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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공주이야기-정명공주와 효명옹주

by SOL

정명공주는 선조의 딸, 효명옹주는 인조의 딸이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와 선조의 손자인 인조가 고모조카지간이니, 정명공주와 효명옹주의 관계도 고모할머니와 조카손녀쯤 된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명공주가 1603년에 태어나 1685년에 세상을 떠났고, 효명옹주는 1637년에 태어나 17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즉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기에 궁중의 잔치 등에서 만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없다.

이 글에서 두 명의 공주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산 왕의 딸들이었던 두 사람은 비슷한 운명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달랐다.



정명공주

<적통의 핏줄, 그랬기에 받은 사랑>


정명공주의 아버지인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다. 그런데 선조는 명종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이다. 그동안은 적자가 왕위를 이었는데 선조는 중종의 후궁의 손자로, 또 방계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런 출신성분은 선조에게 평생의 콤플렉스가 되었고, 이에 선조는 자신의 왕권은 적통의 자식에게 넘겨주길 바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자식을 낳지 못했던 의인왕후 박씨는 후궁들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후궁들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잘해주었다. 살아있는 관음보살로 불리는 의인왕후가 왕비로 있을 때는, 내명부의 기강이 바로서진 못해도 최소한 큰 혼란이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의인왕후가 죽고 열아홉의 어린 인목왕후가 새 왕비로 간택되자, 세자 자리를 두고 왕실에 파장이 일게 된다.


인목왕후와 혼인한 후 선조는 그토록 바라던 적통의 자식을 보게 되는데, 그 첫번째 아이가 바로 정명공주이다. 정명공주는 선조에게 최초의 적자였기에 그 기쁨이 대단하였다.

장성해있던 세자 광해군 측에서도 인목대비의 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다행히 딸이었기에 괘념치 않고 축하를 전했다. 즉 정명공주는 아버지 선조에게도, 이복오빠 광해군에게도 기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인목왕후가 아들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물론 선조는 매우 기뻤겠지만 광해군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 후계구도가 복잡해질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선조는 전부터 광해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몰래 피난길에 올랐고, 광해군은 직접 전쟁터를 누비며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백성들은 늙고 무능한 왕을 외면하고 조롱했고, 전쟁에서 그들과 함께 한 젊은 세자에게 더 호의를 가지며 환영했다. 민심은 선조가 광해군에게 선위하고 물러나길 바랬다.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열등감과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 당시 광해군이 세자로서 선조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면, 선조는 아직 명나라의 승인도 받지 못했는데 세자 행세를 한다며 광해군을 박대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바라던 적통의 아들이 태어나자, 광해군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가 살아있는 한은 이복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통의 자식으로, 선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선조는 자식사랑이 특별하기로 유명했는데, 적자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에게는 특별히 더한 자식사랑을 보여주었다. 보통 8세 전후에 봉작하는 관례를 깨고 겨우 두살이 된 정명공주를 공주로 봉하며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였고, 영창대군은 그보다 더 빨리, 태어난 지 석달만에 노비 200명과 전답 100여결을 하사하였다. 그 후로도 선조는 꾸준히 영창의 재산을 늘여주었고, 영창이 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노비 450명에 전답 300여결을 가진 재력가가 되어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주인없는 재산이었던 제안대군의 재산도 모두 영창대군에게 주어, 영창대군은 세 살전에 이미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큰 재력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 남매의 유난히 더 안락했던 유년시절은 아버지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니, 그때가 정명이 여섯 살, 영창이 세 살 되던 해였다.



<적통의 자식이기에 겪어야 했던 시련>


만약 선조가 오래 살았더라면 정말 세자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서 만약은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위해 수많은 재산을 주었고, 죽음에 임박하자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선조가 준 수많은 재산과 유언장은 영창대군을 더욱 위태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누나인 정명공주 역시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적통이라 하더라도 두 살의 영창대군이 왕위를 이을 수는 없었다. 차기 왕을 지목할 권한을 가졌던, 정명과 영창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이미 서른을 넘긴 장성한 세자 광해군을 다음 왕으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그들 남매와 어머니 인목대비의 엄청난 시련이 시작되었다.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서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명나라의 승인도 받지 못했던 광해군은 불안했다. 적자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그의 왕위는 늘 정통성에서 하자가 있는 것이다. 광해군보다는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에게 더 문제가 되었는데, 광해군의 아들과 영창대군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광해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동안 존재만으로도 자신을 괴롭혔던 여덟 살의 어린 이복동생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우고, 유배 보내 죽게 만든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겪은 그동안의 설움을 적출 동생에게 모두 풀듯, 광해는 영창대군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아홉 살의 영창대군은 어머니와 누나를 부르며, 뜨거운 방안에서 고통스럽게 타 죽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죄없는 영창이 불쌍해 눈물지었고, 잔인한 왕 광해군에게 점차 마음이 멀어졌다.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에게 닥친 불행은 영창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광해는 엄연히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서궁에 유폐시켜 버린다. 아무리 새어머니라 하지만, 조선시대 충과 함께 가장 중시되는 덕목인 효를 저버린 것이다. 또한 선조의 적통 공주인 정명공주는 후궁의 딸인 옹주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낮은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당시 16세였던 정명공주는더이상 공주도 옹주도 아닌 서인의 신분으로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다.


광해는 인목대비의 하나 남은 자식인 정명공주마저 빼앗아가려했고, 인목대비는 이미 아들을 빼앗긴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기에 정명공주만은 필사적으로 내주지 않았다. 정명공주는 이미 죽어 없다는 인목대비의 말에 광해군도 더이상 정명공주를 찾진 않았다. 여자인 정명공주는 광해군의 앞길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라, 하나남은 딸마저 잃은 인목대비가 자결이라도 할 경우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명공주는 죽은 사람이 되어 서궁에 유폐된 채, 스무 살이 넘도록 시집도 못 가고 살아갔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평균 13~15세가 되면 시집을 가는데, 광해군은 16살인 정명공주가 21살이 될 때까지 혼인도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다.


동생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가 정명공주가 열두 살 때였다. 동생의 죽음만으로도 큰 충격이었을텐데, 그 이후로도 어머니와 이복오빠 사이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지리하고 격렬했을 싸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 싸움에서 당연히 패자가 되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슬픔까지 늘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다. 친정 집안이 몰살당하고 하나뿐인 어린 아들까지 잃어, 매일을 통곡하며 잠들었던 어머니 인목대비를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불행이 더해져 정명공주는 꽃다운 십대 시절을 서궁에 유폐된 채,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하기도 했다. 서궁에 유폐될 때 그녀의 나이 열여섯으로, 한참 민감했을 십대시절을 정명공주는 그처럼 혹독히 보내야 했던 것이다.


정명공주는 정신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생활고까지 시달렸다. 광해군이 서궁에 생필품이나 음식을 전혀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궁의 궁녀들은 그릇이 없으면 박씨를 심어 박을 수확하여 그릇으로 만들었고, 동물의 똥에서 음식이 될만한 씨앗을 얻어 심은 뒤 추수하였다. 옷이 없으면 목화씨를 심어 얻은 목화로 옷을 해입고 이불을 지었다. 그런 생활을 통해 정명공주는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서궁의 궁녀들과 끈끈한 우정도 가지게 되었다.


정명공주는 선조, 인목대비와 더불어 서체를 잘 쓴 왕족으로 유명하다. 선조는 17세기 이후 국왕 어필의 전형을 수립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조는 한석봉의 필법을 좋아하여 그를 후원하였고, 한석봉에서 천자문을 쓰게 하여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한석봉 천자문을 표준 서체로 만들었다. 인목대비 역시 <민우시>로 알려진 뛰어난 서예작품을 남겼고, 특히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다.


정명공주의 작품은 대부분 서궁 유폐 시절에 씌여진 것이다. 정명공주의 <화정> 이라는 글씨는 힘과 기세가 펄펄 느껴지는데, 힘든 시기에 그처럼 기운이 펄펄 느껴지는 글자를 여성인 공주가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명공주는 서궁 유폐시절에 그녀가 어머니 인목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서예를 했다. 심각한 신경쇠약증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 선조의 필체를 닮은 서체를 씀으로써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던 것이다. 그들 모녀는 선조를 닮은 필체를 통해 그들이 일개 후궁과 옹주가 아닌 정비와 공주임을 스스로 되내었을 것이다. 이 때 남긴 서예 작품이 훗날 정명공주가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 최고의 서예 작가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서궁에 유폐되었던 세월은 분명 정명공주에게 무척이나 고달프고 힘겨웠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시간이 정명공주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때는 자신을 예뻐해주었던 이복오빠 광해군과 어머니의 싸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정치 세계의 이치를 몸소 체득하였다. 정치 싸움에서 패자가 된, 그 한을 삭이지 못해 매일 통곡하는 어머니께 위로가 되고자 노력하기도 했고, 당장 닥친 생계의 곤궁함도 몸소 해결해나갔다.

그녀는 공주로서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의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이 더욱 견고해졌다. 또한 인목대비가 자신의 친정집안과 어린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리는 작업을 하는 동안, 당연히 그 작업을 함께 했을 정명공주는 불교의 가르침들도 충실히 학습하며 심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고통스럽게 죽은 가여운 동생, 신경쇠약증에 걸린 어머니, 이복오빠가 변덕을 부리기만 하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 그리고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 내가 만약 정명공주였다면 그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불교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내었다. 그런 암울하지만, 어쩌면 암울하기만 하진 않았던 삶을 살던 어느날, 그들 모녀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거짓말 같은 반전>


인조반정이 일어난 밤, 무장한 군사들이 인목왕후가 유폐된 서궁에 들이닥쳤다. 인목왕후는 정명을 찾기 위해 광해가 보낸 군사인 줄 알고, 정명은 이미 죽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군사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 세력이었다. 반정군은 궁의 최고 어른인 인목대비에게 새로운 왕의 승인을 요청했다. 먼저 광해군의 목을 가져오라고 말할 정도로 사무친 원한이 컸던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잃었던 왕비로서의 권한을 모두 되찾았고, 인조 반정의 명분이 되었던만큼 앞으로 인조의 넘치는 효도를 받게 되었다.


당시 인조는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을 잔인하게 죽이고, 새어머니 인목대비에게 불효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반정을 꾀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긴 자의 편에서 쓰여진 역사이기에 반정의 명목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 두 명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복형제까지도 죽였다. 이것이 두 번째 걸친 왕자의 난이다. 또한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이는 계유정란이다. 둘 다 난으로 표기하고,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왕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광해군도 성공한 왕이었다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게 했던 잔인한 행동도 그저 비난받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물론 광해군 시대는 조선 초기보다 사림 세력이 더 강해져 효의 개념도 더 강화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대한 반정 명목은 되지 못한다. 광해군이 축출당한 데에는 그가 오로지 대북파들만을 기용하여 다른 사림 세력들의 불만을 샀던 점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랬기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공신으로서 그 공로가 소외되었다고 느꼈던 다른 서인 세력에 의해 또다른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인조에게 있었기에 그가 왕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의 반정 명목이 부실한 것은 분명했다.


아무튼 반정의 명목 중 하나가 광해의 불효였으므로, 인조는 광해와 달리 인목대비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했다. 인목대비를 기쁘게 할 만한 일이라면 인조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미 죽은 인목대비의 아버지와 아들을 신원하였지만,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인목대비가 기뻐할 일은 그녀의 하나 남은 딸 정명공주에게 잘하는 것이다.


인조는 이미 노처녀 중에서도 노처녀가 된 스물한 살의 정명공주의 혼사부터 서둘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사흘 뒤에 정명공주의 부마간택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것은 중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명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에 적당한 남편감이 없었다. 정명공주의 나이에 맞추자니 그 또래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이고, 그 나이까지 장가를 가지 않은 사람치고 괜찮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간택 나이를 더 낮추고 부마단자를 접수하는 기한도 더 늦추었다. 또한 이미 혼사가 정해져있더라도 무조건 단자를 내도록 하였고, 만약 이를 어기고 부마단자를 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엄벌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거의 1년이 가까운 시간이 걸리며, 세살 연하인 18살의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하였다. 영안위에 책봉된 홍주원은 노론 명문가인 풍산 홍씨 출신이었다. 홍주원은 이미 혼처가 정해져있어 그의 아버지 홍영이 간택단자를 내지 않았으나, 그 죄로 홍영은 관직에서 파직되고 간택 단자가 접수되었다. 결국 인조는 혼처가 정해져 있었던 홍주원을 강제로 파혼시키고 정명공주의 부마로 간택한 것이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집도 매우 호화롭게 마련해주었다. 당시 공주의 신혼집 크기가 50칸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명공주의 신혼집은 100칸을 넘게 하며 인목대비에 대한 효를 과시하였다.


또한 정명공주에게 수많은 재산도 내려주었다.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경상도에만 8천결이 넘는 절수지를 주었는데, 오늘날의 평수로 환산하면 5천만평이 넘는다. 그것은 경상도에서의 숫자이고, 전라도의 하의삼도를 비롯 진도 등 여러 섬에도 정명공주의 절수지가 있었다. 이 후 하의도에서는 농민들과 공주의 후손이 하의도의 소유권을 두고 300년간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유일한 자식인 정명공주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살림집과 절수지를 내려주었다. 정명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도 죽은 사람이 되어 궁녀들에게까지 괄시받는 처지에서, 100칸이 넘는 신혼집에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산을 가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더 큰 위기가 닥치다>


하지만 정명의 이 넘치는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명분이 약했던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것을 보자 다른 왕족들도 그정도면 나도 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이후 인조는 수차례 왕권에 대한 도전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이괄의 난 때에 이괄은 흥안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궁을 점령하고, 인조는 멀리 피난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비록 그 난은 3일천하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인조는 수차례 왕권에 대한 도전들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해 인조는 의심이 많은 사람되었다.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던 인조는 자신의 아들마저도 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수차례의 반란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인조는 마음이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후궁인 귀인 조씨는 심약한 인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귀인 조씨는 인조에게 세자에 대해 모함하였고, 귀 얇은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마저 미워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돌연 죽게 되었고, 소현세자빈 강씨는 인조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었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아들들, 그러니 인조의 손자들은 유배에 처해졌다.


자신의 아들 일가에게도 냉정했던 인조가 정명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일 리 없었다. 그 전부터 인조는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군가 자신을 저주해서라고 믿었다. 그런 와중에 인조에 대한 저주 물품이 인목대비의 궁에서 나오자, 인목대비마저 의심받게 되었다. 하지만 반정의 명목이 대비에 대한 효이지 않던가. 인목대비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미움의 화살이 그녀의 딸인 정명공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실제로도 만약 그 저주 사건이 진실이라면, 감정적이고 나약한 성격의 인목대비보다는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정명공주가 그 일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인조는 이때 정명공주를 국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것이 반정의 명분을 해치는 일이라고 인조를 만류하였다. 반정의 명목이 되었던 인목대비 측에서 인조를 저주했다는 것은 인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버리기에, 저주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인조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정명공주는 천만다행으로 자신의 목숨을 뿐 아니라 시댁 집안까지 큰 화를 입었을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목 대비가 살아있거나 인목대비가 죽은 직후에는, 인조의 의심 속에서도 정명공주가 인목대비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목대비가 죽고 삼년상을 치른 후에도, 인조는 누군가 자신을 끊임없이 독살시켜 죽이려 한다고 믿었고, 그 배후가 정명공주라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인조는 끊임없이 정명공주를 의심하고 위협하였다. 이때가 정명공주에게는 서궁에 유폐된 시절보다 더 살얼음판을 걷는 시간이었다.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정명공주가 어렸으므로 정치적으로 힘을 가질 수 없었고, 어찌됐든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그녀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죽었고, 삼십대의 정명공주는 충분히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 또 그런 위치에 있었다.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와 달리 이성적으로 판단했고, 선조의 적통 딸로서 정치력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시댁이 노론 명문가인 풍산 홍씨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명공주에 대한 인조의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


정명공주는 인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어야 했다. 서궁 유폐 시절에 즐겨하던 서예도 그만두고, 한자를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문한은 부인들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서예작품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여 공주의 서예작품은 그녀의 사후에 아들에 의해 알려질 정도였다.

일부러 아녀자들이 하는 바느질을 즐겨하며 글을 멀리했는데, 꼭 편지를 써야할 일이 있으면 한글을 사용했다. 그렇게 몸을 낮추고 또 낮추었던 덕에 의심 많은 인조의 겨우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나락까지 떨어져봤던 정명이기에 그랬을까? 어머니 인목대비와는 달리 현명한 방법으로 인조의 의심을 피해갔던 것이다.


<정명의 삶의 신조>


평생을 왕권에 집착했던 인조도 명이 있는 법. 살아생전 의심과 두려움 속에 벌벌 떨던 그도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정명공주도 그 기나긴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조가 죽은 뒤 정명공주의 노년은 편안했다.


정명공주는 태어나서 여섯 살까지 안락한 생활을 누리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이복오빠로부터 박대받기 시작해, 열두 살이 되던 해 남동생을 잃는 큰 시련을 겪었다. 불행이 끝이 아니라 열여섯 살에는 공주가 아닌 서인으로 강등되어 서궁에 유폐된 채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마음은 물론 몸도 심한 고생을 겪었다. 즉 십년이 넘는 유년시절을 갖은 무시와 두려움, 실의, 생활고 속에 살아야 했다.


인조반정 후 어머니 인목대비가 살아계신 10년의 세월은 그녀에게도 기적같이 찾아온 반전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은 뒤 인조가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17년의 세월은, 서궁 유폐 시절보다 더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죽을 때까지 36년은 그동안의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듯, 안락하고 평안한 시간이었다.


공주의 말년은 지난 세월 그녀의 인내와 겸손을 보상하는 듯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8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효종, 현종, 숙종의 왕들로부터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서 깍듯한 예우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았다. 또 늦은 나이에 파혼까지 시키고 한 결혼이었지만 남편과의 금슬도 좋아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딸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으며 아들들은 모두 크게 출세하였고, 조선시대 공주 중 가장 장수하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송시열은 <정명공주묘지>에서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으로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오복을 향유하였다"고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막내아들에게 준 글에는 그녀의 삶의 신조가 잘 나타난다.


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 자손들 사이에 이런 행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듣지 않기 바란다.


조심 또 조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그녀의 편지에서 평생 그녀가 그렇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말년에 최고의 행복을 누린 것은 그것이 뜻밖의 행운이라기보다, 평생을 인내와 겸손의 삶을 실천해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장 높게 태어나서, 십대시절을 가장 낮게 보냈지만 원망을 가슴에 품지않았고, 일순간 다시 높아졌지만 겸손함을 잃지않고 위험한 순간을 살아냈기에 말년의 행복을 충분히 누렸을 것이다.



효명옹주

<인조의 삶의 낙이었던 고명딸>


효명옹주는 인조의 딸이다. 선조에게는 손자가 되는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왕으로서 남긴 업적은 극히 미미하다. 오히려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외교를 하며 특별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데 비해, 인조는 실질적인 이익을 따지기보다 옛 의리만을 중시하는 외교정책으로 백성들을 고난에 처하게 했다. 인조는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배척하고 당시 저물어가는 명나라와 여전히 친하게 지냄으로써, 무섭게 성장하고 있던 청의 노여움을 사며 침입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백성들을 오랜 고통 속에 몰아넣은 병자호란이다.


당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이 전쟁에서 조선은 대패하게 되고,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청을 형제국으로 모시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는 사랑하는 큰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세자빈 강씨, 그리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과 며느리 장씨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가 모진 삶을 살아야 했고, 전쟁으로 짓이겨진 국토는 말할 수 없이 황폐화되었다. 조선의 국고는 바닥이 났고 궁궐은 뒤숭숭했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자신과 같은 인생역전을 꿈꾸는 다른 왕족들의 난을 수차례 진압해야 했고, 복위를 꿈꾸었던 광해군과 도모한 정묘호란도 겪었으며, 끝내 청나라를 형제국으로 모시게 되는 병자호란까지 치뤄내며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안으로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일년 전쯤 인조가 많이 의지하였던 왕비 인렬왕후 한씨가 산후병으로 죽은 상태였다. 의지하던 부인도 잃고,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인질로 멀리 끌려갔고, 인렬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얻은 6남 중 넷째, 다섯째, 여섯째 아들이 지난 7년동안 연달아 죽은 상태였다. 인조는 안팎으로 상심이 가득했고, 아무런 삶의 낙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조는 궁녀 조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인렬왕후 한씨를 모시던 궁녀 조씨는 미인이고 요염했다. 십대후반의 성숙한 여인이었던 조씨는 마흔세살의 노쇠한 왕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인조가 조씨만을 심하게 편애하자 조정대신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이 여인에게 빠졌을 때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는 김개시가, 연산군에게는 장녹수가 있듯 .폐위된 왕 곁에는 애첩이 늘 존재했다.


조정대신들은 한 목소리로 인조에게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간청했다. 인조는 후궁 조씨를 의식하여 여러 번 사양했지만, 결국 대신들의 뜻에 따라 새왕비를 간택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새왕비를 들인다는 결정에 상심할 조씨를 의식하여, 대체로 자식을 낳을 때에나 첩지를 올려주는 관행을 깨고, 갑자기 조씨를 숙원에 책봉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왕비간택령이 내려졌는데, 당연히 간택단자를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왕비 자리는 과거 인목대비의 왕비 자리보다 더 힘든 자리였다. 이미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장성한 상태이고, 소현세자의 자식은 물론, 소현세자의 동생도 두 명 더 있었다. 즉 왕비가 되어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인조가 한참 총애하는 조씨가 있다는 것이다. 금혼령을 발표한 5일만에 조씨를 숙원으로 책봉한 것은 그녀를 향한 애정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왕비 자리가 탐났겠는가.


간택단자의 수가 너무 적자 인조는 금혼 연령을 14세까지 더 낮추고 더 오랜 시간 간택 단자를 들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조창원의 딸, 훗날의 장렬왕후 조씨가 15세의 나이로 44세의 인조와 혼인하게 되었다.


장렬왕후 조씨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단 한 명의 자식도 보지 못했는데, 이는 장렬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여서가 아니라 인조와 함께 밤을 보내지 못해서였다. 인조는 후궁 조씨의 눈치를 보며 장렬왕후의 처소에는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은 것이다. 후에 장렬왕후 조씨는 예송논쟁에 휘말려 의붓아들과 의붓며느리의 죽음에서 자신의 상복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는데, 그녀는 왕비가 된 후 평생을 아무런 힘도 없이 그렇게 눌려 살아야 했다.


새로 혼인한 15살의 어린 왕비를 아예 모른 척할만큼 인조는 후궁 조씨에게만 빠져 지냈다. 그런 그녀에게서 태어난, 인조에게는 유일한 딸이 되는 이가 바로 효명옹주이다. 인렬왕후와의 사이에서 딸이 있긴 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인조에게 딸은 효명옹가 유일하다. 그동안 연달아 세 아들을 잃었던 상심을 겪었고, 이미 손자까지 본 늙은 나이에 얻은 그 고명딸은 인조에게 무척이나 반갑고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딸에게 인조는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인조는 효명옹주의 유모들을 직접 골라주었고, 효명옹주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배냇저고리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비단 족두리를 만들어 진한 붉은색의 주사를 발랐다. 효명옹주의 손발톱을 깎은 후 그냥 버리지 않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잘 싸서 보관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이 청군에게 값싸게 팔려나가던 시절이었지만, 효명옹주는 비단 족두리에, 고급 수입품들로 몸을 치장하며 인조의 과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탄탄대로로 펼쳐진 인생>


효명옹주의 어머니 조씨에 대한 인조의 사랑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인조가 조씨의 충실한 사람같이 느껴질 정도로, 인조는 조씨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조씨가 두번째 임신을 했을 때였다. 인조와 조씨가 아팠는데, 두 사람은 저주를 의심했다. 자신들을 저주할만한 사람으로 장렬왕후 조씨와 청에 인질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빈 강씨를 지목했다.


당시 힘없는 왕비와 청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세자, 그리고 왕의 지나친 총애를 받는 후궁의 구도는, 장차 그 후궁이 아들을 낳을 경우 세자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게끔 했다. 조정대신들은 물론, 청에 있었던 세자부부도 염려하던 바였다.

그러므로 숙원 조씨는 임신해 있던 자신을 저주할만한 사람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던 장렬왕후보다는 청에 있던 소현세자빈을 의심하였다. 이에 소현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고, 그 고문 끝에 죽기도, 협의를 인정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조씨와 소현세자빈 강씨는 원수가 되었고,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싸움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인조는 당연히 후궁 조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씨의 말대로 인조는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으로 세자부부를 의심하였다. 세자부부가 오랜 인질생활을 마치고 청에서 영구귀국 명령이 내려졌을 때도, 인조는 큰아들 세자가 9년만에 돌아온다는 기쁨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컸다. 세자부부의 귀국 소식을 들은 후부터 인조의 병세가 심해진 것이다.


그것은 소현세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소현세자는 귀국길에서부터 몸이 안 좋다가, 귀국 후 잠깐 좋아지는가하더니 돌연 죽게 되었다. 귀국한 지 겨우 두달만이었다. 당시 소현세자의 사체를 본 사람들은 독살을 의심했지만,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를 치료했던 어의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실록에서 소현세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라고 말한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다음 세자 자리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에게 돌아갔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10세로, 당시로서는 장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자신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준 것이다. 김자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런 인조의 결정은 소현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씨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혹독했던 청나라 생활에도 살아남았던 남편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두 달만에 돌연 죽은 것도 한스러운데, 장성한 아들이 아닌 시동생에게 세자 자리가 돌아가자 더욱 원한에 사무쳤다. 조씨는 그런 강빈이 자신을 저주한다고 다시 한번 인조를 부채질했다.


당시 강빈은 이미 일을 벌이지 못할만큼 감시를 받는 상황이었는데,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결국 사약을 받아 죽었다. 역시 좌의정 김자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신들은 혐의가 애매하다며 강빈의 사사를 반대했지만 결국 강빈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김자점은 바로 영의정으로 승진되었다.


대역죄인이 된 그녀의 세 아들들 역시 유배에 처해졌고, 그 중 두 아들은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은 인조 뒤에서 인조를 움직인 조씨에 의한 것이었다. 조씨는 강빈과의 오랜 갈등 끝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그렇게 귀인 조씨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 누명을 씌워 모조리 제거해버렸다.


당시 9세였던 효명옹주는 어머니 귀인 조씨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필요도 없이, 그저 사랑만 받으며 자라났다. 귀인 조씨가 인조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권력을 보다 확장시키기 위해 악한 일을 일삼은 결과, 효명옹주는 그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서 더욱 인조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효명옹주가 입는 비단옷 안에는 진한 붉은 색의 주사를 발라 악귀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했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도록 중국에서 수입한 당향말을 향주머니에 넣어 몸에 차기도 했다. 효명옹주는 흰색의 모시옷을 잠옷으로 입고, 온갖 사치품들로 치장했다.


왕인 아버지의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받으며 안락하고 호화로운 유년기를 거쳐, 어느덧 십대가 된 효명옹주도 이제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었다. 귀인 조씨는 딸의 혼사에 심혈을 기울였고, 당대 최고의 권력가의 집에서 신랑감을 물색했다.


귀인 조씨는 당시 왕인 인조보다 더 권세가 대단했던, 그리하여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고 있던 영의정 김자점과 사돈을 맺기 위해 부정한 방법도 서슴치 않았다. 귀인 조씨는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의 사주팔자가 적힌 간택단자를 수정하며 결국 김자점의 손자를 부마로 간택하였다. 그렇게 조귀인과 김자점의 정치적 결탁이 된, 11세의 효명옹주와 13세의 김세룡은 혼인하였다. 김세룡은 낙성위에 봉해졌다.


하지만 인조는 효명옹주를 혼인시키고도 2년 가까이나 궁중에서 더 데리고 살았다. 김세룡은 문안 인사 때에나 궁에 들어올 수 있었고, 궁에서 잘 수는 없었다. 인조는 사랑하는 고명딸 효명옹주를 쉽게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효명옹주는 혼인 후 2년쯤 후에 출합하였다.


조 귀인은 딸의 출합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불사를 벌였다. 한양 도봉산의 내원암에 커다란 불상을 조성하여, 효명옹주가 출합하기 20일전쯤 성대한 점안식을 거행하였다. 불상에 효명옹주의 저고리와 김세룡의 도포가 복장되었다.


왕의 고명딸로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효명옹주는 이제 당대 최고 권력자인 영의정 김자점의 손자며느리가 되었다. 거기에 앞으로 혹시라도 있을 저주들은 효명옹주의 저고리와 김세룡의 도포가 막아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더욱, 그 누구도 그녀의 앞길을 막지 못할 듯했다.



<효명옹주의 안하무인>


앞서 세자 자리가 봉림대군에게 돌아간 것은 귀인 조씨와 김자점에 의한 것이었다. 봉림대군은 형님의 억울한 죽음을 눈치 챘지만, 자신도 까딱 잘못하여 귀인 조씨의 눈밖에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봉림대군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아버지가 총애했던 귀인 조씨를 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다. 당연히 봉림대군은 귀인 조씨의 하나뿐인 딸 효명옹주에게도 관대하고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다. 효명옹주는 어린 마음에도 차기 왕인 이복오빠 봉림대군이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명옹주는 현재 왕인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고, 앞으로 왕이 될 이복오빠에게도 든든한 지지를 받는 셈이었다. 또한 시댁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김자점 집안이었다. 효명옹주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리하여 효명옹주는 점차 자기중심적이고 안하무인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효명옹주가 열한살 때, 혼사를 치르고 3일째에 잔치에서의 일이다. 효명옹주를 비롯하여 인조의 여러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효명옹주와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했다. 서로 더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것이었다.


효명옹주는 비록 서출이지만 귀하므로 마땅히 오씨의 윗자리에 앉으려 했다. 오씨가 말하기를 "나의 자급은 비록 옹주보다는 아래지만 마땅히 적서의 차례로 자리를 정해야 한다."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효명옹주로 하여금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 이후로 골육 간에 정의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혹자는 그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지 않은 것을 애석히 여겼다. <연려실기술>


그 다툼이 인조에게 전해지자, 인조는 효명옹주의 손을 들어 주었고, 그리하여 그 높은 자리는 효명옹주가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평대군이 누구인가 하면, 그는 인조의 적통 아들로, 소현세자나 봉림대군과는 동복형제가 되었다. 그는 적출이었고, 효명옹주는 서출이었다. 그리고 당시 인평대군이 효명옹주보다 15세나 위였다. 적서의 차이로 보나, 나이의 차이로 보나 그 자리는 인평대군의 부인이 앉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인조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던 효명옹주에게 그런 법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왕인 아버지의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받았고, 앞으로의 삶 역시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여전히 아버지는 왕이었고, 새로 왕이 될 이복오빠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꼼짝 못했고, 시댁은 왕보다도 더한 권력을 가진 조선 최고의 권력가 김자점 집안이었다. 그녀에게 오는 저주는 큰 돈을 들인 불상에 도포한 그녀와 남편의 옷이 다 막아줄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펼쳐진 탄탄대로와도 같은 인생을 보며, 인생이 참 쉽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불행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갑자기, 그리고 몰아서 다가오는 것이다. 효명옹주에게도 그랬다.


아버지 인조의 죽음과 함께 효명옹주에게 준비되어 있던 창창한 앞날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났다. 효명옹주가 출합한 직후 아버지 인조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 4월 21일 효명옹주의 출합을 전후하여 기온이 이상해지며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더니 인조는 감기에 걸렸다. 흔한 감기라 여겼던 인조의 병세는 점차 심각해지며 쉽게 호전되지 않더니, 결국 5월 8일에 인조가 세상을 떠났다. 효명옹주가 출합한지 고작 2주정도 뒤였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자점과 귀인 조씨 덕분이었다. 세자 시절 효종은 권력의 최중심에 있던 김자점과 귀인 조씨를 두려워하며 숨죽여 살았다. <연려실기술>에서는 "효종이 세자였을 때에 김자점에게 거슬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효종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자점과 귀인 조씨를 권력에서 밀어낸 것이다. 김자점은 멀리 귀양보내고, 아버지의 애첩이었던 귀인 조씨는 대놓고 멀리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왕이 되기 전까지는 숨죽여 살다가 왕이 되자마자 자신들을 처단한 효종에게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리에 어긋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강신들을 처단하는 것은 효종이 당연히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었다.


그동안 귀인 조씨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억울한 저주의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것이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일까. 결국 그녀 역시 효종에 의해 저주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당시 저주 사건에 대해 효명옹주의 몸종은 다음과 같이 자백했다.


업이에게 묻기를, "옹주는 무슨 불편한 일이 있다고 이런 흉악한 계획을 하여 스스로 편해지고자 했단 말인가?"하니, 진술하기를 "궁중에서 잘 대우하지 않았고 선물로 주는 물건도 전과 같이 않아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편해지자는 계획은 임금을 없애고 스스로 살고자 하려던 뜻입니다."하였다. <중략> "일이 이루어진 후에 낙성위 김세룡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하였다. <추안급국안> 자점등역옥추안2, 효종2년 12월 7일


효명옹주의 몸종은 "효명옹주가 효종의 냉대에 분노하여 효종을 저주하고, 시아버지 김식을 왕으로 만들고 남편을 세자로 만들고자 했다"고 증언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귀인 조씨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저주 혐의로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저주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그 저주 사건으로 조귀인과 김자점, 김세룡은 사사되었다. 하지만 효종은 아버지가 사랑했던 효명옹주만은 사사하지 않았다.


효명옹주는 아버지가 죽고 이복오빠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뒷받침해주던 모든 기반세력들을 일제히 다 잃었다. 효종은 그래도 살아생전 아버지가 아끼던 여동생 효명만은 죽이지 않고 대신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효명옹주는12살의 나이로,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 한 명도 두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은 채 유배에 처해졌다. 그후 약 7년간 귀양에 처해졌다가 한양으로 되돌아왔지만, 효명옹주는 더이상 옹주가 아니라 해도여자로 불릴 뿐이었다. 그리고 64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할 때, 왕의 딸이라는 신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지아비도 자식도 없는 쓸쓸한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첨언>


아무 상관이 없는 정명공주와 효명옹주를 함께 살펴본 것은 비슷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인생의 대하는 태도가 크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고귀한 왕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 안락함이 끝나고 고난의 시간이 닥쳤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운명이 비슷하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그 고난의 시간을 잘 견뎌내며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고, 효명옹주는 그 고난의 시간을 불만으로 보내며 더 큰 고난을 야기했다. 물론 그녀들의 처신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더 복잡한 상황들이 있겠지만, 인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보다 그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함을 나는 두 사람의 삶에서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정명공주는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고, 겸손하지 않을법한 상황에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십대시절에 불평불만하기보다 그저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버텨냈다. 나는 정명공주가 서궁 유폐시절을 잘 견딘 것보다, 인조반정 이후 많은 권력을 가졌던 삼십대를 겸손과 인내로 몸을 낮추며 산 것이 더 존경스럽다. 충분히 과시하고 자만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정명공주는, 불필요한 복수를 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여전히 겸손하고 조심하는 자세로 삶을 살았다.


그에 비해 효명은 늘 자만하기만 했다. 인생이 탄탄대로이기만 할 수는 없기에, 그런 때일수록 더욱 덕을 쌓아두어야 한다. 특히 겸손하지 못한 사람에게 상황은 더 쉽게 바뀌는 법이다. 하지만 효명옹주는 그 쉬운 이치를 알지 못했고, 행운의 여신이 늘 자신의 편일거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녀는 한번도 겸손하고 조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하지만 효명옹주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 정말로 타산지석을 삼을 사람은 효명옹주보다 그녀의 부모들이다. 내가 효명옹주를 더 기억하고 싶은 것은, 부모가 된 내가 소중한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효명옹주의 삶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 창창한 앞날을 준비해두는 것의 어리석음과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효명옹주를 보며 한번 더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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