 악행을 신하들에게 하소연(또는 고자질)하기를 다수였고, 폐비 윤씨 또한 왕인 남편이 자신을 때렸다고 주장하며 남편의 악행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혼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런데 왕손을 낳은 왕비의 발언으로는 다분히 경솔했다.
물론 실록에 쓰인 내용이니 성종의 입장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심지어 그 내용이 허위일 것도 의심해 볼 수는있다. 하지만 연산군 같은 폭군이 아니고서야 왕들도 그 내용을 볼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의 진정성을 믿고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폐비 윤씨는 왕비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정희왕후는 성종의 수라 근처에 윤씨가 접근하는 것도 금했다. 왕을 해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폐비의 사유로 충분한 일이다.
부부싸움의 원인을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 폐비 윤씨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성종인들 문제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 모든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어차피 그 싸움의 승자와 패자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간택후궁으로 궁에 들어온지 7년만에, 왕비가 된지는 3년만에 폐비되었다.
<끝내 사약까지 받은 이유>
그녀가 폐비가 되어 쫓겨나고 며칠 뒤, 둘째아들은 그녀도 모르게 죽었다. 그리고 폐서인 되어 사가로 쫓겨난 폐비 윤씨는 매우 곤궁하게 생활했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를 보내주었고, 훗날 그녀의 집에 도둑이 든 것을 안타까이 여긴 신하들이 그녀의 거처를 다시 돌봐야한다고 상소했을 때에도 성종은 이를 거절했다. 새로운 왕비로 정현왕후 윤씨가 책봉되었고, 정현왕후는 성종과 윗전들의 신임을 받으며 새로운 왕비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점차 잊혀져 갔다.
폐비 윤씨의 거취 문제가 다시 정치적 화두가 된 것은 그녀가 폐비가 된지 3년이 지난 시점이다. 연산군이 7세가 되자 그를 세자로 책봉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성종에게는 연산군이 유일한 적자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연산군을 왕세자로 책봉해야 했고, 그가 세자가 된다면 그녀의 모후가 되는 폐비 윤씨는 다시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이 되었을 때, 폐비 윤씨가 살아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성종은 고민했다. 지금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폐비 윤씨를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죽어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폐비 윤씨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왕의 어머니가 되어 정국을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 너무나 다분했다. 성종은 자신이 그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종은 자신의 전부인이자 아들의 친모를 죽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종의 생각과 폐비의 죽음을 더 부채질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폐비 윤씨를 두둔했던 신하들이었다. 지금은 성종이 권력자이지만, 훗날은 연산군이 지존일 것이다. 연산군이 왕이 된다면 폐비 논쟁 때 왕의 어머니를 보호하지 않고 폐비를 만든 책임을 신하들에게 물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차기 왕권에 대비해야했다. 많은 신하들이 폐비에 대해 대우를 높여야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성종은 차기왕대에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고자 폐비 윤씨를 두둔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 왕에게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와 같은 이치로 훗날 선조가 아들 광해군을 미워했고, 인조가 큰아들 소현세자를 미워했다. 성종 역시 벌써 어린 아들에 줄을 서려는 신하들의 모습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실록에 의하면 성종은 이렇게 말했다.
국모로서 행동하지 않아 이미 서인이 되었는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성종13년(1482년) 8월 11일
그간 신하들의 뜻을 잘 따라주었던 모범왕 성종은 이번에는 대간들의 뜻에 녹록히 따르지 않기로 했고,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처럼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까지 내리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가 다분히 숨어있는 것이다. 훗날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윤씨가 살아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국의 혼란을 걱정한 것, 그리고 늘 성종을 괴롭혔던 대간들에 대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한 것 등의 일련의 정치적 이유가, 남편이 아내를 죽이게 되는 사건이 된 것이다.
그렇게 폐비 윤씨는 19살에 간택후궁으로 들어와 후궁이면서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4년, 그리고 왕비였던 3년, 그 후 폐서인이었던 3년의 짧지만 강했던 삶을 살다가 죽게 되었다.
연산군은 그녀가 후궁에서 왕비가 되도록 해준 아들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폐비의 신분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었는데 그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했기에, 기어이 그녀의 목숨을 끊게도 만든 아들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 연산군 이야기>
성종은 백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함구하라고 했다. 하지만 지나간 권력자의 유언보다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신하의 욕망이 더 컸기에 연산군은 거의 즉위하자마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십년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쳐 서서히 권력을 독점한 후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참혹하게 감행한다. 즉 즉위초에 이미 연산군은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바로 어머니의 복수를 할만큼 강력한 왕권이 없었다. 연산군 즉위초의 십년간은 그 어느때보다 태평성대였다. 연산군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실행했고, 백성들은 그 어느때보다 편안한 시대를 살았다.
연산군이 폭군이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 못지않게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아버지 성종은 늘 대간들에게 치이며 정치를 했다. 성종은 첫 수렴청정을 받은 왕으로 십대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그늘 하에 살았고, 그 십대 기간에 아주 모범적으로 제왕수업을 받았다. 보통의 왕은 하루에 세 번 강연을 들어야하는데, 성종은 심지어 야간 강연을 하자는 신하의 청을 허락하여 하루 네번의 강연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려 6년간 이어졌다. 그처럼 성종은 위로는 할머니와 어머니, 또 아래로는 신하들의 지나친 간섭에 시달렸고, 또 그것을 착실히 잘 따르는 모범생이었으나, 그 때문에 늘 힘들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자란 연산군은, 열아홉의 어엿한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아버지처럼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보다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으킨 첫번째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김종직이 연산군의 증조부 세조를 험담하는 글을 지었다는 이유이지만 그 내면은 늘 아버지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에 반대했는 사간들을 휩쓸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당시 사간들은 왕의 의견에 거의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반대를 위한 반대인 듯, "전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라는 말들로 왕의 기를 꺾고자 했다. 조선은 군신이 함께 정치하는 나라였지 한순간도 왕 독재체재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신하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자 왕의 뜻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성종이 그것을 잘 받아들였다면 연산군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연산군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원했다.
어쨌든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쓸어버리니 더이상 그에게 반대할 자가 없었고, 그것은 남아있는 신하들에게 반면교사도 되었다. "아 조심해야겠구나 몸을 사려야겠구나"한 것이다. 그리고 더 어마무시한 갑자사화로 이제 거의 모든 사림세력들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그 강력한 왕권을 "향락"에다 다 써버렸다.
앞서 태종이나 세종 역시 왕권을 위해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과 연산군이 달랐던 것은 태종과 세조는 그 피바람 이후 얻은 왕권을 정치하는 데에 쓴 데 반해, 연산군은 향략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것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폐위된 왕으로 기록된 이유이다.
연산군의 성품이 폐비 윤씨의 성품을 닮아서 그렇게 폭군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그 유전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폐비 윤씨는 생후 1년만에 아들과 헤어졌다. 환경면에서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영향을 더 받으며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가 평생 신하들에게 억눌려 답답하게 산 것에 대한 반발로 자신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만이 아니라 성종의 아들이기도 하므로, 부모 둘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공평할 것이기 때문이다.
<첨언>
왕이 왕비를 죽인 사건, 이 폐비 윤씨 사건에 한 가지 이유가 아닌 다양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음은 당연하다. 폐비 윤씨의 왕비로서 부족했던 성정, 한미했던 친정 집안, 마마보이에 정력이 왕성했던 성종, 그랬기에 조선왕실을 통틀어 가장 많았던 후궁들, 모셔야했던 윗전이 많았고 매우 엄격했던 시어머니, 당시 대간들과 성종의 기싸움. 그 모든 것이 융합되어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 와중에 폐비 윤씨의 성정이 조금더 온화하고 현명했더라면 그녀의 운명이 달라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주어진 다른 조건들이 매우 불리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분히 정치적 자리인 왕비의 삶에 대해 조언해주고 든든하게 뒤를 지켜줄 친정이 없었음이 보다 큰 취약점이었고, 그 와중에 보통의 왕들보다 더 혈기왕성했던 남편과 그 혈기왕성함을 지지했던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그래서 다른 후궁들에게도 여지를 줄 수 있었던 분위기 등이 한데 어우러져 폐비 윤씨를 감정적으로 벼랑끝으로 몰아 넣은 것은 아닌가 한다. 즉 폐비 윤씨 한 개인이 어떻게 대처하기에는 그 상황들은 너무 거대했고 그녀가 가진 조건들은 너무 취약한 조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만 설명하기에는 그녀의 성정에도 분명 문제는 있었다. 폐비 윤씨 윗대의 왕비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남편이 왕이 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던 원경왕후는 왕비가 된 후 남편의 많은 후궁과 친정집안이 풍비박살나는 것을 보고도 참아야 했고, 세종의 비 소헌왕후 역시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집안이 풍비박살났고, 그것을 그저 관망했던 남편을 참아내야 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세종은 그의 첫 며느리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하는 주술행동조차 용납하지 않고 폐서인시켰다. 또한 그녀보다 먼저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는 폐비 윤씨가 후궁으로 들어올 때 직접 옷까지 만들어 하사해주며 후사를 낳아줄 것을 독려했던 여인이었다. 그 왕비들의 행동이 옳고 윤씨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은 그 시대를 살던 모든 여성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이었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조강지처도 아니었고 왕비가 된지 겨우 1년 남짓에, 성종은 혈기왕성한 왕이었고 왕실에서는 성종의 후사를 많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폐비 윤씨가 좀더 냉정하게 상황 파악을 하고, 좀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다른 결과를 기대해 볼 법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자를 낳았다는 엄청난 자부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 봤을 때 도가 지나쳤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시대에 견주어 그녀를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또는 여성의 권리를 찾기위해 시대를 앞서나갔던 선구자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녀가 왕비로서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내라는 말이 있다. 왕비라는 자리는 단순히 아내의 자리가 아닌 매우 정치적인 자리이다. 폐비 윤씨는 그 무게를 견딜 성정이 되지 못했고, 성종과의 부부관계를 정치적인 관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왕과 왕비는 그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보다 정치적인 관계임을 그녀가 수용했을 때에, 그녀도 왕비 자리를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성종이 왕이기보다 남편이기를 바랐으므로, 그녀도 왕비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폐비 윤씨 사건은 그녀 자신의 왕비로서는 모자란 성정과 다양한 상황들, 그리고 정치적 이유까지 합세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극은 더 큰 비극을 낳아 연산군의 폭정과 그로 인한 사림세력의 몰락으로 조선의 유교정치가 후퇴하는 결과까지 낳게 되었다.
만약 그녀의 아들이 성군이 되었더라면 그녀를 측은지심으로 보아 복위될 여지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아들이 희대의 폭군이 되었기에 그녀에게도 더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삼종지도의 세계에서 여자는 아들을 따라야했으니 말이다.
<정현왕후 윤씨 이야기>
폐비 윤씨와 함께 간택 후궁이 되어 들어온 정현왕후 윤씨는 모든 면에서 폐비 윤씨와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친정집안부터가 두 사람은 큰 차이가 있었는데, 폐비 윤씨가 아버지 없는 편모슬하의 가난한 집 딸이라면, 정현왕후 윤씨는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가까운 친족으로 세도가 집안이었다.
19세의 나이로 성숙미를 뽐냈을 폐비 윤씨와 달리 초야도 치를 수 없었던 12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와 인수대비로부터 착실히 교육받았던 정현왕후는 인수대비의 가르침대로 투기하지 않았고, 매사에 순종적이었으며,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성종은 정현왕후를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만나 마음이 편안하다"며 칭찬했고, 훗날 인수대비는 정현왕후와 함께 불교경전을 출판할 정도로 고부간의 관계는 좋았으며, 인수대비가 죽고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상을 비정상적으로 짧게 해치울 때에 정현왕후만이 항의할 정도로, 정현왕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시어머니에 대한 효가 극진했다.
또한 연산군이 정현왕후를 친모로 알고 클 정도로, 정현왕후는 의붓아들에게도 온화하고 사랑을 주는 어머니였다. 훗날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에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까지 쓰러뜨릴 때, 계모인 정현왕후 침전에도 장검을 들이대었는데, 정현왕후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것은 정현왕후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기보다 연산군을 믿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연산군이 친모로 알고 클 정도로 그에게 잘했기 때문에 설마 죽이지는 않을거라는 믿음, 그 정도로 정현왕후는 모든 면에서 순리대로 살았던 듯하다.
정현왕후인들 남편 성종의 심한 여성편력이 달갑기만 했을까, 자신의 친아들인 진성대군을 위협했던 의붓아들 연산군이 그리 사랑스럽게 보였을까마는, 정현왕후는 남편도 의붓아들도 다 인내했다.
남자 여자라는 구분에 앞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때론 인내하고 넘어가는 과정도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다. 폐비 윤씨가 정현왕후에 비해 왕비를 유지하기에 취약한 조건이었음은 맞지만, 폐비 윤씨가 인내하는 삶이 부족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현왕후가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것처럼, 그녀의 아들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왕위를 이어받아 중종이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두 여인은 함께 간택후궁으로 들어왔는데 결과적으로 폐비윤씨의 왕비자리는 정현왕후가, 연산군의 왕 자리는 중종이 이어받는 기묘한 인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