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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by SOL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이 세 명의 왕비는 모두 중종의 비이다. 한명 한명 살펴보는 것이 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지만, 그러지 못하고 세 왕비를 한 파트에서 서술해본다.


왕조에서 왕을 낳는 역할을 하는 왕비는 그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 왕이 여러 왕비를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국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두 명 이상의 왕비가 있었던 경우를 살펴보면 쉽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에게는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 두 명의 비가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가 신덕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세자가 바뀌게 된다. 이는 단순히 왕자들만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지세력들인 신하들까지 모두 숙청된다는 의미에서 크나큰 정치적 파란이다.

성종의 비도 세 명이었는데, 후사 없이 죽은 공혜왕후 한씨의 뒤를 이은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윤씨의 경우, 연산군은 폭군이 되어 많은 이들을 죽였고, 그 뒤를 이은 중종 역시 사화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데 죽은 사람 숫자로만 보면 형인 연산군때보다 더 많다. 즉 연산군대부터 중종대까지 일어난 수차례의 사화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화의 원인을 왕비가 바뀐 것으로 전부 돌릴 순 없지만 그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연산군이 일으킨 두 차례의 사화가 그 어미의 복수를 명목으로 했던 점, 그리고 이복형으로 인해 겁많은 성격이 된 중종이 신하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일어난 사화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두 명의 왕비였던 것과 그 사화들이 아주 관련 없지는 않다.

또 선조대의 의인왕후 박씨와 인목대비 김씨 두 명의 왕비였던 때에도 광해군이 후비 인목대비를 폐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고, 또 그로 인해 광해군까지 폐위되었으니, 두 명의 왕비일 경우의 잡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더 훗날 숙종의 경우 세 명의 정비를 두었는데, 세 정비 모두에게 아들이 없었지만, 숙종대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극의 가장 많은 소재가 되었을 정도로 부침이 많았다.

이처럼 왕비가 바뀔 때마다 왕의 측근세력이 바뀌게 되고 정국 또한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중종의 왕비가 세 명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일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단경왕후 신씨>


중종의 첫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7일의 왕비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그 사연이 애틋하여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중종과의 사이가 굉장히 로맨틱하게 그려졌던 걸로 아는데, 실제로도 그러했을까?


짧지만 강렬했던 중종과 함께했던 7년의 삶, 그리고 지리하게 길었던 그녀 혼자만의 50년의 세월. 안쓰러운 그녀의 삶을 누구 하나라도 더 기억해주는 것으로 그녀를 위로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써본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과 중종(당시의 진성대군)은 12살 차이로, 연산군이 19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 진성대군은 7세의 코흘리개였다. 당시 어린 아이였기에 궁에서 연산군과 함께 생활했고, 진성대군이 12살이 되어 혼인하고 나서야 궁을 나왔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친아들의 목숨을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의 목숨을 위한 안전장치로 며느리를 들였다.


그리하여 선택된 며느리가 단경왕후 신씨이다. 그녀는 연산군이 매우 신뢰했던 신하이자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었다. 즉 연산군의 비 신씨와 단경왕후는 고모조카 지간이 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최측근으로 당시 좌의정을 지내기도 했던 신수근의 딸을 며느리로 들임으로써 진성대군(중종)의 목숨을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정현왕후의 계산대로, 폭군 연산군은 자주 진성대군의 목숨을 위협했지만 끝내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진성대군이 신수근의 딸과 결혼한 것이 그 전부의 이유는 아니겠지만, 분명 그의 덕을 봤을 것이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이 있던 밤, 반정공신 박원종 등은 신수근을 찾아가서 물었다. "딸이 중합니까 누이가 중합니까" 그에 대한 답으로 신수근은 "신하된 도리로 어찌 왕을 몰아낼 수 있단 말이오. 세자가 총명하니 조금더 기다려봅시다." 라고 답할 정도로 연산군을 싸고 도는 인물이었다. 그날밤 신수근이 딸이 중하다고 하며 그 반정에 참여했더라면 단경왕후의 삶도 바뀔 수 있었을까? 어쨌든 신수근은 끝내 연산군을 배신하지 못했다. 신수근이 연산군에게 충성하는만큼 연산군도 신수군을 총애하고 신뢰했을 것이다. 그러니 중종은 그동안 신수근의 딸인 신씨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도 아내 신씨 덕을 봤을 진성대군(중종)은, 반정이 일어난 그 밤 실제로 아내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늘 연산군 때문에 숨죽여 살아야 했고, 겁이 많았던 진성대군은 반정세력들이 자신의 집을 포위하자, 연산군이 보낸 군사인줄 알고 자결하고자 했다. 당시 연산군은 잔인한 고문을 하기로 유명했는데, 진성대군은 그 고문을 받고 죽느니 차라리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자결코자 했던 것이다. 그때 아내인 신씨가 진성대군을 만류하며, 말의 머리가 바깥을 향하고 있다면 우리를 헤치려는 것이 아니니, 그것이라도 확인하고 자결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확인해보니 과연 말머리가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성대군은 그날밤 왕으로 추대되어 입궐하게 되었다. 그날만 하더라도 진성대군은 신씨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다.


형인 연산군이 정치를 잘했더라면 왕과는 거리가 있었던 진성대군이 왕이 되었으니, 그 새로운 왕에 대해 왕이 되어 마땅하다는 멋진 일화들이 많이 소개되어야할 터인데 왜인지 진성대군의 어린시절에 대한 일화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는 모두 진성대군이 무척 겁많고 소심하고 나약했던 모습을 추측하게 한다.


김시양의 <부계기문>에 진성대군의 이야기가 나온다. 연산군이 진성대군을 데리고 사냥을 갔는데, 사냥이 끝나자 연산군은 진성대군과 말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사냥터에서부터 궁궐까지 누가 먼저 가는가 하는 시합이었고, 연산군은 그 시합에서 진성대군이 진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준마를 타고 있었던 연산군에게 매우 유리했던,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그런데 진성대군이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이겨야 했다. 연산군은 진성대군을 죽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때 진성대군은 크게 두려워했다. 그냥 두려워한정도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딱할 정도로 두려워했고 한다. 아마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우 벌벌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런 진성대군을 딱히 여기고 한 신하가 진성대군을 태우고 빨리 달려서 연산군보다 먼저 궁궐에 도착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다른 이야기가 앞서 말했던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었던 반정당일 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에서도 진성대군은 군사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자결하려던 모습이었다. 두 일화 모두 진성대군이 상황판단을 명확히 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약한 모습을 하고 있고 주위사람의 도움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진성대군은 순종적이고 유순한 성격의 어머니 정현왕후를 닮아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이었는데, 거기에 열두살 많은 폭군 이복형을 두게 되면서 그러한 성격이 점차 겁많고 소심한 성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진성대군에게 한 살 연상의 신씨는 너른 품이 되어주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의 목숨도 지켜주었던 것이다.




반정공신들에 의해 택군된 진성대군은 그날로 입궐했고, 다음날 신씨도 입궐했다. 중종이 왕이 되었으니, 어서 신씨도 왕비로 책봉해야 했다. 그런데 신씨의 왕비 책봉을 반정공신들은 반대한다. 반정공신들은 반정당일 끝까지 연산군 편에 섰던 신수근을 그날로 살해했다.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훗날 복수할까 두려워 신씨를 내쫓을 것을 왕에게 건의, 아니 명령한 것이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에 있습니다. 만약 중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그러나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로 볼 때 어찌하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하였다.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속히 하성위 정현조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라."-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1506년) 9월 9일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한마디로 허수아비 왕이었던 중종은 "그러나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느냐"는 한마디 저항 후 "종사를 위해 내치겠다"하며 바로 왕비의 폐출을 결단했다. 그나마 좋은 집을 수리하여 살게 하는 것이, 그동안 자신의 목숨을 보장해주었던, 꽤 부부간의 정이 두터웠다던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는 마지막 배려가 되었다.

그렇게 단경왕후 신씨는 7일간 궁에 머물다가 사가로 내쫓겼다. 열세 살의 나이에 한 살 연하의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7년간 부부의 연을 맺고 쫓겨난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었다.


중종이 조강지처인, 부부간의 정도 두터웠다는 아내 신씨를 왜그토록 쉽게 내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조선시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들을 살펴보면, 태종, 세조, 인조는 모두 그 반정의 주역들이었다. 태종과 세조는 완전히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이룬 반정이고, 인조의 경우도 태종과 세조에 비해서는 미미하지만 어쨌든 반정의 계획부터 대신들과 함께하며 그 반정을 이뤄낸 것이다. 그런데 중종의 경우는 반정 자체도 알지 못한 상황에서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것이다. 태어나 내내 연산군의 눈치를 보고 살았던 중종이었기에 무서운 반정공신들 앞에서도,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던 조강지처조차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게 중종의 입장도 한 번 생각해보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아내인 입장인지라 왕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아내를 포기한 중종이 야속하게는 느껴진다.

또한 그녀가 반정공신들에 의해 그렇게 쉽게 폐비된 데에는 결혼생활 7년동안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아들은 물론이고 딸도 없었기에 반정공신들은 더 쉽게 그녀를 내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무 죄도 없었던 그녀는 남편이 왕이 되면서 강제로 이혼당하게 된 셈이다.




당시 최고의 권력가였던 신수근의 딸로 태어나 열세살의 나이에 진성대군과 혼인한 신씨는 결혼생활 내내 아주버님 연산군의 폭정을 보면서 혹시나 남편에게 해가 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한 삶을 끝내게 해준 반정이 이루어지고 남편이 왕으로 추대되던 그날 밤, 그녀는 동시에 친정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들어야 했다. 남편이 왕이 되었으나 친정집안은 몰락한 것이다. 그리고 입궁한지 7일만에 그녀마저 내쫓기게 되었다.


야사에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는 남편에게 "상감의 자리만 확고하다면 신첩이야 어디 간들 무슨 대수겠습니까?"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중종은 끝내 내친 것이다. 세종대에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 집안을 풍비박살내고 세종의 아내였던 심씨까지 폐서인될 위기에 처했을 때, 세종은 장인은 구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내는 끝까지 지켜냈다. 그런데 허수아비 겁쟁이 왕이었던 중종은 자신의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신씨는 중종반정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아버지와 친정집안, 그리고 남편마저 모두 잃게 된 것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었던 그녀가 중종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신씨가 폐출된 후 중종은 잊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나갈 때 탔던 말을 신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신씨는 그 말에게 죽을 쑤어 먹이며, "짐승인 너는 만날 수 있는데, 상감은 왜 못 오신단 말이냐. 맛있게 먹고 상감을 잘 모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헤어진 초반에는 중종도 신씨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비슷한 이야기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 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서울지명사전> 중


그처럼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정공신들에 의해 헤어진 후 서로를 깊이 그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그리움이 중종은 오래가지 못했다. 슬프게도 중종과 단경왕후의 로맨스는 그걸로 끝이었다. 중종은 이후 단경왕후를 잊고 미인으로 소문난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한 중종을, 신씨는 믿고 기다렸을 것이다. 중종이 힘이 생기면 언젠가 자신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 기대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 기회가 왔다. 두 사람이 헤어진지 십년이 다 되어가던 때, 신씨의 뒤를 이어 중종의 부인이 된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게 되자, 다시 왕비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한 많은 세월을 참고 기다렸던 신씨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더구나 많은 사림세력들이 죄없이 폐비가 되어 쫓겨났던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또한 그때는 이미 핵심 반정공신 세 명이 모두 죽은 상태였고, 중종도 왕으로서 어느정도 힘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중종의 뜻만 확고하다면 충분히 복위시키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종은, 신씨의 복위를 주청한 상소를 올린 이들을 벌하고 유배보내버렸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씨가 왕비가 되어 아들을 낳게 되면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이유는 당시 중종이 사랑했던 후궁인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벌써 신씨를 잊은지 오래이고, 새로운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중종이 심히 사랑했던 경빈 박씨는 너무 가문이 한미하여 도저히 왕비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중종은 신씨도 박씨도 아닌 새로운 왕비를 들이기로 했다.


아마 이때를 마지막으로 신씨도 복위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지 모른다. 이미 헤어진지 십년의 시간이 지나 삼십을 눈앞에 둔 신씨를 중종은 잊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당시 반정 삼대장이 모두 죽은 상황이었고 그녀에 대해 복위 상소까지 있었던 마당에, 중종이 세자를 이유로 그녀를 복위시키지 못했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예우해주었을 수 있었다. 그러나 38년의 재위기간 동안 중종은 한번도 신씨를 부르지 않았고, 사가에 내쫓긴 그대로 어떤 예우도 해주지 않았다.

중종이 죽기 전에 신씨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록에서는 신씨가 아니라 여승을 불러다 기도를 드린 것이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중종이 신씨를 잊지 않고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중종이 신씨를 그리워한 흔적이 기록상으로는 전혀 없다.


그녀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을 때에도 그녀는 시호 없이 단순히 신비(妃)라고만 불렸다. 그녀가 죽을 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신씨가 죽자 그녀가 살던 집을 폐비궁으로 승격시켰는데, 그것이 아버지 중종의 조강지처였던 신씨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예우였다. 신씨는 남편이 아닌 아버지 신수근 묘 옆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120년만인 현종 대에 폐비 신씨의 신주나마 위로해주자는 상소로, 신수근의 5대손 신희의 집으로 신씨의 신주를 옮겨 제사지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다가 영조 15년에 마침내 억울하게 폐비된지 232년만에 신원되어 단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죽어서도 중종 옆에 갈 수 없었던 그녀가 200년도 더 지나 중종의 왕비로 복위된 것이다.




중종과 함께 한 7년의 세월과 이후 다시 부르겠다는 그의 약속을 기다리며 살았던 10년의 세월, 이후 복위의 희망을 버리고 살았을 40년의 세월까지, 그녀의 한 많았을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녀는 자신의 고모이자 연산군의 비로 폐비가 되었던 폐비 신씨와 함께 생활했는데, 그 두 여인은 한때는 연산군의 최측근으로 조정을 장악하며 드높은 권세를 떨치던 집안의 딸들이었고, 또 한때는 왕의 부인인 왕비들로 살았으나(비록 단경왕후는 7일에 그쳤지만), 지금은 둘다 폐비가 되어 몰락한 친정으로 돌아와 함께 생활했던 것이다. 그 두 여인의 모습에서 부귀영화가 한낮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또 한편으로 신씨는 71세까지 장수하였는데, 왕비의 삶이 아닌 그저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게 되어서일까? 어쩌면 스트레스가 많았을 왕비의 삶이 아니었기에 그리 장수할 수 있지 않았나도 생각해본다. 이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도 그랬는데, 정순왕후는 18살의 나이로 폐비되어 정업원에 들어갔는데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녀들이 오히려 그런 담담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만은 편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장경왕후 윤씨>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가 폐출되어 왕비 자리가 비게 되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해야 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 새 왕비를 간택하는 일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며, 여러 후궁을 들여 겪어본 뒤에 왕비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반정공신들은 자기 친족에서 후궁을 들여보냈다.


그 중 반정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원종은 두 명의 후궁을 들여보냈는데 한 명은 자신의 외조카인 윤씨였고, 한 명은 미모가 특출나게 뛰어나 연산군대에 흥청이로 선발되었던 박씨를 양딸로 삼아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박원종의 외조카였던 윤씨는 당시 유명한 명문가 집안의 여식이었다. 그리고 양딸로 삼은 박씨는 연산군 시대에 미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해 흥청이가 되어 들어왔는데 바로 연산군이 폐위되는 바람에 그 미모를 펼칠 기회를 잃은, 여튼 미모로는 특출난 이였다. 그렇게 박원종이 들인 두 명의 후궁은 그의 계산대로, 낮에는 명문가 여식으로 왕비가 된 윤씨가 궁궐의 안주인이었고, 밤에는 미인 박씨가 중종을 지배하게 되었다.


잠시 박원종에 대해 살펴보면, 박원종은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지낸, 무술에 특출났던 박중선의 외아들로 그의 무장기질을 잘 이어받았다. 박원종 집안은 왕실과도 사돈지간이었는데, 그의 첫째 누이가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과 혼인하였고, 막내 누이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혼인하였다. 1남 7녀 중 외아들이었던 박원종은 집안의 명성처럼 승승장구했다. 그는 성종대 뿐만 아니라 연산군대에도 요직을 차지하다가 돌연 중종반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 이유가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던 큰 누이 박씨와 관련이 있다.


박원종이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이 위험한 거사를 결심한 이유가 누이 박씨가 연산군에게 겁탈 당한 데 대한 복수라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연산군과 그에게는 큰어머니였던 박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처음 연산군과 박씨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자식이 없었던 큰어머니 박씨에게 연산군이 아들의 양육을 부탁하면서부터이다. 그 후로 연산군은 박씨를 자주 입궁시켰고, 그렇게 박씨와 연산군이 자주 만나면서 박씨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던 박원종도 연산군 대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박원종이 몸이 아픈 누나 박씨에게 약을 먹고 죽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대해 박씨가 연산군에게 겁탈 당해 임신하자 박원종은 누나에게 약을 먹고 죽으라고 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그리고 박씨 부인이 정말로 죽게 되자, 화가 난 박원종이 누이의 복수를 위해 거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중종반정을 일으킨 데에는 누이 박씨가 관련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장경왕후 윤씨도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인연이 있는데, 장경왕후에게 그 박씨는 큰이모가 된다. 즉 장경왕후의 어머니와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자매지간이었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어머니가 일찍 죽자,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여동생의 딸이었던 장경왕후도 양육했던 것이다.


다시 장경왕후로 돌아와서, 그녀는 외가인 박씨집안뿐 아니라 친가쪽도 대단한 명문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윤여필이었고 대대로 판서를 지낸 집안이었다. 이렇게 부모 양쪽이 모두 대단한 집안이었고, 특히 외삼촌이 반정의 핵심인물이었던 만큼, 여러 후궁들 중에서 그녀가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그녀는 집안 뿐 아니라 성품도 좋았기에 그녀가 왕비로 있는 동안 내명부는 별다른 분란없이 잘 운영되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왕비는 되었지만 당시 중종이 흠뻑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던 여인은 따로 있었으니, 미모로 유명했던 후궁 박씨였다. 중종은 후궁 박씨를 몹시 총애했지만, 그 집안이 몰락 양반이었고 박씨의 아버지는 한낮 병사일 정도 가문이 한미하여 끝내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장경왕후는 비록 왕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왕비로서 잘 처신했기에, 분란이 있을법도 했던 내명부를 잘 이끌었고, 중종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신뢰는 얻으며 왕비로서 제몫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낮에는 장경왕후가 밤에는 경빈이 주가 되는 내명부 운영이 거의 십년간 잘 유지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훗날의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장경왕후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중종과 혼인한지 9년만이었다. (이때 유명한 대장금이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간호해준다.)


장경왕후 윤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큰 고생 없이 왕비자리에 올랐고, 왕비가 된 후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던 왕비였다. 남편이 함께 들어온 후궁에게 빠져 자신은 본체만체 했을테니 그녀인들 속이 편했을까만은 그래도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묵묵히 살아내었다. 하지만 귀한 아들을 낳고 일주일만에,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게 된 것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왕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녀의 아들도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계모의 핍박을 받아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짧은 생을 살아간 그녀와 훗날의 그녀 아들까지 생각하니, 짧고 아팠을 그녀의 삶이 더욱 가슴 아프다.





<문정왕후 윤씨>


장경왕후의 죽음으로 또다시 중종의 왕비 자리가 비게 되었다. 신하들 중에는 죄없이 억울하게 폐비된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세자 문제와 여전히 조정에 남아있었던 반정세력들 때문에 여의치 않았고, 중종이 사랑했던 경빈은 출신 성분 때문에 왕비가 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해야 했다.


새로운 왕비의 조건은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인 세자를 친모처럼 잘 돌봐줄 여인이어야 했다. 야심이 많았던 경빈 박씨로부터 세자를 지켜줄 왕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경빈은 자신은 왕비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아들 복성군은 세자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세자의 외삼촌으로, 세자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윤임은 자신과 같은 파평 윤씨 가문이되, 집안은 한미하여 권력이 없는 여인을 물색했다.


당시 최종 간택된 이조판서를 지낸 파성군 윤금손의 딸과 당시 6품관에 불과하던 윤지임의 딸 중, 보다 한미한 집안이었던 윤지임의 딸을 윤임이 적극 지지하니, 그녀가 훗날의 문정왕후 윤씨이다. 즉 문정왕후가 왕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미한 집안의 파평윤씨였기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의 지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윤임의 지지로 왕비가 된 문정왕후의 왕비로서의 소임은 세자를 잘 보필하는 것이었다.


윤임에게는 매우 다행이게도 문정왕후는 결혼하여 17년간 딸만 넷을 내리 낳게 된다. 문정왕후도 아들을 낳고 싶었겠지만 딸만 낳게 되었고, 남편의 사랑은 여전히 후궁들에게 향해있었으며, 집안조차 한미했기에,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으로 세자의 보호자 역을 자처했다.

말이 문정왕후가 세자의 보호자이지, 실제로 세자가 문정왕후의 방패막이자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딸만 넷을 내리 낳는 그 17년의 시간동안 그녀는 세자의 어머니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단경왕후의 사례에서 보았듯 강력한 힘을 가진 신하들에 의해 자신도 폐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또 아들을 낳을까봐 걱정하는 윤임의 견제 속에서 문정왕후는 세자의 충실한 보호자역을 자처하며, 강력한 조정대신들과 노련한 후궁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17년만에 당시로서는 매우 노산의 나이인 35세의 나이에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이제 카드를 바꿔든다. 더이상 장경왕후의 아들의 보호자가 아닌, 자기 아들을 세자로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문정왕후는 그 17년동안 겪은 수모와 굴욕을 차곡차곡 쌓아 복수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형제 윤원로, 윤원형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고, 윤임과는 최대의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윤임은 자신이 왕비로 선택했던 문정왕후가 이제 최대의 적이 되었다. 그리고 조정은 세자와 윤임을 지지하는 대윤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과 그녀의 남동생을 지지하는 소윤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정국이 이렇게 되는 동안 중종은 뭘 하고 있었을까? 그는 그의 이름처럼 중용만 지켰다. 늘 그렇듯 중종은 관망한다. 자신이 왕이 된 것도 관망하다가 얻어 걸린 것이고, 왕이 되어서도 처음에는 반정공신들이 정치하는 것을 관망했고, 훗날에는 사림세력들이 정치하는 것을 관망했다. 그렇게 관망하다가 그들끼리 싸울때면 어느 한 손을 들어주어 나머지 한쪽은 싹 다 죽게 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사화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연산군 때보다 더 많았다. 세자 자리를 두고 두 사돈이 싸우는 것도 중종은 관망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의 아들을 지지하는 대윤과 문정왕후의 아들을 지지하는 소윤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도 중종은 그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중종이 갑자기 죽게 되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효자였던 인종은 아버지의 죽음에 지나치게 슬퍼하고, 새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심한 처사들에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져, 조선시대 왕 중에서 최단 재위기간인 9개월의 재위를 하고 죽게 된다. 만약 중종이 좀더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해주었다면 아들 인종이 그리 단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훗날 다른 아들 명종도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종의 우유부단함이 그 아들들의 비극을 가져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잠시 인종과 그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세자였던 인종은 문종 이후 최고의 세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몸가짐이 바르고 학문에도 열성적이었고, 매우 효자였으며 형제간의 우애도 깊었다. 아들 뻘인 이복동생 경원대군을 몹시 사랑했고, 자신을 해치고자 했던 작서의 변으로 사약을 받은 이복형제 복성군의 딸과 여동생을 사면해달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효심 또한 매우 깊었는데, 그로 인해 그는 단명했을 정도이다.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동궁전 화재 사건에 관한 야사는 인종의 효심을 매우 잘 보여준다. 야사를 살펴보면, 문정왕후와 소윤 일파에서 꼬리에 화선을 단 쥐를 세자가 지내는 동궁전으로 들여보내 동궁전에 불이 났다. 불이 나자 세자는 세자빈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세자빈이 함께 나가자고 하니 세자는 "어머니가 나를 죽이기 위해 불을 질렀으니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의 뜻대로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세자빈은 세자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라 자신도 함께 죽겠다고 주저 앉았는데, 이때 밖에서 애타게 세자를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를 들은 세자는 탄식한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죽는 게 효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이자 불충이 아닌가" 하며 세자는 세자빈과 함께 동궁전을 빠져나오게 된다. 비록 야사이지만 당시 문정왕후가 세자를 해치려했던 상황과 효심이 매우 깊었던 인종의 성격 모두를 잘 보여준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과 소윤의 싸움에서 승리자는 대윤이 되었다. 하지만 효심이 깊었던 인종은 그동안 그렇게 자신을 해치고자했던 윤원형을 공조참판 자리에 올린다. 계모 문정왕후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또한 효심이 지나쳐 부왕의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슬퍼했는데, 9개월의 짦은 재위기간동안 신하들이 인종에게 가장 많이 요구한 일은 다름아닌 인종이 몸을 좀 돌볼 것에 대한 요청이었다. 그는 부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천한 사람일지라도 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는 임금의 몸입니다.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어 슬픔이 절박한 탓으로 자신의 병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이지만 스스로 가볍게 여기려 하시더라도 종묘사직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인종 1년(1545년) 1월 3일


전에 듣건대 전혀 찬선을 드시지 않는다 하므로 찬선을 드시기를 청하였던 것인데 마땅히 생각하여 부응토록 하겠다고 전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도 찬선을 드시지 않는다 하니 다들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위에서 애통이 지나쳐 종사의 대계를 생각하시지 않으시니 신들은 더욱 민망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종 1년(1545년) 1월 21일


부왕의 죽음에 지나치게 슬퍼한 인종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원래도 병약했는데 더 급격히 쇠약해져 갔던 것이다. 또한 그런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이가 있으니, 바로 계모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깊은 효심을 이용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즉위한 인종을 불러 문정왕후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곧 대윤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역정을 냈고, 그러면 인종은 대비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며 며칠을 빌어야 했다. 석고대죄는 선왕의 죽음으로 몸이 허약해진 인종의 건강을 더 급격히 악화시켰다.

야사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상극인 음식을 매번 바쳤고, 효자였던 인종은 어머니가 내려주신 음식이니 먹었고, 그러면서 원래의 병에 합병증까지 더해졌다. 인종이 병중에 있음에도 궁밖의 딸집에 가겠다느니, 산천에 제사를 지내겠다니 소동을 일으키며 인종을 더욱 곤란하게했다. 결정적으로 문안인사를 간 인종에게 윤씨가 떡을 대접했는데, 그 떡을 먹은 후 얼마 뒤 인종이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야사에서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의 탓으로 돌리는데, 이것이 훗날 문정왕후를 비난하기 위해 과장한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문정왕후가 인종의 죽음을 앞당기는 여러 행동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인종이 역대 왕들 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며 죽게 되니, 드디어 문정왕후의 세상이 열린다. 당시 그녀의 아들 경원대군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전례대로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앞으로 20년간의 그녀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가난한 양반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일을 직접하기도 했다는 그녀는, 그 한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그녀는 그렇게 신데렐라가 되고도, 20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권력의 뒤안길에서 궁중 암투를 겪으며 생존을 화두로 살았다. 그 생존 싸움에서 그녀는 끝내 살아남았고, 드디어 그녀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까지 20여년을 조선시대를 통틀어 연산군을 제외하고 거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녀가 왕비가 된 후 숨죽이며 살던 때부터 절대 권력을 획득하기까지의 주요 과정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내리 넷을 낳은 17년동안은 세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세자를 방패막이 삼아 왕비로서의 삶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동안도 아들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기댈 곳 없던 궁중에서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썼던 시간들이었다. 남편 중종이 수많은 후궁들과 유희를 즐기는 동안 그녀는 <사기>, <여장부전>. <선덕여왕전>과 같은 책을 읽으며 정치를 공부했다.


-1527년 세자의 생일날 세자궁 후원에 세자의 죽음을 암시 또는 저주하는 죽은 쥐가 발견되는데, 정현왕후는 이 사건의 배후자로 경빈을 지목하여 폐서인시킨다. 이 사건이 유명한 작서의 변인데, 야사에서는 이 사건의 주모자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이라고 한다. 먼저 문정왕후는 경빈이라는 큰 산을 넘은 것이다.


-1534년 드디어 아들 경원대군을 낳게 되자, 이후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1537년 문정왕후는 당대 최고의 권신이자 공주의 시아버지이며 세자의 후견인이었던 김안로와 대적한다. 문정왕후가 중종에게 김안로가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한다고 읍소한 끝에(실제로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비시키고자 했다) 중종은 문종왕후의 손을 들어주어 김안로는 사약을 받아 죽는다. 김안로는 정말 넘기 힘든 산처럼 보였는데, 문정왕후는 그 산도 넘게 되었다.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자신의 아들을 세자 자리에 올리고자 하던 차에, 1544년 중종이 죽게 된다. 앞서 말했던 동궁전 화재사건이 중종이 죽기 1년 전쯤의 일인데, 문정왕후는 경빈과 김안로에 이어 세자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자 교체의 꿈을 꿨던 문정왕후도 중종이 갑자기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인종이 즉위함으로써 그동안 대윤과 소윤으로 나누어 싸우던 정국은 대윤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약한 인종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이다. 앞서 말했듯 부왕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종에게 어머니가 내리는 음식이라고 하여 먹게 하였는데, 그것은 인종에게 상극인 음식이었다. 툭하면 인종을 불러다 하소연을 하고 역정을 내어 병약한 왕이 석고대죄를 하도록 만들었으며 조정의 분란을 만들어 인종을 힘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인종은 고작 9개월의 재위 끝에 죽게 되었다. 실제로 문정왕후가 인종을 죽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인종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 드디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의 나이 열두살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문정왕후는 먼저 대윤 영수 윤임을 제거한다. 일부 조정대신들이 윤임을 탄핵할 이유가 부족하다고 하자, 윤씨는 다른 왕손들까지 끌어들여 윤임이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결국 윤임 일파를 비롯, 성종의 손자 계림군까지 모두 사사시켰다. 또한 항상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사림파까지 연루해 대거 제거해 버렸다.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 부르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 사림파들이 대거 몰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2년 뒤 양재역에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정왕후가 남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자작한 것이다. 이 벽서가 잔존 윤임 일파의 소행이라며 남은 사림들까지 대거 숙청했다. 이제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이, 온전히 그녀의 독재체재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절대권력을 획득한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남성들의 유교 중심의 억불정책을 보란듯이 무시하며 불교를 진흥시켰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에 반하여 강력한 독재정책을 휘둘렀다. 숭유억불을 기조로 했던 조선시대에 승려 보우를 중심으로 불교를 진흥시켰고, 도첩제를 실시해 승려를 뽑고, 전국에 300여개 절을 공인하였다. 전국 유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불교 진흥에 계속 힘썼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수렴청정이 끝나고도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정치를 일일이 지시했으며 따르지 않으면 "주상이 보위에 오른 것은 모두 나와 내 형제들 덕분인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라며 윽박질렀고, 심지어 명종의 빰이나 종아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밑에서 명종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뿐이었다. 그렇게 수렴청정이 끝나고도 그녀는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가 승려 보우와 간통을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를 낭비한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앞서 인종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부터 실록에 기록된 다수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문정왕후를 비난하기 위해 더 과장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므로, 그녀가 독재를 휘둘렀던 그 시간의 기록들은 최대한 간략히 서술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당시 문정왕후의 독재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녀의 죽음 뿐이었는데, 명종 20년 회암사에서 열 큰 재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어서 중종 옆에 묻히기를 소원했던 그녀는 장경왕후와 함께 묻혀진 중종의 능까지 이장해두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중종과 합장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능에서 물이 나와 다른 곳으로 이장되어야 했다. 그녀의 능은 태릉으로 이름지어졌는데, 명종이 그녀를 그렇게 강하고 크게 느낀 것 같다. 지금 태릉선수촌이 있는 곳이다. 중종은 살아서 세 명의 정비를 두었고 또 많은 후궁도 두었지만 죽어서는 혼자 묻혀있다. 죽어서라도 남편 중종을 차지하고 싶었던 문정왕후 역시 태릉에 홀로 묻혀있다.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드디어 그녀의 20년간의 독재정치도 함께 막을 내렸다. 너무도 강했던 어머니 밑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던 명종은 그 어머니가 죽자마자 어머니의 많은 부분을 부정했다. 어머니의 최측근이었던 승려 보우를 쫓아냈고, 외삼촌 윤원형도 몰아냈다. 그렇게 국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는 죽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그 아들에 의해 또 훗날 조선사대부들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했다.


그녀의 아들 명종은 평생 혹독한 어머니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한 탓인지 정식왕비와 후궁들 모두에서 단 한 명의 아들만을 보았는데, 그 아들마저 열세살의 나이로 죽게 되자 후사도 끊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계로 정한 후사가 선조이며, 그 이후 또 임진왜란이라는 비극까지 조선인들은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의 비극까지 그녀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그녀로 인해 사림세력이 몰락하고 외척훈구파가 득세하여 역사를 퇴보시켰던 그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혹독한 평가를 받은 왕비이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은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만큼의 비난까지 받아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를 알았다. <중략>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 목서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20년(1565) 4월 6일


한 시대의 국모였던 이에게 대놓고 이토록 혹독한 평가를 한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문정왕후 이후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려고 하면 그녀를 언급하며 막았다. 그렇게 그녀는 조선 내내 남성지배자들에 의해 비난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처럼 신랄히 문정왕후를 비판한 실록의 작성자들은 그녀가 몰락시킨 사림의 후손들이다. 또한 남성이었고, 신하의 입장이었다. 문정왕후는 당대 지배층 남성들이 존재부터 무시했던 '여성'이었고, 그들이 숭상했던 유교 대신 불교를 진흥시켰며, 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시했던 그들에 반해 강력한 독재권력을 행사했다. 즉 남성인, 유학자인, 신하인, 사림의 후손인 입장에서 보면 문정왕후는 악녀일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시대 남성지배자, 신권을 중시했던 사림파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지금 이 시대에는 그녀에 대한 평가도 좀 달라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에 맞는 최선이었던 것이고 지금 바뀐 시대에서는 이 시대에 맞게 재평가어야한다.



그녀는 왕비가 되는 순간부터 반쪽짜리 왕비였다. 그녀가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서 중종의 첫 부인이 신하들에 의해 폐출되었던 전례에서 알 수 있듯, 그녀도 잘못하면 충분히 폐출될 수 있었다. 이미 노련한 후궁과 노쇠한 대신들 사이에서 폐위되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는, 그녀를 뒷받침해줄 친정집안도 또 훗날 그녀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도 없었던 허울뿐인 왕비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냥 당하거나 살아남도록 애쓰거나.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정치공작을 폈다. 비록 그 방법이 정당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평생 숨죽이며 그 생명을 유지했을수도 또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아들을 낳은 이상 그 아들을 세자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대윤에 의해 제거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인종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대의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당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살아남았고, 이긴 것이다.


물론 문정왕후가 비난받아 마땅한 부분도 많다. 그녀는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기보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를 했으며,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자신과 친정집안을 위해서 썼다.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향락에다 모두 써버린 것처럼, 문정왕후 역시 강력한 권력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자신과 친정집안을 위해 써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정치를 독재라고 하는 것은 왕권과 신권을 중시했던 국가 기조를 무시했고, 유교국가에서 자신의 뜻대로 지나치게 불교를 진흥시킨 것이다. 어쨌든 정치에서 독재는 나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그녀가 특별히 잘못했다고 할만한 정치는 또 없었다. 그녀는 재난이 일어나면 중론을 모으게 하고 대신들과 몇시간씩 토른을 하는 등 남성 학자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치를 해나갔다. 또 그녀는 서얼을 중용하는 정치를 폈는데, 그러한 정책들이 조선 지배층 남성 사대부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그녀를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에서 탁월한 정치능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당찬 여성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온전히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부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 정치력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자신들의 뜻과 맞지 않는 정치를 했다는 이유로, 훗날의 남성들에 의해 더 강하게 부정된 면 또한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녀의 일화에 의하면, 아버지 윤지임이 그녀가 학문 수준을 보고 아들들보다 딸이 낫다며, 그녀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처럼 문정왕후는 그 시대 여성들과 달리 학문을 했고, 똑똑했고, 또한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유희를 즐기는 동안 <사기>, <여장부전>. <선덕여왕전> 같은 책들만 골라 읽을 정도로 큰 야망도 지니고 있었다.


그처럼 문정왕후는 비범한 여인이었다. 그 비범함으로 당시 여자의 몸으로 남성들 위에 군림할 정도로 권력을 획득하고 휘두른 것은 같은 여자로서 멋있게 보인다. 집안배경도 한미했고, 이미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후궁이 있었고,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 없을만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가 그 모든 불리한 상황들을 다 극복해내고 마침내 절대적인 권력을 획득한 것은 그녀가 그만큼 정치감각이 매우 뛰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생존해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에 대한 비판은 있었어도 그녀를 아예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이 여자에게는 잘 쓰지 않는 태(太)자를 능 이름으로 한 것만 봐도 문정왕후가 매우 강력하고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실책은 있었으니 그 비범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비범함으로 권력을 획득한 그녀가 그 권력을 정말 훌륭한 정치를 하는 데에 사용했더라면 어땠을까? 세조가 큰 명분도 없이, 정치깡패에 불과했던 한명회 등과 정변을 일으켰지만 훗날 그것을 비난하기보다 인정하게 된 것은 세조가 이후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일으킨 수많은 사건들이 올바르다 할 수는 없지만, 사실 그 왕조시대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녀가 권력을 획득하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 획득한 권력을 보다 훌륭하게 정치하는 데에 사용했더라면 그녀도 성군처럼 기록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하더라도 조선사대부들은 여성이 정치를 잘한 것에까지 열등감을 드러내며 폄하했을까?


그것까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문정왕후가 잘못한 부분이 다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 이후 그녀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그녀가 여성이라서, 여성이 남성이 만들어놓은 지배체계를 흔드는 것이어서, 여성이 남성 위에 군림했던 것에 대한 분함에서 비롯된, 보다 과장된 비난이었을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폐비 윤씨와는 다른 방법이지만 문정왕후 역시 조선시대 남성중심의 유교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획득한 후 그녀가 펼쳤던 정치도, 그녀에게 신랄한 비난만 했던 조선시대의 남성들도 모두 아쉬움이 남는다.

(문정왕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데, 짧은 식견으로 쓴 글이라 내 글이 가장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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