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순왕후 김씨

by SOL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계비로,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51세 연상의 66세 영조와 혼인했다. 그 나이 차이만 봐도 그녀의 결혼 생활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을 쉽게 예측해볼 수 있는데, 하지만 영특했던 그녀는 그 상황 속에서 최대한 살아남고자, 이득을 챙기고자 애썼다.


남편인 영조가 살아있을 때는 남편의 의해 직접 간택된 왕비로서 그녀의 입지도 탄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영조의 아들이나 손자가 왕이 된다면, 그녀가 찬밥신세가 될 것은 뻔했다. 영민했고 권력욕도 있었던 그녀는 그런 상황을 미리 충분히 대비했다.


그리하여 법적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고, 훗날 법적 손자 정조에게도 정치력을 행사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리고 정조가 죽고 법적 증손자 순자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됨으로써 그간 준비해온 그녀의 권력욕과 정치적 역량을 펼쳐보였다. 그녀는 스스로 여군, 여주임을 자처하며 마음껏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그녀 사후 그녀는 개혁군주 정조를 방해하고 정조의 빛나는 업적까지 모두 살해한 것에 대해, 남성중심의 유교사회에서 여주를 자처한 것에 대해 심한 비판을 받았고, 또 훗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비난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시대 왕비 중 문정왕후와 더불어 최고의 악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정도가 보통 정순왕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합당한 것일까?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암살 시도(정유역변)와 독살, 정조의 죽음 이후 그의 개혁정책을 말살, 그 결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발생, 그 모든 책임이 정말 그녀에게 있는 것이 맞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정조를 좋아한다. 그는 지덕체를 모두 갖춘, 오늘날로 치면 엄친아 중에서도 최고 엄친아라 할 수 있는사람이다. 왕 중에 정조만이 유일하게 군자의 칭호를 받았는데, 그만큼 훌륭한 왕이었던 그에게 무한한 동경을 느끼고,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잔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열살 어린 나이로 지켜봐야 했던 유년기의 그 불운에 안쓰러움이 느껴지고, 왕이 되기까지의 그 험난한 과정과 왕이 되어서도 아무도 믿지 못한 채 고독한 정치를 해나가야 했던 그에게 측은함이 느껴진다. 개혁정치로 저물어가는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그가 급사함으로써 그의 모든 꿈이 무너진 것은 물론 조선 또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의심스러운 죽음에 비통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그의 의심스러운 죽음을 유발 또는 방치했다는 혐의와 함께, 그의 사후 그의 개혁사상을 모두 살해함으로써 전근대로 회귀하고, 이후 안동 김씨에게 세도정치의 모델을 제시해 줌으로써, 결국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인도했다는, 성군 정조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인물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고, 세손인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으며, 왕이 된 정조를 내내 괴롭혔고,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위대한 개혁정치를 모두 폐기했으며, 정약용을 비롯한 정조가 사랑했던 인재들을 모두 처단한, 그야말로 정조에게는 원수와 다름없을만큼, 그렇다면 정조와 같은 편인 우리에게 역시 그녀는 악녀 중에서도 최고 악녀로 취급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정말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원수같은 존재였을까? 그리고 정조의 개혁정치가 무너지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진 그 모든 책임을 오롯이 정순왕후에게 묻는 것이 합당할까?


정조에게 위협을 주었고, 정조의 개혁을 몰살한 정순왕후가 나 또한 무진 미웠다. 그녀 하나의 사욕과 오판 때문에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그녀에 대한 역사학계의 증오 또한 마땅하다 여겼다.


그런데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정조는 즉위 초 혜경궁 홍씨 집안은 풍비박산 낸 데에 반해 정순왕후 가문은 왜 손대지 않았을까? 물론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가 귀양에 처해졌지만 그것은 경주 김씨 집안에 그 하나 김귀주에게만 처해진 벌이었고, 그것도 즉위 후 몇개월이나 뒤였다. 왕이 되자마자 친어머니인 혜경궁 집안을 풍비박산 낸 정조가 정순왕후 가문에 대해서는 너무 가벼운 처사가 아닌가? 정조가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만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정조가 아꼈던 신하 홍국영은 왜 정순왕후와 손잡은 것일까? 누구보다 홍국영을 신임했던 정조인데, 홍국영이 정순왕후와 손잡는 것을 정조는 왜 보고만 있었을까? 정조처럼 영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 자신의 충복 홍국영이 정순왕후와 의탁했음을 알고도 왜 묵과했을까?


정조 시대 영의정 심환지가 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똑같이 영의정인 걸까? 심환지가 노론벽파의 수장인 것을 생각하면 정순왕후가 그를 영의정 삼은 것은 이해가 되지만, 정조는 왜 반대세력인 그를 영의정에 둔 것일까? 정조가 정말 적과의 동침이라 생각해서 심환지를 영의정에 둔 것일까? 정말 그 이유만으로 재위 24년째의 노회한 정치가인 정조가 죽을 때까지 그 중요한 자리에 노론벽파의 수장, 정순왕후의 사람을 둔 것이 말이 되나?


몇해전 발견된 정조와 심환지의 서찰을 보면 둘 사이뿐 아니라, 노론벽파와 정조의 사이도 우리가 알던 것처럼 그리 험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편지들로 인해 정조의 타살 의혹 또한 많은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 어쨌든 심환지와 그리 정다운(?)편지를 주고받았던 정조였는데, 그렇다면 정순왕후와의 사이도 우리가 알던 것과 다소 다르지 않을까? 실제로 그 편지에서 정조가 스스로 정순왕후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심환지에게 말한 부분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조가 직접 간택한 안동 김씨 가문의 세자빈이었는데, 왜 정순왕후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일까? 왜 직접적 원인제공자인 정조가 아니라 오히려 안동 김씨와는 반대파였던 정순왕후가 그 모든 책망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일당독재의 모델은 정순왕후 이전에 숙종부터 시작해 오랜시간 지속되던 정치행태가 아닌가? 정순왕후가 그리 획기적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책임까지 정순왕후에게 묻는 것일까?


정순왕후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그렇게들 무시했던 여성의 몸으로 과연 저 모든 막대한 정치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정말로 정순왕후가 저런 일들을 주도적으로 처리한 것이 맞는 것인지.. 그렇다면 정순왕후는 정말로 대단한 여자가 아닌가? 과연 정말 정순왕후가 저 모든 일을 한 것일까?


아니다.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의 입장이었고 그녀가 수렴청정을 한 것은 맞지만, 저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질만큼의 정치력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과장되었고, 왜곡되었다. 그것은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을 그저 한 여성에게 덮어씌우려했던 남성들에 의한 과장과 왜곡이었다.


과연 정순왕후 김씨의 진실은 무엇일까? 물론 그 진실을 다 파헤칠 순 없겠지만 그녀에게 씌워진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겨가며 그녀의 삶을 따라가보자.




<늙은 왕의 영민한 어린 신부>


정순왕후는 영조 35년 1759년에, 15세의 나이로 51세 연상의 66세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법적인 아들 부부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25세로, 15세의 정순왕후보다 10살 연상이었다. 그리고 법적인 손자가 되는 정조는 당시 8세로 정순왕후보다 불과 7세 연하였다.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삼년상이 끝날 무렵, 영조는 대신들의 향해 왕비 간택을 독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역정을 냈다. 대신들은 66세의 고령인 영조가 왕비를 새로 간택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영조는 새왕비를 간택하고 싶어했다.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것을 생각해보면 영조는 곧 죽어도 아무 문제 없을만큼 고령인데 이제와서 새왕비라니 노망이라도 난 것일까? 왜 66세의 영조는 그 나이에, 신하들의 암묵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새왕비를 맞이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왕비 집안은 정계의 새로운 별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이유 때문에 대신들은 영조가 새왕비를 간택하는 일을 반대했다. 영조는 왕비 간택을 권하지 않는 대신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했고, 대신들은 왕비를 간택한 후까지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내비쳤다. 그것은 단순히 왕의 여자 문제가 아니라 정권을 더 주도하고자 했던 왕과 신하의 정치적 기싸움이었다.


탕평책을 추구했던 영조였지만 이인좌의 난 이후 조정은 소론이 거의 축출되고 노론으로 가득찼다. 영조는 왕권 강화와 일당독재를 막기 위해 거대해진 노론을 분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 방법으로 외척을 이용한 것이다. 영조는 며느리 집안인 풍산 홍씨를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 집안으로는 부족함을 느꼈고, 이에 새 왕비 집안을 가세할 생각이었다. 그런 영조의 계획대로 왕비로 간택된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는 풍산 홍씨와 함께 훗날 거대한 외척 세력이 되어 때론 협력하고 때론 상충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왜 영조는 새로운 권력으로 경주 김씨를 선택한 것일까? 영조가 원조노론에 대항할 가문을 찾긴 했지만, 이미 막강한 힘을 가진 집안은 꺼려졌다. 권력욕이 많은 가문이라면 그 가문이 다시 왕권을 위협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노론 출신이되, 최대한 한미했고, 권력욕도 없어보이는 집안을 원했다. 그에 마땅한 인물이 김한구였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당시 36세의 나이였지만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아직 관직에도 나아가지 못한 장인은 영조의 그 첫번째 조건에 잘 맞는 인물이었다.


거기에다 경주 김씨 가문은 영조와 개인적 인연이 깊은 가문이기도 했다. 김한구의 아버지 김선경과 사촌지간이던 김흥경은 노론의 핵심 인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영조가 총애했던 첫딸인 화순옹주의 남편이 경주 김씨 김한신이었다. 옹주의 남편 김한신은 야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즉 김흥경처럼 충성스런 신하이자, 김한신처럼 야심이 없는 경주 김씨 가문에, 혈통은 좋지만 관직에도 나아가지 못했던 야망이 없어보이는 김한구는 왕의 사위로 제격이었다.


거기다 정순왕후 김씨는 영민한 처녀였다. 그녀가 이미 내정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간택자리에서 보인 그녀의 영특함은 그녀가 왕비로서의 자질이 충분함을 보여준다. <대동기문>에 의하면 영조는 직접 왕비를 간택했는데, 간택 당시 영조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규수들이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김씨 처녀는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했다. 또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보릿고개라는 답을,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금을,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바다나 강 연못 등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비가 오는 재간택날 이곳의 행랑이 몇 칸인지 물었는데, 다른 처녀들이 모두 건물을 쳐다볼 때 김씨 처녀만이 바닥을 보며 물줄기의 수를 통해 행랑의 칸 수를 맞췄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간택후보들이 앉을 방석에 후보들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다른 처녀들이 모두 앉을 때 정순왕후는 앉지 않았다. 그 연유를 묻자 "어찌 딸 된 자가 아버지의 존함을 깔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했다고 한다.


이처럼 정순왕후는 다른 왕비들에 비해 영특함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녀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혜경궁 홍씨마저 그녀의 영민함에 대해서는 인정할만큼 그녀는 보기 드문 총명한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 총명함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왕비로 간택된 후 상궁이 옷치수를 재면서 뒤돌아 서라는 말에 "네가 돌아서면 될 것을 감히 누구보고 뒤돌라 하느냐" 호통을 쳤다고 한다. 겨우 열다섯의 어린 처녀가 입궁하자마자 상궁에게 호통을 칠만큼 그녀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의 그 카리스마는 훗날의 수렴청정에서도 드러났다. 스스로를 여군, 여주로 칭하며, 대신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된 것이 이미 여군, 여주라는 용어는 선대 왕비들에게 여러번 쓰였던 말이다. 이를 굳이 정순왕후만 쓴 것처럼 흑색 선전하는 것 역시 그녀를 비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좀더 자주, 과하게 쓴 점은 있지만 그 용어는 이미 왕비들에게 사용되었던 말로 그 용어 자체가 그리 색다를 것은 없었다.



당시는 왕과의 혼인을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일부러 간택단자를 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할 수 없이 간택단자를 낸 경우 일부러 이상한 행동을 해서 간택에서 떨어지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명한 대답으로 왕비가 되려고 노력했던, 15세의 처녀가 66세의 늙은 왕에게 시집갈 것을 결심한 데에는, 그녀 역시 무언가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욕 밖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야사의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면, 모두가 기피했던 그 간택에 충실히 임하여 왕비 자리를 탐냈던 것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단 하나, 오로지 권력뿐일 것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 집안은 새로운 정계의 별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 집안이 정계의 중심으로 자리잡기까지는 그녀가 왕비가 되고도 십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점차 권력의 중심으로>


비록 15세의 어린 왕비였지만 남편 영조는 그녀의 권위를 세워주고자 노력했다. 영조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 김선경보다도 나이가 다섯살이나 더 많았다. 그처럼 고령인 자신과 혼인하게 된 어린 신부에 대해 미안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어린 새왕비 정순왕후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먼저 그 부부의 혼례식에서부터 영조는 힘을 많이 실었다. 영조의 친영례에 참석한 인원은 천명이 넘었으며 동원된 말만 390여 필 정도로 규모 면에서 왕의 결혼식 중 역대 최고라 할 수 있는 거대한 혼례식이었다. 또한 선조이후 300년이나 하지 않았던 왕비의 행사인 친잠례도 다시 거행하며 왕비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그녀에게는 매우 다행으로 영조는 재혼하고도 17년을 더 살았다. 그런 오랜 재위 덕에, 그녀 역시 왕비로서 입지를 굳혀갈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경주 김씨 가문 역시 점차 정계의 중심으로 자라잡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는 당시 과거 급제도 못할정도로 권력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고, 그녀의 집안 역시 정치권력으로는 한미한 가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왕비가 되자마자 갑자기 정계의 중심인물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정치적으로 한미했던 가문의 여식인 그녀가 어떻게 노론벽파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영조를 왕위에 올려준 원조 노론의 힘은 막강했다. 영조 또한 자신을 왕에 올려준 그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론 역모 반란 이후 그들 일당독재 체제가 이루어지자, 탕평책을 추구했던 영조에게 원조 노론은 불편한 세력이 되었다. 영조는 원조 노론을 멀리하고, 대신 그들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노론 척신(풍산 홍씨, 경주 김씨)을 구축했다. 영조의 후원 하에 새롭게 떠오른 척신 노론에 밀리던 원조 노론은 세자에게 구애의 손길을 내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세자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원조 노론의 손길이 황당하기만 했다.

"김시찬의 일은 대조께서 처분을 내렸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진실로 매우 놀랍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뜻대로 탕평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론에 대항할 얼마남지 않은 소론을 끝까지 챙겼던 사람이다. 그리고 노론은 그런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와 세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니, 세자는 "진실로 매우 놀라울"만큼 황당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원조 노론은 현정권과 차기정권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왕실의 누군가와는 손잡아 훗날을 도모해야했던 원조 노론에게 어린 왕비 정순왕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원조 노론의 연합 제안은 정순왕후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험난한 정치판에서 열다섯 어린 여자애가 의지할 수있는 거대한 손을 잡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하여 원조 노론과 정순왕후가 연합한, 훗날의 노론 벽파가 되는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원조 노론과 손잡은, 영민했던 정순왕후는 17년이라는 적지않은 세월을 왕비로 보내며, 그 시간동안 뛰어난 정치력까지 학습했다. 그리고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게 된 1776년, 서른둘이 된 그녀는 더이상 열다섯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다. 강신인 노론 벽파의 구심점이 되는 그녀는 필연적으로 일곱살 연하의 손자 정조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일곱살 연하의 손자 정조와의 관계>


그런데 알려진대로 정순왕후는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인물일까? 정조는 즉위년 3월부터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척신 세력을 숙청했다. 영조는 노론에 대항할 척신 세력을 키웠는데, 영조 말기에는 오히려 그 힘이 너무 비대해져 세손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영조가 키운 척신 홍봉한 홍인한 형제,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그리고 영조의 후궁 문녀 등을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축출했다. 하지만 그 숙청에서 또다른 척신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일가나 노론 벽파 세력은 빠져있다.


정조의 이런 처분만 봐도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것은 노론벽파나 경주 김씨보다는 풍산 홍씨를 비롯한 왕실 척신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도 홍인한은 세손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세 가지라는 삼불필지(三不必知)를 말하며 세손을 무시했다.


이에 비해 정순왕후는 정조를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홍국영과 손잡은 정순왕후는 세손을 도와주는 입장, 즉 세손과 연합세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정조는 그의 즉위를 방해하는 풍산 홍씨와 정후겸의 척신 세력에 대립하여, 측근 홍국영과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즉위 후 풍산 홍씨와 정후겸의 척신 세력은 숙청한 데 비해, 정순왕후측 인물인 정이환, 김종수 등을 계속 중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오랜 경쟁 관계였던 척신 홍씨 가문을 제거하고 싶었고,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하는 홍씨 가문을 축출해야 했다. 두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달랐겠지만 어쨌든 홍씨 가문 척결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던 두 사람은 연합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풍산 홍씨 척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정조와 뜻을 같이하며, 정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풍산 홍씨 제거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그녀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정조를 지지할 필요가 있었다. 남편 영조가 정조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정순왕후는 차기 왕으로 정조를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정조의 편에서 정조의 즉위를 돕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처사였다. 영민했던 정순왕후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법적 손자인 정조가 왕이 될 경우를 분명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을 연결시켜 준 이는 홍국영이다. 홍국영은 세손시절부터 정조의 최측근 친위세력이었다. 정조가 영조의 척신 세력이 점령한 궐에서 다수의 암살 위협에도 살아남았던 것은 홍국영의 공이 컸다. 정조는 신변 안전을 책임지는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모두 홍국영으로 임명할 만큼 그를 신임했다. 그런 홍국영과 정순왕후가 한 배를 탔다는 것에서도 정순왕후가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기보다는 지지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정순왕후와 홍국영의 친밀함은 정조의 후궁간택에서 알 수 있다. 정조 2년 홍국영의 여동생이 원빈으로 봉해져 가례를 올렸다. 그 바탕을 마련한 것이 정순왕후의 언문 교지이다. "아 400년이 된 종사의 의탁이 오직 주상의 몸 하나에 달려 있는데, 춘추가 거의 30에 가까워졌는데도 지금까지 종사의 경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하략)" 정순왕후의 이 언문 교지에 의해 후궁 간택이 이루어졌고, 내정된대로 홍국영의 여동생이 간택된 것이다.


홍국영의 여동생은 원(元)이라는 칭호를 써서 후궁 중에서 가장 으뜸임을 나타냈다.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는 비통감을 느꼈고, 홍국영은 왕비 김씨마저 폐위시킬 작전을 폈는데, 정조가 효의왕후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신뢰는 했으므로 그것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원빈 홍씨는 간택된지 1년만에 병사함으로써 홍국영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후일을 도모했다. 상계군의 이름을 완풍군으로 바꾸었는데,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를 뜻한다. 그 이름에서 홍국영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도리어 화가 되어 훗날 상계군(완풍군)은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홍국영 또한 정조에게서 외면 받게 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홍국영과 정순왕후가 결탁했다는 것, 그리고 최소한 즉위까지는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도움을 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마땅한 지분을 요구했을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노론 벽파를 꾸준히 등용하였다.


하지만 홍국영과 정조, 정순왕후 모두 곧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심을 잃고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홍국영을 정조는 꺼려했고, 홍국영은 정조의 마지막 배려를 받아 32살의 젊은 나이로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강신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보냄으로써 정순왕후와도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즉위 후 정조는 정순왕후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입장에서 보면 정조가 먼저 정순왕후를 배신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손시절 정순왕후의 도움은 분명 정조의 즉위에 큰 힘이 되었다. 정순왕후는 그런 자신의 지분을 챙겨주길 바랬다. 하지만 정조는 정순왕후의 오라비를 귀양보내는 처분을 내린 것이니,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정조가 먼저 배신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정조 입장에서 보면 왕권을 위협하는 강신 제거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정이환, 김종수 같은 정순왕후 측 인물들이 조정에 상당수 자리잡고 있었기에 김귀주는 자신의 지위가 안정적으로 여기고 과한 행동을 했다. 하지만 정조는 강신을 견제해야 했고, 경고의 의미로 김귀주 귀양보냈다. 김귀주의 유배는 너무 과하게 나댄던 그 한 사람의 유배였지, 정순왕후 세력을 모두 몰아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조는 정순왕후의 양해를 미리 구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조의 입장이고 어쨌든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할 일이기는 했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홍씨 척신제거와 정조의 즉위까지는 뜻이 같았지만, 그 후에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강신 노론벽파의 수장인 정순왕후와 강신을 처단하려는 정조는 필연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노론벽파 일당체제를 원하지 않던 정조는 노론시파와 남인까지 골고루 등용했고, 정순왕후는 그런 정조가 탐탁치 않았을 것이며, 두 사람의 기싸움은 불가피했다. 정조는 김귀주를 유배보냄으로써 경고를 보냈고, 정순왕후는 정조를 흔들기 위해 은언군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정조는 노론벽파를 축소시키고자 했지만, 그러면서도 노론벽파의 수장이자 정순왕후 사람인 심환지를 최측근으로 두었다. 김귀주가 유배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정순왕후의 입지가 축소되진 않았다. 노론벽파는 그녀를 중심으로 건재했 정조는 그녀에 대한 예우를 다하며 왕실 최고 어른으로 대했다. 정순왕후 입장에서도 겨우 7살 연하의 뛰어난 왕인 정조를 함부로 대할 수 없고, 그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몸을 사렸을 것이다. 정조가 무서운 사람이란 걸 정순왕후는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정순왕후도 가볍게 처신하진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적과의 동침처럼 적 같지만 때론 협력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정조 재위 24년 기간이다.


개혁군주인 정조를 아끼는 마음에서들 정조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24년이라는 짧지 않은 재위기간과 왕들의 평균 수명 47세를 넘은 49세의 수명을 기록한다. 즉 정순왕후 입장으로는 어쨌든 24년간 정조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것이다. 정조의 즉위를 도왔지만, 권력을 두고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였기에, 정조가 왕이었던 24년의 시간은 정순왕후에게 결코 편안한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그녀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왔다.



<어린 순조를 대신한 수렴청정>


정조의 죽음에 대해 정순왕후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종기를 치료하던 정조가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정조가 죽기 몇달전 정조가 정국의주도권을 반전시키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오회연교를 내렸다. 오회연교란 사도세자 죽음에 가담한 자들의 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묻지 않을테니 투항하라는 뜻의 전교였다. 그런 후 정조는 남인 이가환을 영의정으로 삼고, 동부승지를 사양하고 낙향했던 정약용도 재등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 후 두달만에 사망한 것이다. 이 모든 정황들을 근거로 정조가 정순왕후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물론 오회연교 이후 정순왕후와 노론벽파에서는 상황이 심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연구에서 스트레스와 과로가 심했던 정조가 종기 치료를 받으며 더 쇠약해졌고, 결정적으로 종기 치료 방법으로 연훈방을 썼는데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급사했음이 밝혀졌다.


정조가 정순왕후를 마지막으로 부른 이유는 정순왕후가 자신을 독살했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보다는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그녀이므로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을 전하려던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나 역시 정조를 사랑하지만 정조가 마지막에 수정전을 부른 것은 독살을 의심하기보다는 후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임이 더 설득력 있어보인다.


우리에게는 개혁정치가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이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정순왕후와 노론벽파로서는 절묘한 타이밍에 정조가 승하해 준 것이다. 그리고 정순왕후에게는 열다섯 꽃다운 나이로 51세 연상의 늙은 왕과 결혼한 보람이 드디어 찾아오니, 어린 왕 순조를 대신한 수렴청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여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권력이라도 마음껏 휘둘러 볼 기회가 온 것이다.


1800년 7월, 11세의 어린 증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다. 그 수렴청정은 이전의 수렴청정과는 다소 달랐다. 정순왕후는 순조와 함께 직접 편전에서 정무를 주관했다. 발 앞에 앉아있는 순조는 허부아비에 불과했고, 발 뒤에 앉아 있는 정순왕후가 실제 왕과 같은 권위와 방식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수렴청정 절목을 보면 대왕대비는 임금과 똑같이 경연에 참석하고, 진상 물건도 임금의 예와 똑같이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김관주, 김일주, 김용주 등 경주 김씨 가문의 인물을 대거 등용하며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가득채웠다. 그것으로 모자라 노론 벽파에 대항하는 다른 세력들은 숙청했다. 특히 정조가 등용코자 애썼던 남인들은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유박해이다.


순조 1년(1801) 1월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겠다고 선언하며, 그 유명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학이 퍼지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목적은 정조가 등용하려던 남인에 대한 탄압이었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은 대거 사형에 처해졌다. 남인 영수 이가환, 남인 정약용과 그의 형제 정약전과 정약종, 이가양, 권철신, 이승훈 등이 사형당하거나 귀양에 처해졌다. 그렇게 신유박해로 남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남인 뿐 아니라 그동안 노론벽파에 대항했던 세력들도 숙청되었다. 정유역변의 주모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비호해주었던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정조가 사랑했던 이복동생 은언군까지, 정순왕후는 그간 눈엣가시였던 인물들을 모두 이단으로 묶어 숙청해버렸다. 이단을 처단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명본은 허울 뿐, 그저 노론 벽파에 대항하는 인물들은 모두 숙청당한 사건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개혁정치들을 하나씩 폐기해갔는데, 먼저 순조 2년 1월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었던 군대 장용영을 혁파했고, 이어 정조가 공들여 이루어놓은 규장각을 축소하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정순왕후가 분명 조의 개혁정치를 몰살한 인물이 맞다. 하지만 이제 정순왕후 입장을 들어보자.


먼저 신유박해의 발생 배경을 살펴보자. 순조 즉위년 8월, 그러니까 즉위 한달여만에 남인을 중심으로 한 봉기가 일어났다. 남인이 주가 되어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에 대한 대항이 일어나자, 노론 벽파 입장에서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물론 신유박해로 인한 희생이 너무 컸고, 그로 인한 정치적 후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발생 배경에 있어 남인의 성급함이 원인 제공이었고, 이전까지도 반란이 일어나면 그 주동 세력에 대한 복수는 당연한 처사였다. 또한 신유박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정순왕후에게만 물을 수도 없다. 오히려 정순왕후는 신유박해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노론벽파측 주장을 몇번이나 묵살하였다. 정약용을 사사하라는 요구를 끝내 거절하고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한 사람도 정순왕후였다. 즉 신유박해는 노론벽파와 정순왕후의 합작품이지 결코 그녀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고, 오히려 정순왕후는 신유박해를 강경하게 주도해나갔던 입장도 아니었으며 정약용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순왕후 덕분이다.


장용영의 경우 이미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많았고, 정조를 위한 군대였기에 정조 사후 혁파 외에 다른 방법도 딱히 없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에 반하기 위해 장용영을 없앤 것이 아니라 그저 실효성 없는 것으로 판단해 없앤 것이다. 또한 규장각의 축소 역시 그 권한이 너무 비대해져 승정원과 육조의 업무까지 관여하며 방해했기에 축소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 부작용은 남인인 정약용도 인정할 정도였다. 즉 장용영 혁파와 규장각 축소를 가지고 정순왕후가 정조의 개혁사상을 전면 부인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뜻을 계승하여 이룬 업적도 있다. 백성들의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 등의 통치 질서를 확립했고, 정조가 미처 다하지 못한 공노비 혁파를 이루어냈다. 이는 정조의 뜻을 계승한 것으로, 정순왕후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순왕후가 정조의 뜻을 가장 잘 따른 것으로 정조가 살아생전 정한 순조의 왕비를 그대로 간택한 것이었다. 순조가 세자일 때 세자빈으로 김조순의 딸 김씨 처녀가 내정되었다. 하지만 삼간택이 미처 다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정조가 승하했고, 당연히 정조의 삼년상 이후로 순조의 혼인은 미뤄졌다. 김조순은 노론 시파로, 정순왕후와는 대립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뜻대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였다. 노론 벽파 세력에 의해 왕비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정순왕후는 정조의 뜻을 존중해 순조의 비로 김조순의 딸을 그대로 간택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정순왕후가 정조의 뜻을 크게 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순조가 15세의 나이로 친정이 가능해지자 정순왕후는 3년반의 수렴청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즉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그 당시로 봤을 때는 크게 이상스러울 것이 없었던 정치였던 것이다. 오히려 합리적인 방법으로 순조와 정조를 잘 이어준 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왕 정조에 반대해 그의 정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현대의 인식은 큰 오해이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순조비 간택을 반대한 권유의 탄핵을 시작으로 벽파에 대한 시파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이에 정순왕후가 6개월만에 다시 수렴청정을 시도한 바도 있지만, 반대를 당하자 선선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 1년 후 정순왕후는 56세의 나이로 죽는다. 영조의 뜻에 따라 첫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아닌 정순왕후 김씨가 영조와 함께 묻혔다. 그녀의 사후 노론 벽파는 무너지고, 김조순의 노론 시파가 정권을 독차지했고, 그 후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이루어졌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3년 반 정도이다. 물론 이루기는 어려워도 망가뜨리는 일은 쉽기에 정조가 24년간 차근차근 이뤄놓은 치세들이 만4년도 안되어 폐기된 점이 있다. 장용영과 규장각의 경우는 그 폐기가 오히려 합당해보이지만, 정조가 평생 애썼던 탕평책에 대해서는 정순왕후가 망가뜨린 면이 있다. 신유박해를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고 노론 벽파로만 조정을 가득채우고자 했던 그녀로 인해 정치가 후퇴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신유박해의 책임을 그녀에게만 물을 수는 없으며, 정조의 업적을 완전히 살해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분명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즉 정순왕후에게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정조의 치세에 대해 완전히 부정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오히려 성군 정조의 크나큰 정치적 공백을 그나마 정순왕후가 잘 채워주었다. 사실 정조의 정치 스타일은 그처럼 위대한 왕이 아니고서야 이뤄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정조의 바로 뒤를 정순왕후가 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조의 뒷자리는 어떤 왕이 와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나마 정순왕후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뒤이은 순조의 행적을 보면 차라리 정순왕후가 낫지 않았나 싶다.


수렴청정을 했던 다른 왕비와 비교해서도 그녀가 딱히 잘못한 일보다는 업적이 더 많다. 첫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에 비해 권력을 보다 더 당당하게 행사한 점에 대해 비난받지만, 그것은 남성들의 시각에 의한 합당치 않은 비난일뿐이다. 문정왕후 윤씨와 비교해서도 문정왕후가 권력을 위한 권력 그 자체에 집착했다면, 정순왕후는 권력보다 정치에 더 염두한 권력을 취했다. 훗날의 순원왕후 김씨와 비교하여 정순왕후는 나름의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선정을 베풀겠다는 마음으로 수렴청정에 임하였고, 그 나름의 정치적 업적도 보여주었다.


어쩌면 정순왕후는 정조라는 위대한 인물을 더 돋보이게 하는 희생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순왕후가 정조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적도 분명 있었고, 또 정조가 견제한 일당독재체재로 회귀하고자 한 잘못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오해들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부의 잘못으로 그녀 전체가 악녀로 매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순왕후는 정말 악녀인가>


1.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나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때가 그녀의 나이 18세로 궁에 들어온지 겨우 3년째였다. 아직 십대의 나이였고, 당시는 그녀 집안도 정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녀가 얼마나 정치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은 뒤 급부상한 가문은 경주 김씨가 아닌 풍산 홍씨 가문이었다. 경주 김씨 가문은 임오화변 이후 8년 쯤 지나서야 정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더 일조한 가문에 대한 답은 나온다.


앞서 원조 노론은 영조에게서 버림받고, 사도세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바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더 차갑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 원조 노론은 차기 정권이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더 불리한 상황을 예측했고,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장인이 되는 풍산 홍씨는 영조에게 충성심이 없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이에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사도세자를 죽일 뒤주까지 대령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한 것이다.


즉 임오화변에 주축이 된것은 정순왕후 집안보다는 원조노론과 홍씨 가문이었다. 왕비가 된지 겨우 3년 남짓인 정순왕후 집안에서 그리 빨리 상황을 판단하고 상황을 주도하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원조 노론과 손잡은 정순왕후 집안이 임오화변에 동조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상황을 주도하진 못했다. 임오화변 이후 정계의 중심세력이 된 것은 단연 홍씨 가문이었다. 그만큼 공로를 인정받아 영조가 등용한 것이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정순왕후 집안은 노론벽파와 손잡았을 뿐 정계의 중심세력이 되진 못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과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에 불과하다. 물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묵인하고 동조한 면은 있겠지만, 궁에 들어온지 겨우 3년남짓으로 열여덟인 그녀가 그 일을 주도하기는 힘들었을 상황이다.



2.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고, 정조를 위협했나


앞서 살펴보았듯 정순왕후는 오히려 정조의 즉위를 도와준 인물로 봐야 한다. 정조가 즉위 후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인물들을 척결할 때 정순왕후 쪽 사람들은 빠져있었고, 즉위 초 정순왕후 쪽 인물들을 대거 등용한 것을 봐도 즉위까지는 두 사람이 연합세력이었다. <명의록>에서도 정조가 정순왕후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가 즉위 후 몇 개월 뒤 김귀주를 귀양보낸 것을 두고 정순왕후가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데, 이것은 김귀주에 대한 경고였지 정순왕후측 세력을 대거 축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김귀주가 그만큼 나댈 수 있었던 것도 정조가 즉위 초 정순왕후 세력을 많은 등용한 결과이므로, 정조와 정순왕후가 즉위까지는 정치적 파트너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나눠가지기 싫었던 정순왕후와 노론벽파, 하지만 노론벽파 뿐 아니라 노론시파, 소론, 남인까지 골고루 등용하며 정치에 새바람을 불어넣고자 했던 정조는 더이상 연합관계일 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정조를 끊임없이 흔들고자 했고, 정조 역시 정순왕후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둘 사이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다. 정순왕후는 왕인 정조의 눈치를, 정조는 노론벽파의 구심점이 된 정순왕후의 눈치를,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공존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조는 재위내내 정순왕후를 정계에서 소외시키지 않았고, 여러 기록에서도 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 어록집인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드러냈다. 속내까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그렇게 험악한 관계가 아닌 채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순왕후뿐만 아니라 영의정 심환지와도 마찬가지였다. 몇해전 발견된 정조와 심환지의 서찰을 보면 둘 사이가 꽤나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



3. 정조 사후 그의 개혁정치를 혁파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포문을 열었나


정순왕후가 정조의 개혁정치를 혁파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정조가 수립한 장용각과 규장각은 이미 정약용 같은 남인도 그 폐해를 지적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정순왕후가 정조의 뜻을 따라 이룬 업적 또한 존재하기에 정조에 대해 완전히 부정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가장 경계했던 일당독재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순왕후는 노론벽파로 조정을 가득채웠고, 정조가 신임한 남인에 대해서는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만큼의 심한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완전히 일당독재 체재를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순조 즉위초 난을 일으킨 남인에 대한 복수였지, 노론 벽파와 대립하던 노론 시파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가 없었다. 그 결과가 훗날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인 것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일당독재 체제를 성립했더라면 최소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끈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비난은 말이 안된다. 물론 노론 벽파 일당체재를 원했던 잘못은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실현하지도 못했으며, 특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그녀가 이끌었다는 것은 그녀 입장에서 어이가 없는 말이다.


그녀가 4년이 안되는 짦은 수렴청정을 마치자마자 순조의 장인이 되는 노론 시파의 김조순은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일당 독재체재를 수립했다. 김조순은 정조가 순조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왕의 최측근이 되어 병권과 관련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순조를 움직였고, 곧 정계는 오로지 그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세도정치가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정순왕후가 일당독재의 모델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대두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당독재의 모델은 앞서 숙종을 시작으로, 꾸준히 이어져온 행태였지 정순왕후가 획기적으로 제시한 모델이 아니다.


숙종이 무리한 환국을 이용하여 붕당의 건전성을 해치며 일당독재의 문화를 만들었고, 이후 영조가 노론벽파를 물리친다는 구실로 풍산 홍씨를 지나치게 등용하며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는 척신 정치를 뿌리 내렸다. 정조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붕당 정치를 복구하였으나 숙종대 이후로 쭉 이어진 일당 독재 문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그 결과 정조가 죽자마자 노론벽파의 일당 독재가, 또 뒤이어 노론시파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조는 벽파와 시파의 균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노론시파 김조순을 장인으로 간택하고, 그에게 지나치게 힘을 실어주면서 세도정치의 길을 직접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빌미는 정조가 직접 제공했다. 정조가 죽기 전에 직접 간택한 세자빈이다. 물론 정조는 노론벽파에 대항할 집단으로 노론 시파를 선택한 것이지만, 어쨌든 정조가 노론 시파를 장인으로 선택하며 막중한 힘을 실어준 것이 사실이다.


명석했던 김조순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왕 순조를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가뿐히 노론 벽파를 뛰어 넘어 노론 시파 위주의 정권을 만들었다. 그래도 김조순은 정의로운 사람이기에 그 시람 시대에는 세도정치가 심각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정권을 그들로 다 채운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대에 가서 심각한 세도정치가 이뤄졌다. 정조도 그 훗날까지는 대비할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 빌미를 직접 제공한 사람은 정조였다. 오히려 정순왕후는 벽파와 대립하는 시파를 국구로 삼지 않고 싶었겠지만, 정조의 유지를 존중해 김조순을 국구로 삼았다. 차라리 정순왕후가 정조를 완전히 부정했더라면 최소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숙종대부터 영정조 시대를 거쳐 내재된 책임들의 결과이자, 정조가 직접적인 단초까지 제공한 것이지, 그 모든 책임을 정순왕후에게 돌리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이상 정치에 중심이었던 그 왕들에게도 묻지 않는 책임을 왜 고작 4년도 안되는 수렴청정을 한 왕비에게 다 묻는 것일까?


그것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유발한 인물로 성군인 정조가 되어선 안된다. 하지만 책임을 그 시대의 누군가는 져야했다. 그 책임을 마침 정조와 세도정치기 사이에 존재했던 정순왕후에게 아주 손쉽게 돌릴 만했다. 마침 신유박해의 책임까지 있었던 정순왕후는 여러모로 그 책임에 적합해보였다. 그렇게 정조는 훌륭하기만 하고 비운이기만 한 멋진 사람, 정순왕후는 그런 정조를 괴롭히고 훗날 조선 멸망을 이끈 책임까지 온갖 오명들을 다 뒤집어 쓴 채 악녀로 매도된 것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역사관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소설에서 인물 유형으로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이 있다. 하지만 우리네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입체적 인물일 것이다. 일면에서는 선하지만, 일면에서는 악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조는 모든 면에서 선한 사람으로, 정순왕후는 모든 면에서 악한 사람으로 아주 쉽게 평면적 인물을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마녀사냥처럼 한 여인에게 그 모든 책임을 전가했던 비겁한 남성들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한 여인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총명했던 정순왕후 김씨는 성군 정조의 즉위를 도왔고, 정조 사후에도 그의 개혁사상을 혁파하지 않았으며, 훗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끈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66세의 노인에게 시집와 여자로서의 삶은 꿈꿔보지도 못했을 한스러운 삶, 살아서는 남성 정치인들에 의해 이용되고, 죽어서는 남성 왕을 대신해 온갖 오명을 다 뒤집어 써야 했던 안타까운 삶이었다.


결국 그녀의 모든 정치적 행보가 그녀 자신의 행복이 아닌 노론 벽파 남성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그녀는 남성 정치인에 의해 철저히 이용된 여성일 뿐이다. 그녀에 희생은 그녀 사후에도 계속되어 조선 멸망의 책임까지 모두 그 한 여성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정조를 비롯한 남성 왕들과 당시 남성 정치인들의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keyword
이전 12화혜경궁 홍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