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의 여느 왕비들보다 더 유명한 혜경궁 홍씨. 그녀는 열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고, 초야를 치르는 15세에 마땅히 임신을 하여 첫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일찍 죽었지만 그 후 얻은 둘째 아들은 왕이 되었다. 그 아들이 죽고, 손자가 왕이 된 것까지 다 본 그녀는 81세의 나이로 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18년간 세자빈이었고, 39년간 왕의 어머니, 할머니였다. 그리고 열살에 궁에 들어와 81세로 죽기까지 71년을 궁에서 보낸, 왕가의 모든 여인들 중 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왕비도 대비도 아닌 그저 혜경궁이라고만 불릴까?
그것은 그녀가 세자빈이었고 왕의 모후였지만, 왕비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자빈이었고, 왕의 모후였다면, 비록 왕비 자리에 앉진 못했더라도 인수대비처럼 추존되어 대비라도 되어야 할 것인데, 그녀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사도세자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역모죄로 폐서인시키고 자진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자진하지 않자 뒤주에 가두어 서서히 죽게 만들었다. 이후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폐서인한 것을 복위하여 사도세자라는 이름은 주었지만, 어쨌든 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을 왕으로 추존하기는 어려웠다. 죽은 남편이 세자에 머물러 있기에, 그녀 역시 평생을 혜경궁이라는 호칭에 만족하며 살아야 했다. 훗날 그녀는 며느리보다도 서열이 낮아 문안 순서에서 밀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녀의 한많은 일생을 담은 기록이 <한중록>이다.
열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이 되었고, 열여섯,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벌써 두 아들을 낳아 후사까지 든든히 한 그녀였지만, 스물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죄인이 된 남편의 죽음으로 모든 상황은 꼬여갔다. 다행히 그녀의 아들은 세손이 되었고 결국 왕위에도 올랐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신의 위상까지 높아지는 것은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열살이나 어린 시어머니의 견제를 참아내야 했고, 친정집안과 남편 또는 아들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음앓이해야 했다.
다만 후대에 와서 그녀의 아들이 세종과 함께 조선 최고의 왕으로 불리는 정조이기에, 그가 왕이 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딛고 '얻어낸' 왕위이기에, 그 험난한 과정을 함께하며 훌륭한 왕으로 키워낸 그녀도 '훌륭한 어머니'라는 타이틀은 얻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를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아들을 선택한 냉혹한 정치가라는 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녀가 쓴 <한중록>이 친정집안의 신원을 위해 쓰여진 글이라 하여, 그녀를 목적에 맞게 글을 쓴 모사꾼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어떤 한 표현으로 그녀를 모두 정의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녀에 대한 평가들도 완전히 맞지도, 완전히 틀리지도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삼종지도의 법도가 있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혼인해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하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숙명처럼, 그녀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다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삼종지도의 올가미 속에서, 단지 그 안에서만 삶을 개척할 수 있었던 보통의 조선 여인의 삶을 잘 보여주는 혜경궁 홍씨의 삶을 따라가보자.
<아버지를 따르는 삶 : 노론명문가의 여식으로 간택된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풍산 홍씨로, 그녀의 유명한 선조로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이 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권위를 되찾은 인목대비는 서인 집안에서 사위를 보았으니, 홍주원은 서인 중에서도 핵심 서인 세력이었다.
훗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의 갈등에서 송시열 쪽에 선 사람들은 노론, 윤증 쪽에 선 사람은 소론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노론은 서인들 중 원로급이 많았고, 소론은 소장파들이 많았다. 홍주원의 아들 홍만용은 당시 서인의 중진이었기에 노론이 되었고, 그의 자손들 역시 자연히 노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론과 소론이 크게 엇갈리게 되는 것은 숙종의 아들들에 대한 지지에서였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인정하지 않는 노론과 인정하고 지지하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으로 즉위하였으니 당연히 노론은 배척받게 되었다. 경종 시대 노론 핵심 인물은 사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종이 후사 없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그의 즉위에 큰 힘을 보탰던 노론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싸움의 최종 승리자는 노론이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권력기반인 노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노론이 중심이 된 정권이 이어졌다. 정계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가졌던 소론 강경파들은 영조4년에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고, 그 이후로 소론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고 더욱 노론 위주의 정권이 형성되었다.
당시는 노론, 소론이라는 가문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기였다.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문이 출세에서 가장 중요했고, 가문 배경은 곧 그의 미래라 할 수 있었다. 홍씨가 세자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 집안이 노론 명문가였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의 할아버지 홍현보는 홍주원의 4대손으로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조가 평소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처음 본 영조는 승정원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홍씨를 세자빈으로 거의 낙점했다.
"홍봉한이 지난번에 유생으로서 숭문당에 입시했을 때 보았더니 그 사람됨이 모나지도 않고 유순하기도 하여 승지(홍상한)보다 훌륭했다. -중략- 홍봉한을 보기 전에는 오히려 세자의 베필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홍봉한을 본 후에는 결정할 수 있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봉한을 처음 만난 영조는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에게 "오늘 세자를 위하여 정승 하나를 얻었노라."하였다. 또한 "선희궁께서는 간선하는 자리에 오르지 않으셔 먼저 불러 보시고 화기 만안하여 사랑하오시고, 궁녀들은 다투어 안거늘 내 심히 괴로워하였더니 선물을 내리시오니, 선희궁께서와 화평옹주께서 나의 행례하는 거동을 보시고 예법을 가르치시거늘..-하략-"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희궁은 영빈 이씨로, 내정된 세자빈인 홍씨를 미리 불러 간택에 임하기 전에 예법까지 가르쳐 준 것이다. 초간택 다음날 재간택에 참여할 예비 후보자 7명을 발표할 때도 1번이 홍씨였고, 보통 예비후보 1번이 최종간택되는 관례에 따라 홍씨는 세자빈이 되었다. 그렇게 홍씨는 홍주원의 5대손인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할아버지 홍현보와 아버지 홍봉한의 덕분으로, 이미 세자빈에 내정된채로 간택에 참여했고, 정해진대로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빈이 된 홍씨는 유독 많았던 당시 내명부 웃전들의 사랑을 모두 받았다. 당시 최고 어른인 시할머니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세번째 왕비), 법적인 시어머니였던 왕비 정성왕후 서씨(영조의 왕비), 사도세자의 친모로 친시어머니가 되는 영빈 이씨, 거기다가 법적으로 형님에 해당하는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까지 네 명의 웃전을 모셔야 했던 세자빈 홍씨는 다행히 네 사람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당시 58세였던 인원왕후 김씨, 53세였던 정성왕후 서씨는 자식이 없었는데, 이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그러니 열살의 세자빈 역시 세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여이 봤을 것이다. 형님이 되는 현빈 조씨 역시 자식이 없었고 넉넉한 인품이었으며, 영빈 이씨 또한 후덕하고 겸손한 여인이었다. 영빈은 세자빈에게 시어머니이지만 서열상 며느리보다 낮았기에, 며느리를 존대하며 깎듯이 대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홍씨는 많은 웃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려운 시집살이를 겪진 않았다. 하지만 엄정한 법도가 존재했던 궁중생활이었기에 그 시집살이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정월에 혼례를 치르고 내가 들어와 궐내 모양을 보니 그때 삼전이 계시온데, 법도가 엄하고 예의가 중하여 터럭만큼도 개인 사정이 없으니 두렵고 조심되어 마음을 감히 일시도 놓지 못하였다. 세자께서도 부왕께 친애하는 감정은 뒤지시고 엄위가 승하오셔, 10세된 아기네오시되 감히 마주 앉지 못하시고, 신하들처럼 웅크리고 끓어 엎드려 뵙던 것이니 어찌 그리 과히시던고 싶으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세자빈 홍씨는 아버지 앞에 신하처럼 무릎 꿇어 엎드리는 열살의 사도세자의 모습이 가히 충격에 가까웠던 것 같다. 또한 그녀 역시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양반 명문가 규수였던 홍씨는 엄한 궁중 법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벽 문안을 올려야 하는 궁중 어른이 4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떨어져 살았고 세자빈이 사는 저승전과도 멀었다. 그 문안인사를 올리는 일 자체가 큰 고역이었을텐데, 세자는 그런 세자빈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늘 느렸다. 동궁이 앞서지 않으면 빈궁이 감히 못 가는 법도였기에 매양 세자의 준비를 기다리며 세자빈은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침 문안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때는 궁중의 법도가 지엄하여 예복을 아니하면 감히 뵙지 못하고 날이 늦어도 됩지 못하기 때문에, 새벽의 문안 때를 어기지 않기 위해 잠을 편히 자지 못하는지라.(하략)" <한중록>
이처럼 열살의 세자빈 홍씨는 뼈대있는 노론명문가 집안의 여식답게, 세자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그녀가 웃전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그녀의 그러한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열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된 홍씨는 비록 쉽지 않은 세자빈 자리였겠지만,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 나쁘지 않게 돌아가며, 세자빈으로서의 생활을 무사히 잘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세자빈 생활의 첫번째 위기가 찾아오니, 세자부부가 열네살이던 해의, 큰시누 화평옹주의 죽음이었다. 화평옹주는 영조가 심하게 편애했던 영빈 이씨 소생의 맏딸이었다.
영조의 자식으로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와 화순옹주, 영빈 이씨 소생의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가 있다. 영조는 정빈 이씨 소생의 자식들은 둘다 사랑했지만, 영빈 이씨 소생은 편애가 심했다. 그 중에서 화평옹주를 가장 사랑하였고, 화평옹주가 죽은 후로는 화완옹주에게 그 사랑이 옮겨갔다. 그리고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미워했다. 화협옹주는 아들을 바라던 때에 딸로 태어난 죄로 미움을 받았고, 사도세자는 왜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뒤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사도세자는 화협옹주에게 "누이와 나는 귀 씻은 물을 받는 존재"라고 한탄할 정도로 두 사람은 대놓고 영조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그에 반해 영조는 영빈 소생의 첫째딸 화평옹주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실어주었다.
<한중록>에서 나온 표현대로하자면 화평옹주는 유순, 인후공검했다. 부드럽고 온순하고 어질고 검소하다는 의미이다. 그런 화평옹주는 자신만 사랑받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늘 사도세자와 아버지의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었다. 음양으로 사도세자를 도와주던 화평옹주가 죽자, "세자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 앞으로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아는 바깥에서는 모두 세자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현륭원지)라고 할 정도로 화평옹주의 죽음은 사도세자에게 큰 위기가 되었다.
영조는 편애했던 화평옹주의 죽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울었고, 왕실 법도를 어겨가며 죽은 옹주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화평옹주의 죽음에 너무도 비통하게 슬퍼했던 영조는 이후 건강도 크게 상하여 병석에 눕은 일이 잦아졌고, 영조의 그런 크나큰 슬픔은 세자부부에게는 시련이 되었다.
영조가 화평옹주의 죽음에 그토록 과도하게 슬퍼한 이유는 물론 사랑하는 딸이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이 컸겠지만, 그 이면에는 경종독살설까지 연관되어 있다. 경종이 갑자기 죽은 것이 영조가 올린 음식을 먹은 뒤였다. 까마귀날자 배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독살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영조의 말만 듣자면 그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런 영조에게 끊임없이 형을 죽인 동생이라는 오명이 따라붙는 것은, 그 인생에서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컴플렉스 이상으로 평생 그를 괴롭혔다.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영빈 이씨와의 세 딸도 연달아 죽었다. 사람들은 형을 죽인 벌을 받아 영조의 자식들이 줄줄이 죽어나간다고 수근거렸고, 마음이 여렸던 영조는 그 수근거림을 견디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살아남은 딸이 화순옹주와 화평옹주였다. 그녀들이 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영조에게는 떳떳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런 화평옹주가 죽자 다시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역시 형을 독살시킨 영조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영조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왕위를 탐내지 않았다고 다시 세상에 고하고 싶었다. 왕위에 욕심이 없었기에 세자가 15세의 성인이 되었으니 그만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위교서를 받은 세자는 밤새 잠도 못자고 문밖에 엎드려 통곡하며 선위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영조는 자신의 결백을 신하들뿐 아니라 귀신들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었고, 영조의 그런 쇼에 가장 고생한 것은 세자였다.
세자빈은 15세의 성인이 되어 치르는 첫 합방을 앞두고 설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렘을 느낄새도 없이 영조의 그 선위소동에 대응해야했다. 축복받아야 할 성인식은 영조의 대리청정 명령으로 두려움과 불안 속에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조는 그 전에도 여러번 대리청정 명령을 내려 신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했다. 그럴 때마다 사도세자는 석고대죄를 청해야 했다. 열다섯 성인이 된 사도세자는 세자빈과의 초야보다는 아버지의 저런 행동에 이번에는 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가 더 큰 문제였다. 그 합방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리 없고, 홍씨의 임신 소식 역시 금방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자빈 홍씨는 15세 10월이 되어서야 임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9월 무사히 아들을 출산했다. 그 아들이 의소세손이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 또한 누릴 수 없었다. 세자빈은 임신했을 때 화평옹주를 자주 보았다고 한다. 세자빈은 화평옹주의 원귀가 붙은 것은 아닌가 두려웠다. 그렇게 화평옹주가 죽은 뒤 성인식 이후의 사건들로 세자 부부는 많은 불안을 느꼈다.
세자빈은 무사히 출산한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2년 전 화평옹주가 출산을 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자빈 홍씨가 무사히 출산한 날도 아이를 낳다 죽은 화평옹주를 생각하며 울었다고 한다. <한중록>에 의하면 "해산 후 네 순산하고 아들을 낳음이 기특하다는 말씀도 없으시니 어린 나이에 아들 본 기쁨을 몰라 도리어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세자빈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열여섯에 출산을 했지만 괴팍한 시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의소세손에게 화평옹주에게 있었던 큰 점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의소세손을 화평옹주의 환생으로 여기며 갑자기 편애했다. 하지만 의소세손은 세돌이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열여덟의 세자빈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태중에 또다른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화평옹주의 귀신을 자주 봐서 불안해했던 것을 생각하며 이번에는 어머니가 마음을 단정히 먹고 태교에 충실하겠다고 결심했다. 세자빈은 "내 먼저 생산에 나이 어려 어미 도리를 못하였다."자책했다. 그래서 첫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자제하며 복중 아이를 지켰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이다.
그렇게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이미 아들을 잃은 슬픔도 겪고, 또 어머로서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결심도 했던 세자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세자빈으로서의 삶은 더욱 위태로웠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따르는 삶 : 왕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남편 사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임오화변이라는 조선시대 최악의 부자 갈등으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의 갈등의 원인으로 1)노론과 소론이라는 정치 성향의 차이, 2)학문을 중시하는 아버지와 무예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아들이라는 성향의 차이, 3)아들의 인정을 갈구했던 아버지, 역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던 아들의 소통의 부족, 4)거기에다 그들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의 죽음, 5)그리고 둘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득세로 정리해볼 수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부자이기 전에 왕과 신하의 관계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갈등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쪽은 사도세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그 갈등은 마무리되었다.
1) 그러면 어째서 부자관계였던 두 사람의 정치성향이 달라졌을까? 앞서 말했듯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고, 왕이 된 후에 소론의 역모도 겪었기에 아무리 탕평책을 추구한다해도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영조는 노론인데, 왜 사도세자는 소론이 되었을까? 그것은 영조가 직접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영조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알아보려면, 먼저 영조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한다.
영조는 마음이 굉장히 여린 사람이다. 개미 한 마리도 밟아 죽이지 못하고 죄수에게 사형이나 고문 명령을 내릴때도 벌벌 떨었던 사람이었다. 감정에 북받쳐 울기도 잘했고, 감정대로 행동한 뒤 후회하는 일도 많았다. 반면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체면을 매우 중시하며 타인의 눈을 심하게 의식했다. 그런 영조가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평생 영조는 경종독살설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했다.
영조에게는 정빈 이씨 소생의 큰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열살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 후 7년간이나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노심초사 하다가, 42살의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아들이 사도세자였다. 그러니 그 사도세자의 탄생에 영조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영조는 그런 소중한 아들을 경종이 살던
저승전으로 보내 양육토록 했다. 영조는 그토록 소중한 아들을 내어줄만큼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화해하고 싶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 의해 양육되었고, 경종을 모시던 사람들은 어쩌면 의도적일수도 어쩌면 자신들도 인지하지 못한 새에, 사도세자에게 영조의 험담을, 경종의 억울함을 하소연했을 수 있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소론에 물들어갔던 것이다.
2) 영조는 학문을 중시하는 왕이었지만, 사도세자는 예술과 무예에 보다 조예가 깊었다. 그런 두 사람의 성향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조는 아주 힘들게 왕이 된 케이스이다. 그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에 다른 남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기에, 소론측에서는 영조의 아버지가 정말 숙종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며 흑색선전을 했다. 그렇게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차남의 영조는 왕이 되기까지 무수한 의심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형 경종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주지 않았더라면 영조는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역모죄로 죽었을지도 모를만큼, 험난한 과정을 통해 어렵게 얻은 왕위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왕이 된 영조는 누구보다 좋은 왕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형을 독살했다는 의심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은 보다 훌륭한 왕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왕이고, 아들이 유일하게 그 하나였기에 저절로 얻은 자리였다. 그렇게 편안하게 세자자리에 안착했으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사도세자는 그렇지 않았다. 영조 눈에는 자유분방한 기질에 무예와 예술을 즐기는 세자가 아니꼬아보였다. 자신이 했던 것처럼 노력하고 또 노력해주길 바랬지만 세자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3) 영조는 인정에의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도록 미워했다. 사도세자가 그런 아버지의 성향을 알았더라면, 어디서 어떤 말을 들었어도 영조에게 가서는 영조의 사람인 척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어렸고, 엄한 아버지 영조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고, 그의 앞에만 서면 얼어붙어 아무말도 잘 하지 못했다. 영조는 말이 없는 사도세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고, 그 궁금증은 의심이 되어갔다. 누구보다 아들이 자신을 알아주길 바랬고, 그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영조는 점점 그 아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영조는 "나는 세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토로했다.
이제 사도세자 입장을 들어보자. 사도세자는 무슨 일을 하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아버지가 점점더 어려워졌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화를 내는지 알 수도 없게, 아버지는 계속 역정을 냈다. 자신이 완벽한 세자가 아니듯 아버지 영조 역시 완벽한 왕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자식을 품기는 커녕 온갖 꼬투리를 잡아 탓하기만하는 아버지가 점점 원망스러웠다. 환갑의 나이에 형수의 상 중에 형수의 궁녀를 취해 정신도 못차리는 아버지를 보며 사도세자 역시 궁녀를 취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한 일은 생각도 않고 훈계만 늘어놓는다. 십대 후반에 접어든 사도세자는 그런 아버지에게 점점 반항심이 들었다.
실제로 영조는 훌륭한 업적에 비해 인품은 말할 수 없을만큼 옹졸했다. 그의 자식에 대한 편애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성격적으로 소심한 면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의 부부관계가 매우 안 좋았음은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그 이유가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왜이리 고우시오?" 했더니 왕비가 "험한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조는 양반가 규수였던 왕비가 무수리인 자신의 어머니를 비꼰다고 생각하여 평생 정성왕후 서씨를 미워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두 사람은 결혼기간이 50년이 넘는데 대부분 별거생활을 했고, 정성왕후와 막내사위(화평옹주의 남편)가 같은 날 죽었는데 영조는 왕비의 죽음보다 막내사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며 막내사위의 빈소에 먼저 갔다. 아무리 그래도 50년을 넘게 부부의 연으로 살았고, 영조가 왕세제 시절에는 정성왕후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부간의 의리로 보아도 왕비의 죽음에 슬퍼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영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세자가 심하게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친어머니도 아닌데 그런다고 면박을 주었다.
영조는 수가 틀리면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수없이 말했고, 사도세자는 그때마다 석고대죄를 청해야 했다. 영조는 자주 감정적으로 행동했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즉 영조는 성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영조를 닮은 것인지, 그런 영조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인지 사도세자 역시 화증이 심했다. <승정원일기>에서 세자는 기승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는다고 토로했다. 기승이란 기가 솟아올라 가슴을 막히게 하는 증상인데, 화병의 일종일 것이다. 처음에는 의관을 제대로 입지 못한다거나 하는 수준이었던 기승이 점차 심각해져서,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죽였고, 아버지이자 왕인 영조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백명에 이르는 사람을 살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악행이 다수 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당시 사도세자의 심각한 홧병 증세는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
그렇게 부자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견해 차이, 학문을 중시하는 성향과 예술과 무예를 즐기는 성향의 차이, 그 속에서 아버지 영조의 성격적 결함과 아들 사도세자의 홧병 증세의 부딪힘으로, 돌이킬 수 없을만큼 사이가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이 10년 넘게 지속되면서도 터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를 중재해주던 여인들의 존재였다.
4) 사도세자를 귀하게 여겼던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존재했고, 영조의 지극한 편애를 받는 딸 화평옹주가 사도세자의 편이 되어 주었을 때는 그들 부자 사이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세자가 14세일 때 화평옹주의 죽음부터 시작해, 3년 뒤 17세때에는 또 영조가 화평옹주와 더불어 지기(知己,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로 꼽은, 세자부부에게도 너그러웠던 효장세자의 비 현빈 조씨가 죽었다. 그리고 세자가 23살 되던 2월에는 왕비 서씨가, 3월에는 대비 인원왕후 김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세자 부부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부자사이를 유연하게 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자, 부자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영조는 많은 사람 앞에서 세자에게 노골적으로 질타를 퍼부었고, 세자의 마음에는 울화가 쌓여갔다. 세자의 홧병은 더욱 심각해져 살인에 이르렀다. 세자는 23살 가을, 그러니까 대비와 왕비가 승하한 직후,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김한채의 머리를 베어 궁녀들에게 내보였는데, 앞으로 자신의 비행을 영조에게 아뢰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세자가 지난날의 살인행각을 반성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근래에 기승하는 증세가 때로 더 심할 때가 있는데, 심지어 작년 가을의 사건까지도 있었다. 이제 성상께서 내리신 하교를 보니, 감동하여 눈물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겠다. 이에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환관 김한채 등에게 담당 부서로 하여금 휼전을 후하게 거행하여 내가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3월 6일
성상께서 내리신 하교를 보고 사도세자가 감동하였다는데, 이는 영조가 세자를 불러 왜 살인을 했냐고 물었을 때, 사도세자가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니 무서워서 화가 되어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말에 영조는 "내 이제는 그렇게 안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에 사도세자는 크게 감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스물여덟의 세자는 영조를 죽이고 싶다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그토록 관계가 악화된 데에는 현빈 조씨의 죽음 이후 가까이 한 영조의 후궁 문씨와 정성왕후의 삼년상 후 들어온 새로운 왕비 정순왕후김씨의 영향도 있었다. 세자를 지켜주던 여인들은 모두 죽었고, 대신 세자를 모함하는 두 여인이 등장하면서 부자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5)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기 전에 현재 왕과 차기 왕의 관계였다. 권력에 눈이 먼 신하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판을 짜고자 했고, 결국 부자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방법으로 차기 왕을 교체하고자 하였다. 즉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던 당시 조정대신들의 이간질과 부채질이 더해지면서, 부자관계는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영조를 왕위에 앉게 해준 원조 노론은 당연히 권력이 자신들에게 집중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탕평책을 추구했던 영조는 원조노론에게 왕 이상의 권력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고, 원조노론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원했다. 그를 위해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가와 재혼을 통해 얻은 경주 김씨가를 키우고자 했다. 원조노론은 그런 영조에게 서운했기에, 새로 왕이 될 사도세자에게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소론에 좀더 가까웠던 사도세자는 원조노론의 구애의 손길을 아주 단호히 거절한다. 다시 원조노론은 영조에게도 붙어봤지만 영조 역시 냉랭했다.
결국 원조노론은 정순왕후에게 갔다. 탕평책을 추구하며 양당의 공존을 원했던 영조와 사도세자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을 확실히 챙겨줄 정순왕후 쪽에 붙은 것이다. 당시 한미한 가문이었던 정순왕후 측에서도 원조노론과 손잡는 일은 분명 이득이었다. 그렇게 정순왕후와 원조노론이 손잡으니, 그들이 훗날 노론 벽파가 된다.
원조노론은 영조보다 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도세자가 왕이 된다면 자신들이 내쳐질 것이 분명했기에,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현재 왕도 차기 왕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늙은 현재 왕은 곧 죽을 것이지만 차기왕은 살날이 많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신하들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렇게 부자간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동안 혜경궁 홍씨는 어떻게 지냈을까? 세자빈이었던 혜경궁이 열네살 때 화평옹주가 죽고, 열다섯의 나이로 세자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스물여덟살까지, 그 14년의 시간은 그녀에게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불안한 시간이었다.
화평옹주의 죽음 이후 영조의 갑작스런 수렴청정의 명령,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더 심해진 남편과 시아버지의 불화, 또 그에 따른 남편의 비행, 세자를 지켜주던 인원왕후, 정순왕후의 잇따른 죽음, 새왕비 정순왕후가 노론세력과 손잡고 더욱 조여오는 남편에 대한 모함들, 그에 따른 남편의 이상행동의 심화, 이미 정치권에서는 남편에 대한 지지를 버린 듯한 행동들, 거기에 친정집안까지 남편을 버린 상황. 그 모든 것이 서서히, 하지만 점차 강력하게 옥죄어오던 십사년의 세월이었다.
사도세자는 홧병증세가 심했다고 한다. 과장되었을 수는 있지만 사도세자의 홧병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실로 간주한다. 십대 후반에 접어든 사도세자는 사춘기 아이처럼 아버지에게 반항을 했다. 사도세자는 궐내 가장 큰 어른인 인원왕후전의 궁녀를 건드려 임신을 시켰고, 그 궁녀를 자신의 처소에 숨겼다. 그 사실이 발각되자 영조는 궁녀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사도세자는 다른 궁녀를 그 궁녀로 속여 영조에게 내주었다. 그렇게 사랑했고 아들과 딸까지 낳은 부인인데, 사도세자는 그 궁녀를 때려죽였다. 그 전에도 사도세자는 내시를 죽이고 그 목을 들고나와 다른 궁인들에게 협박했다. 그 모든 것을 세자빈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세자빈 홍씨는 점차 남편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노론 세력의 친정마저 사도세자를 버리고자 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 되는 홍씨 가문이 처음부터 세자를 버린 것은 아니다. 홍씨 가문은 추이를 지켜봤다. 그런데 정순왕후에게 붙은 노론벽파들이 홍씨 가문을 세자에게 붙어 차기정권을 노린다고 영조에게 모함을 했다. 정계의 중심이 되었던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부자 사이도 더이상 가망이 없어보였다. 홍씨 집안은 지금이라도 영조에게 붙어야 살 것 같았다. 결국 영조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이라며 뒤주를 대령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 친정집안에서는 세자빈 홍씨에게 미리 언지를 주었을 것이다. 세자빈 역시 이미 기울어져가는 남편 대신 아들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자빈 역시 남편 사도세자를 버렸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남편 사도세자에게 힘을 보태기에는 그녀의 힘이란 게 너무나도 미미했다. 시아버지 영조는 당연히 세자빈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당대 정치상황이, 자신의 친정집안이 이미 사도세자를 버렸다. 그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하나뿐인 아들을 살리는 일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남편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세자빈은 친시어머니인 영빈에게 남편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해바치며, 대신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영빈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부자관계의 파국에서 남편과 손자를 선택하며, 아들 사도세자는 친어머니에게서도 버려졌다. 영빈의 친아들에 대한 비행을 고해들은 영조는 내심 흡족했을 것이다. 영조 자신도 처단하고 싶었지만 결정적인 구실을 찾지 못했던 차에 친모 영빈의 고변은 처단의 이유로 충분했다. 영조는 기다렸다는듯이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먼저 정치 권력에게 버려졌고, 아버지에게, 아내에게, 친어머니에게 모두 버려지면서, 그 모든 복잡한 정치판에서 오로지 그 혼자 희생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아들을 버리는 선택을 한 영빈 이씨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그녀는 인원왕후전의 궁녀 출신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아 1남 5녀의 많은 자식을 낳았다. 서른살의 나이로 처음 후궁 첩지를 받았는데, 아마 영조가 왕세제시절부터 가까이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이복형 경종의 눈치를 봐야했던 상황이므로 승은을 입었다하더라도 후궁이 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그녀에게 높은 품계를 주었고, 그녀를 통해 아들을 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영빈이 딸만 넷을 내리 낳았으면 포기하고 다른 후궁을 찾을법도 한데, 그후로도 아들을 보기 위해 그녀를 계속 찾은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딸 넷을 낳고 다섯째 아들로 사도세자를 낳았다. 그리고 막내딸로 화완옹주가 있다.
간택 후궁도 아닌 궁녀 출신의 후궁이 왕과의 사이에서 1남 5녀라는 많은 자식을 둘만큼, 영빈은 영조에게 오랜 사랑과 신뢰를 받은 여인이었다. <한중록>에서도 영빈 이씨의 온화하고 후덕한 성품에 대한 칭송이 자주 나오고, 변덕이 심한 영조 역시 평생동안 그녀를 신뢰했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매우 슬퍼하며 후궁 중에서 가장 성대한 장례를 치뤄주었다. 특히 영조는 풀지못한 숙제였던 사도세자 문제를 영빈 이씨 덕분에 풀어냈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오욕을, 친모인 그녀가 함께 해준 것에 대해 더욱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정이 컸던 영빈 이씨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였다는 자책이 심했고 "내가 못할 일을 차마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아니하리라."말했다. 영빈 이씨는 그 대처분 이후 많은 밤을 "부르짖어 울고 서러워했다."
그녀가 죽은 날이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다음날이라고 한다. 이런 그녀의 죽음의 시기를 두고 자살의 의혹이 있으며, 실제로 사도세자의 상이 끝날 무렵부터 그녀는 음식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법적 지위는 낮았지만 친시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했던 혜경궁이, 영빈이 병이 들었다면 그에 맞게 문안 했을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이 죽은 것도 그녀의 자살설에 힘을 실어준다.
일개 궁녀에서 왕세자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은 당시로서 가장 큰 신분상승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섯명의 자식 중 다섯명을 앞세웠고, 그 중 한 명은 스스로 죽인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의문의 죽음으로 한스러운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은 친시어머니가 되는 영빈에 대한 공경을 다했으나, 훗날 친손자가 되는 정조는 친할머니에 대한 정이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정조는 영조가 그녀에게 친히 내려준 "의열"이라는 시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삭제하고 대신 "선희궁"이라는 이름을 올렸다.
다시 세자빈 홍씨로 돌아가보자. 영빈 이씨가 아들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면, 세자빈 홍씨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세자빈 홍씨는 정치판에서 권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훗날의 행보를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시아버지와 남편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 속에서, 그녀는 오로지 아들만이라도 구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자빈은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세자빈의 이런 선택을 두고 그녀를 냉혹한 정치가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과대평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뿐, 어떤 냉혹한 정치를 할만큼의 권한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그녀의 친정만 해도 그랬다. 홍씨 가문은 어쨌든 사도세자가 사위였다. 사도세자가 좀 적당히 타협해줄 것을 계속 권했겠지만 사도세자는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순왕후와 손잡은 노론벽파는 홍씨 가문을 공격했다. 홍씨 가문은 현 권력자인 영조에게 붙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정의롭게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당시 모든 신하들이 그랬다. 오로지 자파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파가 살아남을 궁리만 했던 정국이었다. 풍산 홍씨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이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심지어 친정가문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왕비도 아닌 고작 세자빈에 불과했던 그녀의 정치적 판단이 그리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아버지, 남편, 친정집안은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들을 살려내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일관되었다. 훗날 그녀의 아들이 친정집안과 대치할 때에는, 그녀는 아들의 편이었다. 아들의 즉위가 친정의 몰락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들의 즉위를 바랬다. 다만 아들의 즉위 후 자신의 친아버지의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부탁할 뿐이었다.
혜경궁을 두고 냉혹한 정치꾼이라는 평가는 그녀의 역량과 위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라 생각된다. 사도세자마저 대신들에 의해 처단되는 그 상황에서 일개 세자빈인 그녀가 무슨 정치꾼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겠나싶다. 어쨌든 그녀 역시 남편을 버린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아들을 위해서이든, 친정을 위해서이든, 남편의 손을 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들을 따르는 삶: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애끊는 노력>
남편 사도세자가 폐서인 되어 뒤주에 갇히던 날, 세자빈과 그녀의 아들딸은 궁을 떠나 친정집으로 옮겨졌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 그 9일간 세자빈은 친정집에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물을 바치는 장면은 픽션인 것이다.
세자빈은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10일만에 죽고 장례를 치루기 위해 다시 입궐하라는 소식을 받고서야 다시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 시켜 죽였지만, 죽자마자 복위시켜 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뤄주었고, 그의 식솔들 역시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장례를 치루도록 했다. 그렇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는 동안만 사가에 쫓겨났다가 바로 다시 입궁했고, 그 이후로도 쭉 궁에서 생활했다. 다만 세자가 죽었기에 더이상 세자빈이 아닌 혜빈으로 불렸다.
스물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역모죄로 남편을 잃은 과부 혜빈 홍씨, 하지만 그녀는 왕세손의 친모였다.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의 14년의 시간은, 그녀의 남편이 살아서 시아버지와 대치하던 시절 이상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아니 그녀는 더 피끊는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자를 제거한 노론이었다. 어린 세손은 어떻게 자기들 구미에 맞게 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노론은 세손의 아비를 직접 죽인 세력이다. 사도세자처럼 손잡기 어려운, 매우 영민한 세손이 왕위에 오른다면, 사도세자때보다 더 자신들의 권력유지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고, 이에 노론은 세손 제거에도 착수했다.
세손은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세손이 항상 밤늦게까지 공부한 이유가 자객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위협을 받았는지 추측하게 한다. 정조는 스스로 의학을 공부하여 죽을 때까지도 직접 약을 조제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모든 것이 세손시절부터 독살의 위협에도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처럼 자객이나 독살의 위험이 늘상 존재했고, 세손에 대한 비방 또한 끊이지 않았다. 세손이 영조에 대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부터 온갖 비방이 올려졌지만, 다행히 영조는 끝까지 세손을 믿어주었다. 세손 역시 조금이라도 흠 잡힐 행동을 아예 하지 않으며, 영조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세손은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겨야했고, 혜빈 역시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마음조렸다.
만일 영조가 사도세자 때처럼 세손을 의심했더라면, 세손 역시 노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들은 믿지 못했던 영조는 왜 한다리 건너인 세손은 믿을 수 있었을까?
사도세자가 죽었던 시기로 돌아와 영조는 사도세자의 상을 치루고도 석달간이나 혜빈을 만나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 약한 영조가 사랑했던 며느리에게 지아비를 앗아간 고통을 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 선뜻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석달만에 혜빈을 만난 영조는 혜빈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영조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생각해주니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게 영조와 혜빈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내 천만 설운 회포가 어떠하오리마는 만분의일도 감히 베풀지 못하고, "모자 보전함이 다성은이로소이다"하니 영조께어소 내 손을 잡고 우시며 "네 저러할 줄 생각지 못하고 내 너 볼 마음이 어렵더니, 내 마음을 편하게 하니 아름답다"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내 심장이 더욱 막히고 명완함이 심한지라, 내 인하여 아뢰되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치실까 바라옵니다"하니 "네 떠나 견딜까 싶으냐"하시거늘, 내 눈물을 드리워 아뢰되 "떠나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를 모셔 배우기는 큰일이옵니다"하고, 인하여 세손을 올려 보내려 정하니... <한중록>
혜빈은 아들만은 그 냉혹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아 왕이 될 것을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애가 심한 영조의 사랑을 받아야했다. 열살에 입궁하여 이십년 가까이 궁 생활을 한 혜빈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불화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떨어져 양육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불통한 것을 보았기에, 혜경궁은 아예 아들을 영조의 처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남편을 잃고 오로지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 그녀가 그 소중한 아들을 내어줌으로써 영조는 혜경궁의 충심을 더 알게 되었다고 좋아했고, 세손이 영조와 아주 친밀히 지냄으로써 둘 사이의 신뢰를 쌓을 수도 있게 되었다.
훗날 세손이 노론 벽파에 의해 몇번이나 모함을 받고 영조에게 의심을 받을 위기가 있었지만, 영조가 세손만은 의심하지 않고 지켜준 것이 둘 사이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혜경궁이 세손을 영조가 직접 양육케 함으로써 둘 사이를 공고히해준 덕분이었다. 세손이 혜빈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서러이 울었고, 그를 본 영조는 혜빈에게 그냥 니가 돌봐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혜빈은 단호히 세손을 영조에게 보냈다. <한중록>에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아들을 떼놓는 어미의 슬픔이 회고되어있다. 혜빈은 그런 애끊는 고통에도 영조의 사랑을 받지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세손을 기어이 떼어놓았다. 정조가 왕이 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영조의 마음을 얻은 것에는 이처럼 혜경궁의 이성적인 상황 판단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경궁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도 있다. 편애가 심한 영조에게 심한 편애를 받는 딸이 있었는데 화완옹주였다.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영조의 배려로, 영조와 정순왕후, 세손과 함께 경회궁에 살았다. 화완옹주는 질투와 독점욕이 심해 혜빈을 힘들게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빈은 아들인 세손에게 화완옹주를 어미 대하듯 잘 대해드리라고 늘 말했다. 그것 역시 그녀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대의를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다.
세손이 많은 어려움을 참아냈듯, 혜빈 역시 많은 고초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참아냈다. 자신보다 열살 어린 법적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도 끝까지 예를 다해 행동했으며, 화완옹주가 아무리 모함해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을 혜빈에게 그 아들을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했다는 통보가 전해졌을 때에도, 속으로는 가슴이 무너졌겠지만 그 뜻을 고분고분히 따랐다.
그런 때에 갑신년 2월 처분이 내리니 천만 뜻밖이었다. 위에서 하시는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겠는가마는, 그때 내 심정은 망극하여 견줄 곳이 없었따. 내가 임오년 화변 때 모진 목숨을 결단치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크나큰 죄요 한이니 즉시 죽고자 하였찌만 내 목숨을 뜻대로 하지 못하고, 위의 처분을 원하는 듯하여 스스로 굳이 참았다. 그러나 그 망극하고도 슬프기는 모년보다 덜하지 않았다. <한중록>
혜빈 홍씨는 임오년에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지금 아들이 효장세자에게 입적된 슬픔이 더 크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편을 잃은 것보다 아들이 형님부부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 왜 더 슬픈 일일까? 그것은 혜빈이 왕비가 되지 못하는 것까지는 참았지만, 대비는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형님부부에게 입적되면, 그녀는 평생 대비가 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녀는 왕의 친어머니라는 인정 외에 법적으로 아무 권한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법도가 엄중했던 왕실에서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망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혜빈 홍씨는 역시 참고 또 참았다. 정조가 모든 험난한 과정을 다 견뎌내고 왕이 된 데에는, 그 못지 않은 시련과 고난에도 묵묵히 인내했던 정조의 어머니 혜빈 홍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런 인고의 세월에 대한 보상은 있었다. 결국은 아들 정조가 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왕이 되자마자는 혜빈에게 시련의 시간이기도 했다.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던 노론 척신 가문인 홍씨 친정 집안이 숙청당한 것이다.
혜빈에게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정조의 즉위를 가장 방해한 세력이 자신의 친정 가문이었다. 오히려 정순왕후와 손잡은 노론 벽파가 세손을 지켜줄 때에도 홍씨 가문의 노론 척신세력은 세손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에 따라 정조의 즉위는 홍씨 집안의 멸문과 맞닿아 있었다. 홍씨의 작은 아버지 홍인한은 사사되었고, 홍씨 가문은 멸문하였다. 혜경궁은 자신의 아버지 홍봉한만은 사사시키지 않도록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고 정조는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사사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혜경궁은 아들이 왕이 되는 기쁨과 함께 친정집안이 몰락하는 슬픔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 혜경궁은 정조의 지극한 효도를 받았다. 아들 정조가 왕이 되었을 때가 혜경궁이 42살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66세에 정조가 죽을 때까지 이십년 넘는 시간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조는 품계가 애매했던 혜경궁만을 위한 대례복을 만들어주었고, 비록 대비는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었다. 혜경궁이 환갑이 되던 해에는 성대한 잔치와 더불어 사도세자의 묘가 있던 수원에도 행차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32년만에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무덤인 현륭원에 갔다. 그때 홍씨는 "주상이 10세를 갓 넘은 어린 나이로 온갖 어려움을 무사히 극복하고 성장하여 왕위에 오르시고, 청연과 청선도 10세 안팎의 어린애였는데, 남기고 간 그 골육을 간신히 보전하여 거느리고 와 내 당신 자녀 성취함을 고하게 되니 마음속으로 매우 자랑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그 모진 세월의 겪어내며 아들 딸을 훌륭히 키워 낸 자신이 남편에게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혜경궁은 아들 정조의 즉위로 그간의 모진 세월에 대한 보상을 다 받는 듯했다. 하지만 아들 정조가 죽자 다시 혜경궁에게는 시련의 시간이 온다.
<아들까지 죽은 뒤의 말년>
혜경궁은 아들 정조가 죽은 뒤에도 십오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시련의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된 손자 순조를 대신해 당시 가장 대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평생을 공들여 만들어 놓은 업적들을 법적인 시어머니 정순왕후는 대부분 폐기하였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가문과 오래토록 대립적이었던 풍산 홍씨 가문을 정조 때보다 더욱 매정하게 대했다.
법적 시어머니인 정순왕후가 노론벽파로 정권을 가득 채우고, 아들 정조의 개혁정치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었지만 혜경궁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정순왕후 중심의 노론벽파 일당체제에서 더 훗날 김조순 중심의 노론시파 일당체제로 옮겨가며, 손자 순조가 그저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정치에 나설 수 없었다. 아들 정조가 평생을 바쳐 이루려 했던 화합과 공존의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혜경궁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아무리 처참한 심경이라 하더라도 혜경궁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아들 정조의 개혁정치가 살해되었고, 일당독제체제, 세도정치가 진행된 상황에서 그녀의 심정이 원통했을지 아닐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을만큼, 그녀의 정치색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없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그녀가 냉혹한 정치꾼이라는 평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저 아들의 어머니였던 것같다. 그리고 친정집안에 대해 애착을 가진 딸이었을 뿐이다.
남편과 아들을 수차례 위기에 몰아넣었던 친정이었고, 아들의 즉위와 친정의 몰락을 맞바꾸었지만 그녀는 친정에 대한 미안함과 애착이 남아있던 딸이었다. 아들 정조, 그리고 정치적 반대세력인 정순왕후마저 죽자, 그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친정집안에 대한 신원을 꿈꿨다. 혜경궁은 아들 정조가 자신의 친정집안을 신원해주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죽게 되어 못이룬 일이라며 손자 순조에게 부탁한다. 그 물밑 작업이 <한중록>의 편찬인 것이다. 그 책을 펴내며 친정집안의 신원을 부탁하게 되었고, 순조는 할머니의 뜻대로 풍산 홍씨 집안을 신원해주었다.
남편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자신의 친정 풍산 홍씨가는 손자 순조에 의해 모두 신원되고 추승되었다. 비록 자신은 끝내 혜경궁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와 관련된 중요한 사람들이 모두 신원되면서 마음은 편안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며느리들의 지극한 효도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행복한 여인이었다. 비록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와 시누 화완옹주는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의 며느리인 효의왕후 김씨와 순조의 친모가 되는 수빈 박씨의 지극한 효도를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정순왕후가 혜경궁의 오빠 홍낙임을 사사시키려 했을 때, 정치적으로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던 혜경궁이었지만 단식에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두 며느리 효의왕후와 수빈 박씨까지 겨울날 석고대죄를 청하며 가세했다. 정순왕후는 비록 지위가 가장 높지만, 나머지 세 여인이 늘 그리 똘똘 뭉쳐 다녔기에 그녀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수빈 박씨는 후궁이지만 순조의 친모였기에 더욱 영향력 있었다. 혈연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강하게 묶여있는 세 여인이 함께 항의하자 천하의 정순왕후도 어쩔 수 없이 홍낙임의 사사를 취소했다. 하지만 더 뒤에는 결국 죽였다.
정순왕후는 내명부 여인의 서열을, 자신 다음으로 효의왕후로 하고, 그 다음으로 혜경궁과 수빈 박씨를 두었다. 혜경궁이 며느리보다 더 늦게 문안을 받도록 하며, 혜경궁에게 모욕을 주었지만, 혜경궁은 그런 처사에도 아무말하지 않았다. 다만 효의왕후가 자신은 혜경궁보다 먼저 문안을 받을 수 없다며 먼저 문안받기를 거절했다. 효의왕후는 대비가 되어도 일체의 존호를 받지않은 유일한 왕비인데, 그 이유가 시어머니인 혜경궁은 받지 못하는 존호를 그녀가 받기 민망했기 때문이다.
수빈 박씨 또한 혜경궁에게 효를 다하는 며느리였다. 정순왕후는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수빈 박씨를 선택하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었지만 수빈은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세 여인이 한 운명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그렇게 혜경궁은 비록 궁내에서의 법적인 지위는 명확치 못했고, 끝까지 열살이나 어린 시어머니의 견제를 받았지만 효성스러운 두 며느리가 있었기에 그녀들과 함께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그렇게 혜경궁 홍씨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궁에서 살며 두 며느리의 효도를 받았다. 그녀가 죽자 아들 정조가 정성껏 마련해놓은 사도세자의 현융원에 함께 묻혔다. 그녀는 조선왕비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며, 궁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긴 왕비로도 기록되었다.
<마치며>
노론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집안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걱정 없이 살았을 열살까지의 삶, 열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엄중한 궁중 법도를 배우며 적응했던, 어렵지만 그래도 모든 웃전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냈던 어린 세자빈의 시간, 하지만 열다섯살 성인식과 동시에 시아버지의 대리청정 명령을 받고 마음 조리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낳은 첫 아들이 세살의 나이로 죽고, 태중의 아이만은 반드시 지켜내리라 결심했을 열여덟의 세자빈. 그 아들은 무사히 낳았지만 자신과 남편을 지지해주던 세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남편의 홧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남편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득세하는 것을 목도하며, 비통한 심정으로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살리는 결심을 했을 세자빈 홍씨. 스물여덟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아들만은 꼭 지켜내리라 결심하며 더욱 심한 고난의 14년을 견뎌냈다.
다행히 그 인고의 시간에 대한 보상을 아들 정조의 즉위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의문사를 당한 아들의 개혁이 살해되는 것까지 지켜보며, 아들이 그토록 견제했던 일당독재체재가 계속되는 것까지 모두 목도한 후 81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이렇게 그녀의 한 평생을 다시 정리해보면서, 그녀에게 붙여진 냉혹한 정치꾼이라는 평가는 다시 한번 너무 과하다고 생각된다. 동시대 여인이던 정순왕후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나선 것에 비하면, 혜경궁이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구한 그 선택을 두고, 정치꾼이라고 말하는 자체도 무언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또한 <한중록>에 대해서도 혜경궁이 친정집안의 신원을 목적으로, 왜곡과 과장이 심하게 이루어진 책이라는 비판이 가해지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육십중반의 노인이 삼십년도 더 전의 일을 오로지 개인의 기억에만 의존해 작성한 글이기에 당연히 왜곡와 과장은 있을 수 있고, 그 목적 또한 부적절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그 글이 기본적으로 거짓이기는 어렵다. 왕의 친할머니로서의 명예와 여전히 그 사건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존재했을 시기에 무한정 거짓의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정도의 왜곡과 과장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의 진실성과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삼종지도의 법이 그녀에게만큼 상충되었던 여인은 또 없었을 것이다. 노론인 아버지와 소론인 남편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훗날 왕이 되어야 하는 아들과 왕으로 삼지 않으려는 아버지 사이에서의 갈등. 그 모든 갈등에서 그녀는 어떤 정치색도 없었다. 다만 늘 아들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아들에 대한 선택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서의 삶을 평생 살아야 했고, 친정집안이 몰락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녀는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지켜봐야 했던 불운한 여인이었다. 평생을 궁에서 살면서 그녀가 그녀 뜻대로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모든 걸 인내하며 묵묵히 살았던 그녀였다.
평생을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던, 오로지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야했던 그녀의 삶이 측은하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