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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

by SOL

명성황후 민씨는 고종의 왕비로, 고종이 황제가 됨에 따라 그녀 역시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황후로 불린다.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고작 4년 재위한 후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어 망하였으니, 고종, 순종과 함께 그녀 역시 조선의 마지막을 함께 한 왕족이라 할 수 있다.


명성황후는 선인과 악인이라는 이분법적 판단을 좋아하는 한국의 역사관에서 그 평가가 많이 엇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한때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뮤지컬 등이 성행했는데, 주인공인만큼 당연히 그 미디어들은 그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명성황후에 대한 미화를 그만두라며, 그녀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기에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인도의 간디나 미국의 마틴 루터 킹도 선한 면 뒤에 악한 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선한 면이 부각되었을 뿐. 명성황후에게도 분명 여러가지 면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개화기라는 급변기를 살며 그 모두가 흔들렸던 혼란기에서, 왕비라는 높은 위치로 더 많이 흔들렸을 인물인만큼,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다각도로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을미사변으로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아 시신조차 없이 고종과 합장되었던 명성황후 민씨는 비참한 죽음만큼이나 살아서의 삶도 파란만장하였다. 조선의 여러 왕비들 중에서도 삶의 파고가 유독 컸던 명성황후 민씨의 삶을 따라가보자.



<쇠락한 명문가 여식에서 조선의 왕비로>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황후 민씨는 여흥 민씨 가문의 딸이다. 여흥 민씨는 원경왕후와 인현왕후라는, 이미 두 번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특히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 종손으로 여흥 민씨 중에서도 뼈대있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민치록 당시는 여흥 민씨 종가라는 명성만 남아있었고, 실제 그의 세력은 극히 미미하였다. 치록은 한양이 아닌 여주에서 나고 살았으며, 과거에 합격하지도 못한 채 음서로 작은 벼슬에 나아갔을 뿐이었다.


민치록의 5대 선조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이었고, 민유중의 큰아들 민진후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되었다. 민진후는 노론 중에서도 강경 노론이었는데, 숙종 대에는 그런 그의 당색이 정권의 중심이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노론 대신 소론을 등용한 경종 대에는 물론, 이후 탕평책을 추구하며 온건 노론을 더 가까이했던 영조 대에 이르러 강경 노론과 여흥 민씨 가문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더 훗날 남인과 신진 세력을 등용코자했던 정조 대를 거쳐,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순조 대에 이르면 안동 김씨와 가까운 일부 가문을 제외하고는 정권의 중심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기에, 여흥 민씨 가문은 과거의 영광만 남은 채 잊혀져갔다.


민진후의 큰아들 민익수는 경종이 즉위하며 노론이 크게 위축되었을 때, 한양의 안국동 종가를 떠나 여주의 선산으로 낙향했다. 이후 민익수의 아들 민백분, 그리고 그의 아들 민기현, 또 그의 아들 민치록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여주에 터전을 잡고 미미한 벼슬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여흥 민씨 가문은 정치적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들 종갓집은 자손 또한 귀했는데, 민익수 이후로는 오직 아들 하나씩만 두어, 민백분, 민기현, 민치록이 모두 독자였다. 그러다가 민치록 대에 이르자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하나 두게 될 정도였다.


민치록은 첫번째 부인 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오씨 부인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 민치록은 대를 잇기 위해 두번째 부인 이씨와 재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민치록의 나이가 오십이 다되었는데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민치록도 더이상 아들을 낳는 일을 포기하고 양자를 들이게 되었다. 종갓집의 대가 끊어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민치록은 10촌이 되는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도록 했다. 민치록이 양자를 들이고도 한 명의 자식을 더 보게 되었는데,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민치록이 오십이 넘어 마지막으로 본 그 자식이 훗날의 명성황후가 되는 딸이다. 민치록은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이씨 부인과 단둘이 여주에 살던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삼년상이 끝나자 양오빠 민승호가 사는 한양으로 이주했다. 민유중의 종손이었던 민치록은 대대로 물러받은 재산은 많았다. 인현왕후가 잠시 폐위되었을 때 머물던 감고당을 비롯하여 인현왕후가 태어났던 반송방 집까지 한양의 중심가에만 해도 두 채의 집이 있었다. 민승호는 그 중에서 반송방의 집을 물려받아 살고 있었는데, 양아버지가 죽자 양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한양의 그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후 그들은 모두 감고당 집으로 이사해서 함께 살았다.


여주에서 한양으로 이주한 11세 어린 민씨 처녀에게 한양은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또 몇 해 후 그녀에게는 그간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된다. 그것은 양오빠 민승호의 친누이가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라는 인연을 시작으로, 쇠락한 여흥 민씨 가문에 새로운 기운이 돌게 되는 일이었다.


명성황후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는 이야기에 앞서, 고종이 왕이 되는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은 원래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왕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지만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 즉 정조의 이복동생이 되는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삼종혈맥(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실제 핏줄로는 아니었지만 법도상으로는 남연군도 삼종혈맥인 것이다. 선왕인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로 삼종혈맥을 이었는데, 고종대에 와서는 아예 삼종혈맥의 혈통은 완전히 끊기고 법도상의 삼종혈맥만 남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남연군은 철종과는 법적으로 6촌이 되며 왕권에 훌쩍 가까워졌다. 하지만 철종이 젊었고 꾸준히 후사를 보고 있었기에 남연군이 자신의 핏줄에서 왕이 나오리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철종이 낳은 다섯 아들이 모두 어려서 죽고 철종 역시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자, 삼통혈맥의 반열에 들어선 남연군의 후손들에게 왕위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중에서도 남연군의 넷째 아들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핏줄로는 왕위와 매우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 남연군이 우연히 은신군의 양자가 된 덕분에 왕이 되었다.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된 것까지는 우연이었지만, 그 많은 남연군의 후손 중 하필 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흥선군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일이었다.


흥선군은 먼저 안동 김씨에게 표적이 되지 않도록 젊은 시절 파락호를 자처하며 안동 김씨의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안동 김씨에 대한 불만이 있을 효명세자(훗날의 익종)의 비 조씨 가문의 조성하, 조영하와 은밀히 통했다. 조씨 가문들과 어울리며 후사 결정권을 가진 왕실 최고 어른 신정왕후 조씨까지 만나게 되고 그녀와의 사전 합의에 의해, 자신의 둘째아들 재황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을 왕으로 만들었을까? 아니 본인이 왕이 되면 될 것을 왜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왕이 될 조건이 성인이 되지않은 린 나이이고, 미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대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고, 왕비를 유리하게 간택하여 세도정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선군은 신정왕후에게는 수렴청정을 빌미로, 안동 김씨 세력에게는 그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할 것을 약속하며, 고종을 왕위에 앉히는 일에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시 흥선군의 큰아들은 기혼인 19세였기에, 12살의 미혼인 둘째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처럼 흥선군은 오랜 시간의 치밀한 준비로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고종은 자신의 의지나 역량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아버지가 흥선군이었고 그가 적당한 나이였기 때문에, 어느날 보니 왕위에 앉은 것이다. 고종이 왕이 된 것은 고종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고 그 정통성 역시 심하게 부족했지만, 흥선군, 신정왕후 조씨, 안동 김씨 모두의 이익에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왕실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를 설득하고, 안동 김씨들에게 왕비 자리를 약속하며 고종의 왕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모두 흥선군이었다. 파락호를 자처하던 젊은날부터 오랜시간 흥선군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고종 입장에서는 얼떨떨한 일이었지만, 흥선군 입장에서는 오랜 열망의 실현이었다. 어쩌면 왕권을 자기몫처럼 휘둘렀던 것이 흥선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당시 고종이 12세였으므로 왕실의 가장 어른인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정왕후는 실제 권력을 흥선대원군에게 모두 주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자신이 거처하는 운현궁 사이에 문을 따로 만들어 쉽게 왔다갔다할만큼 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다.


왕비 간택 역시 당연히 흥선대원군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누구보다 핍박받았던 흥선군이기에 그는 왕비의 외척 세력에 대한 견제가 가장 중요했다. 이미 안동 김씨와의 약속은 고종이 왕이 되자마자 안동 김씨를 멀리하며 파기된 약속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명문가의 딸이지만 정치 세력이 없는 집안에서 왕비를 찾았다.


이미 아버지가 죽고 없는, 또한 아버지 윗세대부터 계속 독자여서 가까운 친인척도 없는 명성황후는 외척의 발호를 염려할 필요없는, 흥선군이 찾던 딱 좋은 왕비의 조건이었다. 거기다가 두 번이나 왕비를 배출한 경험이 있는 여흥 민씨 가문의 종갓집이었다. 그런 명문은 정통성이 많이 부족했던 고종의 격을 높여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명성황후를 추천한 사람은 흥선군의 부인 민씨였다. 흥선군의 부인 민씨는 명성황후와 핏줄로는 먼 친척이었지만, 명성황후의 양오빠인 민승호의 친누이되는 사람이다. 즉 법적으로는 민승호와 명성황후가 남매이지만, 핏줄 상으로는 흥선군 부인 민씨와 민승호가 남매이다. 어쨌든 민승호가 명성황후와 남매가 되면서 흥선군 부인 민씨와 명성황후도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민씨의 외척이 세력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핏줄상 자신에게 처남이 되는 민승호 정도는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흥선군은 외척 세력의 발호를 자신이 모두 통제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명성황후를 고종의 비로 간택했다.


삼간택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이미 민씨는 왕비로 내정되어 있었다. 삼간택 이후 민씨는 왕비 수업을 받기 위해 별궁으로 갔는데, 그 별궁이 운현궁이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과 그의 부인의 도움을 받으며, 왕비가 될 교육을 받았다.


고종이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법적으로 고종은 흥선군의 아들이 아니었다. 또한 아버지를 일찍 여읜 명성황후였다. 오랜시간 여주에서 생활하여 한양과 궁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어색했을 명성황후였다. 흥선군과 흥선군 부인 민씨는 양자로 보낸 아들 대신 마치 명성황후를 딸처럼 여기고, 두 사람의 혼례를 준비해 주었다.


흥선군은 평생의 정적이 되는 며느리를 본인 손으로 직접 골랐고, 한때나마 친정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녀의 결혼을 준비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명성황후 민씨는 흥선군의 비호 하에 왕비로 간택되고 고종의 비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배를 탄 깊은 인연이라고 생각했을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훗날 정적이라는 이름의 악연으로 변했다. 고종부부가 혼인한 때가 1866년으로 민씨의 나이 열여섯, 고종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쉽지 않은 왕비의 삶>


명성황후가 왕비가 되었을 때, 내명부에는 세 분의 윗전이 있었다. 익종(효명세자) 비 신정왕후 조씨,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 철종 비 철인왕후 김씨였다. 명문가 여식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명성황후는 윗전을 성심껏 모셨다. 그 중에서도 당시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자 법적 시어머니인 신정왕후에게는 더욱 잘하는 며느리였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조씨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여쭌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신정왕후는 "왕비가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명성황후가 세 분의 윗전을 살피며 왕비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열다섯 새신랑 고종은 이미 다른 사랑에 빠져 있었다. 고종은 자신보다 9살 연상의 미인이었던 첫사랑 후궁 이씨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고종은 후궁 이씨와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보기 위해 정비 민씨는 피했다. 당시 후궁 이씨와 정을 나누고 있던 차에 새로운 여자 명성황후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궁 이씨와의 사랑과 의리가 더욱 중요했던 고종이었기에, 명성황후는 이씨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고종과 제대로 합방하지도 못했다.


왕이 후궁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어린 왕비는 깊은 밤을 역사서를 읽으면서 보냈다. 명성황후는 <내훈>,<열녀전>같은 여인의 부덕에 관한 책보다는 사서삼경, <춘추>,<춘추좌씨전>과 같은 책을 즐겨 읽었다.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들은 훗날 그녀가 대원군 또는 서구열강들 사이에서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왕비 명성황후는 세 분의 윗전을 모시고 후궁을 투기하지 않으며, 왕비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명성황후가 후궁들을 대하는 태도는 "관대하면서도 엄격하여 은혜와 위엄을 함께 보였다"라고 묘사된다. 후궁에게 빠진 남편으로 인한 외로움은 독서로 달래며 초반의 어려웠던 왕비 생활을 이어갔다.


고종이 후궁 이씨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결과 1868년 고종이 열일곱의 나이에, 상궁 이씨가 첫아들 완화군을 낳았다. 오랜만의 왕실에서 왕자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모든 왕실어른들은 기뻐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물론 흥선대원군도 완화군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사랑에 눈 먼 고종은 자신이 고작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평생 역술가에 의지했던 고종은, 당시 한 역술가를 불러 완화군의 미래를 점치기도 했는데, 그 점쾌가 좋지 않게 나오자 역술가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 야사가 있을 정도로 고종은 완화군을 아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성급한 처사라며 막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지 않았을 뿐이지, 완화군을 몹시도 총애하기는 했다. 완화군의 탄생에 모두가 기뻐하는 동안 명성황후는 더욱 소외되어갔다.


고종은 원하던대로 첫아들을 상궁 이씨에게서 보고 나서야 명성황후에게도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완화군이 태어난지 3년 뒤 1871년에 명성황후 역시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낳은 그 첫아들은 항문이 막히는 기형으로, 태어난지 5일만에 죽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또다시 좌절해야했다. 하지만 그 사이 명성황후는 고종의 마음을 조금씩 얻게 되었고, 첫아이를 잃은 아픔까지 함께 하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한층 가까워졌다. 이는 이후 명성황후는 계속하여 임신한 반면, 첫사랑 이씨는 더이상 임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성황후가 고종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친정에 대한 욕심을 명성황후가 지지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고종이 왕이 된지도 십년이 지났다. 조선시대는 15세를 성인으로 여겨, 왕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친정을 했다. 하지만 고종이 22세가 되어도 흥선군은 고종에게 왕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심성이 유약했던 고종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지만, 고종도 친정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명성황후는 남편의 그런 마음을 알아챘고, 지지해주었다.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고종에게 영민한 아내 명성황후는 큰 힘이 되었다. 어느덧 고종은 명성황후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불만이 있었던 조영하, 안동 김씨 일문의 김병기, 흥선군의 큰아들 이재면 등을 포섭했다. 명성황후는 신망받는 최익현에게 흥선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고, 고종은 그 상소대로 친정을 선언했다. 그렇게 "대원위 분부"라는 말로 세상을 평정했던 흥선대원군의 시대는, 그가 직접 간택한 며느리 명성황후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의 문을 사전 양해 없이 폐쇄하며 아버지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단호히 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러한 사실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사실상 명성황후가 위의 일들을 실제로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 명성황후가 조언은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명성황후에게 저만한 역량이나 정치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아마 명성황후의 조언에 의해 고종이 직접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즉 조영하, 김병기, 이재면 등을 포섭하고, 민씨 일파를 조정에 등용한 것은 실제 고종이 한 일이지 정치력이 없었던 왕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익현의 상소 역시 명성황후가 배후에서 조정했을 가능성이 낮다. 최익현은 누군가의 명령이나 뒷거래에 의해 어떤 일을 할 성정이 아니다. 아마도 본인의 의지대로 올린 상소일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흥선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당쟁의 온상이 되었던 서원을 철폐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경복궁 증건에 따른 백성들의 불만과 서원철폐로 인한 유생들의 불만이 컸다. 따라서 최익현은 그런 백성과 유생의 불만을 대표하여 스스로 상소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더욱 마땅하다.


즉 고종의 친정 실현을 두고, 그 모든 일을 명성황후가 주도한 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싸움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싸움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고종은 유약한 성격을 핑계로 늘 누군가의 뒤에 숨었기에 명성황후가 전면에 등장한 것뿐이다. 또한 훗날 일본이나 황현같은 인물들이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권력 다툼까지 한 못된 며느리라는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당시 고종의 친정은 마땅한 일이었고, 흥선군의 하야에 대해서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영민한 왕비 명성황후의 도움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것을 명성황후가 주도했다는 것은 의문을 가질만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세가 강해진 명성황후가 정치에 더욱 깊이 관여하며 고종을 배후에서 조정했을 가능성은 높다. 또한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지자 그동안 아들이든 딸이든 낳자마자 줄줄이 죽었던 것과 달리, 친정이후 1년만인 1874년, 훗날 순종이 되는 아들까지 낳았고 그 아이가 건강하게 되면서 명성황후는 모든 면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민씨 주도하의 정치와 계속된 정적들의 발생>


고종은 유약한 성격이었다. 왕이 되고 십년은 아버지에게, 그 후로는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그 아내가 죽자 또다른 믿을만한 아내(엄귀비)를 찾아 의지해야 할만큼, 고종은 한결같이 주체적이지 못했고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왕으로서 최종 명령을 내린 이는 고종이지만, 실제 정치력은 아내 명성황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종 시대 정치는 명성황후의 정치라 할 수 있다. 명성황후가 주도한 정치를 살펴보자.


먼저 조정을 민씨 일파로 가득채웠다. 물론 안동 김씨, 조영하, 흥선군의 큰아들 등 이전에 포섭한 인물들도 함께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인 민씨 일파를 조정에 대거 등용했다. 이는 정치력이 매우 미약했던 명성황후가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것이나, 분명한 건 그것이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조정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아닌 여흥 민씨 세도정치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삼정을 문란시키고 민심을 어지럽히기 충분했다.


만약 명성황후의 추천으로 등용된 민씨 일파가 정치라도 잘해주었다면 그만큼 욕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민씨 일파는 정치 대신 수탈, 부정만 저지르면서 백성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그리고 당연히 왕비 민씨에 대한 불만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부정을 일삼는 민씨 일파를 척결하는 대신 눈감아 주며 자기 세력를 키워나가는 데만 급급했다. 백성들은 민씨 일파를 묵인하는 명성황후에 대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 분노의 결과가 훗날의 임오군란(1882)이나 동학농민운동(1894)같은 민중의 난이다.


둘째,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던 흥선군이 실각(1873)하자 1875년 일본에서는 다시 한번 강화도에 운양호를 보내며 조선 정부에 협상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전히 일본을 배척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우의정 박규수 등은 통상이 불가피함을 주장했고, 고종과 민씨 역시 개화가 불가피하다 여겼다. 이에 1876년 불평등조약이지만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쇄국에서 벗어나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명성황후는 개화를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청과 일본에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며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유생들은 조선이 일본과 손 잡는 일을 반대했고, 연일 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에 반발했다.


유생들의 반발에 힘입은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기까지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는 대원군 뿐 아니라 척사를 주장하는 유림들까지 탄압하며, 개화사상을 더욱 강력히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개화에 반대하는 인물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당시는 개화와 척화 사이에 의견이 통합되지 않은 상황이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반대파들의 항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조금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반대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해나가며 일을 진행했을텐데, 명성황후는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은 잇따른 불만을 가져왔고, 그 불만들은 임오군란(1882)으로 표출되었다.


명성황후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양성했는데, 그로 인해 구식군대의 불만이 높아졌다. 신식군대 별기군과 구식 군대의 대우가 엄청나게 차이났던 것이다. 구식군대에게 13개월이나 밀린 급료를 주면서, 돌이 반이나 섞인 쌀을 1개월치밖에 지급하지 않자, 분노한 구식 군대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죽이고 그의 집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일을 저지른 후 수습할 길이 없었던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갔다. 흥선대원군은 그들과 함께 명성황후를 축출하고자 결심하고 창덕궁을 습격했다. 이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과 민씨 외척의 탐행에 대한 불만이 터진 것으로, 이로 인해 명성황후는 큰 곤란을 겪어야 했다.


명성황후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행히 군인 홍재희의 기지로 그의 등에 업혀 궐을 빠져나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명성황후는 잠시 한양에 머물다가 충주의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흥선대원군은 사태를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고종에게 정권을 위임받아 한양에서 명성황후를 샅샅이 찾았지만, 충주 장호원에 숨어있던 민씨를 찾지 못했고,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선포했다. 그녀의 장례가 치뤄졌고, 청나라에도 국상을 알렸다. 10년만에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정책들을 말살하며 자신의 뜻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은밀히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여, 청군에 의해 궁궐을 지키던 조선 군인을 몰아내고 흥선군은 청으로 끌려가도록 만들었다. 명성황후는 궁을 나올 때는 신분을 위장하여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다시 궁에 들어갈 때는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환궁했다.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왕비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고종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고종은 아버지 대신 아내를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은 그것이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불평등조약에 의한 것으로 실리는 없었고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한 채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임오군란과 같은 백성들의 불만이 표출되었지만, 그에 대한 대응 또한 적절하지 못했다. 즉 개화정책이 불가피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진 못한 채 진행된 것이다.


셋째, 명성황후는 자국의 정치에 외세를 끌어들였다. 사실상 몰려드는 열강들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외세가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 역시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외세가 자국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더욱 조장한 면이 있다. 좋게 말하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한 정치를 폈다.


임오군란(1882)으로 죽음의 길에서 살아돌아온 명성황후는 더욱 청나라에 의지했다. 청은 조선의 난을 진압해준 대가로 조선의 내정 간섭을 강화했고, 명성황후 역시 친청정책을 폈다. 따라서 청을 따르는 온건개화파를 지지하고, 일본을 따르는 급진 개화파는 점차 배척했다. 명성황후가 친청의 온건개화파를 지지하자 일본과 급진개화파들은 소외감을 느꼈고, 그에 대한 불만이 터져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8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온건개화파의 다수 인물이 죽음을 당했고, 조정은 일본군과 급진개화파에 의해 함락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명성황후는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일본과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을 숙청했다. 갑신정변의 주도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양군 철수와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서로 통보한다는 천진조약을 맺었다.


조선 정부는 밀려드는 열강들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자국의 어려움을 외세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했다. 명성황후는 계속하여 청에 의존했다. 밖으로는 밀려드는 외세를 막지 못했고, 안으로는 민씨 일파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안팎으로 정치가 엉망이 되며 가장 고통받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불만이 갑오농민전쟁(1984)으로 폭발했다. 1893년 2만여명의 동학민들은 탐관오리의 척결과 생활난 타개, 척양척왜 등을 요구하며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농민군은 1894년 조선 왕조의 상징적 수도인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그 난을 진압할 자국의 군대도 정치적 역량도 없었던 명성황후는 그 난의 진압까지도 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청과 일본은 천진조약을 맺은 상태였으니, 청의 파병에 일본군 역시 파병했다. 청일 양국의 파병에 놀란 농민군은 즉시 정부군와 협정을 맺어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미 파병한 청일 양국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는 왕비가 청만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컸을 일본에게는 기회였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 여겼고, 이미 망해가는 청에 대해 이길 자신도 있었는데, 왕비가 그 기회를 잘 만들어준 것이다. 1894년 일본은 청국 군함에 불의의 포격을 가하며 전쟁을 도발했다. 이에 조선은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일본은 승리했다. 이후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강력한 간섭을 시행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손잡은 이른바 3국간섭을 통해 청이 일본에게 넘겨준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세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할 힘까진 없었던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에게 순순히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가 무력다툼없이 일본을 굴복시키는 것을 보고 더욱 러시아를 신뢰하며 가까이했다. 명성황후는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박영효를 중심으로 꾸린 내각을 즉시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의 친러 내각으로 바꿨다.


이처럼 명성황후는 적극적으로 외세를 자국의 정치에 끌어들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물론 그 과정과정에서 그녀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만 봤을 때는 실패한 정치가 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결국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정국을 운영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명성황후가 정치권력을 잡은 상황은 몹시도 좋지 않았다. 외부로는 개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내부로는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조선왕실이었다. 대내외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반영하더라도 그녀의 부족함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몹시도 영민했던 그녀였지만 정치적 수완은 좋지 않았다. 결국 모든 정책들마다 그녀는 정적이 생겼다. 민씨 일파를 등용함에 따라 백성들의 원성을, 개화정책에서는 척화파의 반발을, 온건개화파를 지지할 땐 급진개화파의 불만을, 지나치게 청에 의지하면서 일본의 반감을 만들어내면서 그녀에게는 적들만 많아지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게 세력을 통합하거나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한 결과, 조선도 그녀도 안타까운 몰락에 이르게 된다.



<명성황후의 비참한 최후>


명성황후가 주도한 정치들은 매번 정적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그 정적들로 인해 그녀는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했다. 임오군란이 그랬고, 갑신정변에서도 그녀가 신임한 신하들이 그녀가 보는 바로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성황후는 가장 배척한 외세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일본은 명성황후가 존재하는 한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강구했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로 암살 날짜를 잡고, 거사를 준비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앞세우고, 궁궐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각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치밀한 준비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자 했던 일본 낭인들에 의해 곧 발견된 명성황후는 그들의 칼에 온몸이 난도질 당했고, 그들의 만행에 대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선은 불태워졌다. 명성황후의 이 참혹한 죽음이 을미사변(1895)이다.


일본은 죽은 명성황후를 폐서인하도록 고종에게 종용했고, 그 종용에 못 이긴 고종은 명성황후를 폐서인했다. 하지만 아들 순종이 상소를 올려, 자신 또한 폐세자를 간청해오니 명성황후 역시 복위되었다. 참으로 유약한 고종이다. 고종은 임오군란 때처럼 명성황후가 다시 살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2년동안 장례를 미루었으나, 끝내 1897년 11년 시신 없이 국장을 거행했다. 끝내 유골은 찾지 못해 시신없이 묻히게 되었다.


명성황후 사망 후 다시 정권을 차지한 일본은 을미개혁을 추진했고,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에 의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며 조선도 몰락하였다.



<그녀에 대한 평가>


그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나뉜다. 먼저 명성황후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결과적으로 명성황후가 죽고 난 후 조선은 일본에 급속도로 속박되었다. 그 말인즉슨 그전까지 일본에게 침략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명성황후 덕분이라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조일관계에서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불평등한 면이 심해지자 일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외세인 청과 러시아를 이용했다. 일본은 명성황후가 살아있는 한은 조선 지배의 야욕이 실현되지 못할 것을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기까지 이르렀다. 조선 지배의 가장 걸림돌인 명성황후가 제거되자마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명성황후는 일본의 조선 침략의 야욕을 그나마 견제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인물로 그녀를 꼽을 정도로 그녀는 총명했고, 중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의존한 면이 컸지만, 무작정 청에만 의존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몰려드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할만큼 총명한 여인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강력해진 청을 견제하기 위해 그때부터 러시아를 이용했다. 조선 정부의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를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고자 했는데, 그 밀약은 청과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러시아가 보호국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청나라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훗날 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일전에 무산된 밀약을 재추진하려 했지만 역시 청의 원새개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어쨌든 명성황후가 몰려드는 서구 열강들 틈에서 절대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을 두고 러시아, 청, 일본, 그리고 영국까지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명성황후만이 유일하게 그 각축전을 대응할 역량을 갖춘 왕족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흥선대원군도, 어떤 상황에서든 뒤에 숨기만 했던 고종도 못한 일을 그녀가 혼자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허수아비 왕 고종을 대신해 격변기 조선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도 복잡하고 강하게 밀려드는 서구열강들을 그녀 혼자서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그녀에 대한 여러 평가들 중 공통되는 점은 그녀의 총명함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어서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를 타고나서 기틀을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또는 "(순종이) 오늘날 학문을 성취하게 된 것은 황후의 노력 덕택이다."라고 그녀의 명석함을 칭송했다. 통역관 윤치호는 "왕비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이 하나같이 감탄 하곤 했다."라고 그녀를 회고했다.


그 외에 외국인들의 진술도 많지만 그 외국인들은 모두 명성황후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들도 그녀의 총명함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일본은 그녀를 여우라는 표현으로 비하하였는데, 어쨌든 그녀를 영민하게는 봤다는 것이다. "우리 왕비는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라고 말했던 유길준도 그녀의 총명함에 대해 비난했으니 어쨌든 명성황후가 유달리 총명했음은 공통된 의견인 듯하다. 명성황후는 그 총명함을 바탕으로 다방면으로 노력한 점은 인정된다. 물론 그 결과가 실패이므로 그녀의 노력이나 총명함마저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녀의 총명함 덕분에 그만큼이나마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명성황후의 총명함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명성황후를 누구보다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을 소유한 지략가라고 표현했다. 열강들을 이이제이의 방법으로 견제했던 국제적인 정치감을 소유한 여인으로,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끝까지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왕실의 그 어떤 인물들보다 더 고군분투한 사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둘째, 그녀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자료에 대한 의구심이다. 먼저 황현이 쓴 <매천야록>은 명성황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황현이 국치에 대해 분노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한 우국지사라는 이유로 매천야록이 높이 평가되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다른점이 많다. 그 책은 야사로 이루어져있다. 황현은 한양에서 머문 시기가 매우 짧고, 대부분을 고향 전라남도에서 지냈다. 그런 그가 한양 중에서도 궁궐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듯 서술한 것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황현은 명성황후의 인사등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는 보수주의자로 개화를 추진한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비난하기 위해 그녀의 사치와 후궁들에게 한 행동 등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했는데, 사실로 보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명성황후가 후궁들을 내쫓고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녀가 사치가 심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명성황후가 후궁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모질게 대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매천야록의 내용은 그 과장과 왜곡이 너무 심했다. 또한 그녀가 무당에 의지해 많은 시주를 한 것을 사치로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용모를 꾸미는 데에 사치한 흔적은 크게 찾기 어렵다. 외국인이 명성황후를 묘사한 것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오히려 자신을 꾸미는 데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현이 말하는, 그녀가 연일 베풀었다는 호화찬란한 연회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정식 기록 어디서도 관련된 내용을 찾기 힘들다.


<매천야록>은 황현의 개인적 감정에 의해 명성황후가 왜곡된 부분이 많다. 특히 황현은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명성황후에 대한 모든 비판의 근원은 어쩌면 여성이 지나치게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남성의 불만이었지도 모른다. 황현의 인물됨이 출중하다는 이유로 그 책이 진실인양 믿어지지만, 사실상 많은 내용이 허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책을 근거로 명성황후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법하다.


또한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일본에 의해 출간된 서적들을 인용하는데, 을미사변 후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일본은 명성황후에 대해 황현보다 더 심한 왜곡과 비난을 조장하였다. 일본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된 내용은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일본의 의도대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망치게 한 여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는 기쿠치 겐조 등이 날조한 그 자료들을 근거로 명성황후의 사생활과 정치력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성황후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는 자료들에서부터 의구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명성황후는 백성을 믿지 않았고, 내치에 힘쓰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을 추구했고 아들 순종에게 백성의 근본임을 늘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 뿐 실제 그녀의 행보를 보면 백성을 위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개화를 추구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척화파들이나 백성들의 반발도 어루만질 줄 알아야했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느라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가 낮아진 것까지 사실상 왕비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반란이 일어난 다음에는 백성들의 고초를 어루만질 노력은 했어야 했다. 명성황후는 여전히 백성들의 고난을 어루만질 줄 몰랐기에 임오군란을 겪고도 훗날 동학농민운동까지 겪어야 했다. 먼저 민심을 살피고 달래고 화합을 이끌어내는, 백성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민란이 그처럼 계속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명성황후가 백성을 믿지 않았던 결과로 그녀는 백성 대신 외세에 의존했다. 당시 몰려드는 외세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는 있다. 그래서 이이제이의 전술로 그들을 감당하고자 지략을 세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외세를 이용한 것을 보면, 이이제이의 전술보다는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외세는 점차 그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갔다. 백성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하며, 그 부족한 힘을 외세에 의존했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우리 백성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모두 청에 의지해 해결하고자 했다. 국모가 외세에 의존해 자국의 백성을 죽이도록 한 것은 분명 비난받을 일이다.


또한 그 결과로 자국을 타국가들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게 도움을 청하자 일본까지 파병되었고, 결국 그것은 청일전쟁의 빌비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외세에 의존했던 결과가 백성을 죽이고, 자국이 전쟁터가 되는 결과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비난이 거센 것은 당연하다.


셋째, 명성황후는 자신의 권력 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에서의 승리, 왕비로서의 권력 유지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민씨 일파의 매관매직을 허용했고 그들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묵인했다. 무당이나 점에까지 깊이 의지한 그녀를 보면,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국모로서 백성들과 함께 살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저 국모의 자리를 유지하며 혼자 살려고 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녀의 노력이 조선의 발전과 백성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권력 유지에 있었기에 그녀는 비판 받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황현과 같은 우국지사들이 그토록 심한 과장과 왜곡을 해가며 그녀를 매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그녀에 대한 평가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당시 정치인 중 그녀를 능가할만큼 뛰어난 정치술을 펼칠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총명함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민본사상이 중요함을 머리로만 알고 실천하지 못했다. 백성을 믿지도 위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결국 정작 중요한 백성은 무시한 채 외세만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그 총명함을 다 써버린 것이다. 그녀의 총명함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한 총명함으로, 그 총명함을 바르게 썼다면 조선도 그녀도 그 비극에서 조금은 더 멀어지진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녀를 위한 변명>


하지만 명성황후에게도 변명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


첫째, 그녀는 왕이 아니라 왕비였다. 그 사실은 매우 거대하게 중요하다. 그녀가 왕이었다면 그녀의 그 총명함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다 쓰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비호해줄 세력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간택된 왕비였다. 그 권력에서 아주 쉽게 소외될 수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특히 그녀는 인현왕후의 후손으로, 폐비된 경험이 있었던 선대의 전례를 따라가는 일이 몹시도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남는 일, 즉 권력을 유지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녀의 정적은 너무나도 거대한 인물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아닌가. 그와 대결하여 살아남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자주 명성황후를 위협했다. 후궁 소생의 왕자를 무척이나 귀히 여겼는데 이는 명성황후의 왕비로서의 지위를 흔드는 처사였다.


명성황후는 지위 뿐 아니라 목숨에의 위협도 자주 받았다. 명성황후의 양오빠와 친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 여겨지는 폭탄테러(1874)로 몰살당했다. 명성황후는 그 폭탄테러 이후 밤에 잠을 들지 못했고 날이 밝아서야 잠자리에 들 정도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생각했다. 또한 흥선대원군을 위시한 임오군란에서 그녀는 정말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본능적으로 지키고자 애썼을 것이다. 명성황후는 침실을 여러 개 두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을 만들어 비상시를 대비했다. 고종이 많은 사진을 남긴 데 비해 명성황후로 알려진 정확한 사진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훗날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명성황후는 암살의 위험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을 기피했다고 한다. 그토록 명성황후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수차례 암살 위협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그녀는 자신의 안위 외에 백성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닥친 상황들을 해결해나가는 일이 시급했기에 아들 순종에게는 늘 강조한 민본사상을 본인이 실현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 그녀가 겪은 그 개화기는 누구에게나 너무 어려운 시기였다. 아마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과 정조, 그리고 황희, 이황, 이이, 정약용, 이순신 등을 모두 모아놓아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어려울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그녀에게는 훌륭한 인재는 커녕 그녀를 위협하는 세력들만이 가득했다. 조정은 이미 안동 김씨의 오랜 세도정치로 훌륭한 인재들은 모두 사라지고 가문의 영달만 추구하는 인물들만이 가득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60년을 거치며 조선의 인재와 조선 내정은 이미 멸망에 가까웠다. 인재가 없다는 어려움에 더해, 민씨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은 많았다. 시대를 읽지 못한 채 쇄국정책을 폈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호시탐탐 그녀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개화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수시로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 온건개화를 반대하며 일본에 의지해 정변까지 일으킨 급진 개화파의 주요 조정세력들, 그녀에게는 함께 의논할 충신들보다는 그녀에게 반대하고, 그녀와 권력을 다투는 인물들만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편 고종은 사람만 좋고 판단력이나 실행력은 거의 없어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신하들과 남편을 믿고 왕비인 그녀가 무얼 더 어찌할 수 있었을까.


명성황후에게는 인재가 없었고, 특출난 인재들이 있었다한들 해결하기 힘들만큼 혼란한 시기였다. 그런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그나마 영민한 왕비였던 것이다. 그녀가 영민했다는 이유로, 그 모든 비난을, 왕인 고종을 대신해 왕비인 그녀가 다 받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일본 낭인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되었다는 동정론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어려운 시기에 혼자 고군분투했을 그녀에게 동정심이 일어난다.


셋째, 명성황후는 과연 정말로 자신의 권력유지만을 목표로 정치했을까?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 일본은 명성황후에게 거대한 정치자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의 수많은 정책이 실패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녀의 목표가 오로지 권력 유지만이 아니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가 권력을 유지할 목표만 있었다면 손쉽게 일본과 손잡았을 수도 있다. 훗날의 엄귀비는 일제에 어느정도 동조하여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았다. 그녀 역시 일본에 동조해 남은 삶을 그저 편안하게 살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랬더라면 그녀 일신은 편안했겠지만, 더 쉽게 조선은 멸망했고 더 처참하게 조선의 백성들은 버려졌을 수도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고종에서 남긴 말이 "종묘사직의 중대함을 잊지 마소서."였다고 한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의 왕비로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애썼던 것까지 폄하되진 말아야 한다.


그녀는 군왕의 자질을 제대로 학습한 왕도 아니었고, 그녀가 물려받은 정권은 이미 거의 망가질대로 망가진 정권이었다. 시국 또한 어지러웠다. 명성황후의 정치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정조 역시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멸망까지 그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쇠락한 명문가 여식으로 저물어가는 조선 왕실의 왕비가 되었고, 급변기 혼란스러웠던 조선의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 그녀가 총명했다는 이유로 남편인 고종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더 나은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때문에 조선이 몰락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성공했더라도, 일본에 의지한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도,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들이 정권을 차지했더라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더라도 어떻게든 조선이라는 사회는 몰락했을 것이다. 일제치하의 고통 역시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당시 백성들에게 닥칠 고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일이다. 그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수 없다. 왕비가 된 후 모든 삶의 순간순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그녀에게 이제 그만 편안히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중학생 때 서점에서 처음 발견하여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어린 나에게 조선 왕비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해주었고 지금 왕비 이야기를 쓰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던, 윤정란님의 <조선의 왕비>에서 명성황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는데, 이만큼 정확한 정리가 없는 듯하여 그대로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명성황후 민씨는 항상 아들 순종에게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훈계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백성들의 무서운 힘을 간파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열강들 속에서 왕실과 백성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백성들과 힘을 합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민씨는 백성들이 아닌 열강들에게 왕실의 보존을 맡긴 결과 일본 깡패들의 칼에 난자당함으로써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민씨의 죽음은 곧 조선의 죽음이었다. -윤정란 <조선왕비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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