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들어봄직 할 것이고, <동이>라는 드라마 이후로는 숙빈 최씨까지 숙종의 여인으로 꽤 알려지게 되었다.
사극드라마의 단골을 넘어 사골 소재가 된 장희빈은 1대, 2대, 3대.. 등으로 불리며, 잊을만하면 다시 드라마로 제작되고 또 늘 어느정도의 시청률은 보장될 정도로, 숙종의 여자들 이야기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남자, 아름다운 여자들, 폐위와 복위라는 쉽지 않은 상황의 반복, 또 새로운 여자의 등장. 정말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많은데, 그것이 모두 실화라는, 그것도 왕실이라는 당대 최고 권력층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숙종에게는 세 명의 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이 있다. 정비로는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이고, 후궁으로는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가 있다. 후궁은 그렇다치더라도 왕비가 많으면 잡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숙종에게는 왕비가 세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비는 그저 왕의 아내가 아닌, 분명한 정치적인 존재였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로 왕비는 더욱 적극적으로 당색을 띄게 되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대놓고 서인이었고, 숙종의 세 왕비 모두 당색이 뚜렷한 집안 출신이었다. 왕비라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존재가 여러번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상황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숙종대는 붕당정치가 한참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안그래도 붕당정치가 절정인 시기에 왕비까지 자주 바뀌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당시 정권이 얼마나 다사다난했을지 알 수 있다.
즉 붕당정치가 절정인 시기, 왕비들이 당색을 가지기 시작했던 시기, 세 명의 정비를 두게 되었던 상황이었다. 거기다 숙종을 비롯한 희빈과 숙빈은 성격이 매우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사골로 내내 우려도 계속 우려질만큼 드라마틱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장희빈은 표독한 여인, 인현왕후는 현숙한 여인, 숙빈도 인현왕후와 비슷하게 선한 여인으로 그려졌는데, 과연 진실이 그러할까? 그리고 숙종은 여인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그녀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왕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장희빈, 인현왕후, 숙빈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한 <인현왕후전>은 영조 때 소론에 의해 씌여진 글이다. 영조가 숙빈의 아들이고, 당시 왕인 영조의 총애를 얻고자 노력했을 소론이니, 그 내용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어떠할지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최근 김태희, 유아인 주연의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 역시 역사 왜곡이 있었지만, 그래도 숙종에 대해서만은 가장 비슷하게 묘사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라고 썼지만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다. 간간히 이야기만 들었을뿐이다.) 숙종은 세 여인 사이에서 우유부단했던 남자가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물론 이 글은 내가 아는 한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이지만, 숙종과 그의 여자들의 진실에 조금더 다가가보자.
<숙종은 어떤 사람인가>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 이전의 숙종은 여자들 치마폭에 둘러싸여 우유부단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달랐다. 그 드라마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숙종은 매우 카리스마있게 권력을 휘두른 왕이었다. 그 모습이 내가 아는 숙종과 가장 닮았다.
숙종은 재위기간이 46년으로, 조선 왕 중 두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왕이었고, 그 긴 재위기간동안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 조선 왕 중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 세 명을 꼽자면, 태종과 세조, 그리고 숙종이라 할만한다.
태종과 세조는 태조의 무인적 기질을 이어받은 조선초기의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상황에서 카리스마가 있는 왕의 모습인 데 반해, 숙종은 신권이 더욱 강화된 조선 중후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왕이다.
태종이 힘있는 신하들을 제거한 이후 세종과 세조는 비교적 안정적인 왕권을 휘둘렀으나, 이후 신하들에게 선택된 어린 왕 성종부터는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는 왕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이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고, 반정 후 신하들이 정한 중종이 왕이 되면서부터는 조선은 신권이 더 강한 나라가 되었다.
중종 이후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을 거치면서 신하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해졌고, 그 속에서 왕권은 더욱 약해졌다. 그런 정치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즉위한 숙종이 세 차례의 환국을 주도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그의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말햬준다.
숙종은 열세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는데, 영민함이 남달라 수렴청정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하들을 장악할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만만할수밖에 없는 혈통이었다.
조선 왕 중 적장자가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는 사실 손꼽을만하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문종, 단종, 인종이 다인데, 셋 다 일찍 죽었고, 선조 이래로는 왕의 적장자가 왕위를 이러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과 인조는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적자였으나 장자가 아니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적장자였으나 현종대에도 효종이 장자가 아니어서 겪은 설움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완전한 적장자 혈통의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달랐다. 효종의 적장자인 현종이 왕위를 이었고, 현종의 적장자인 숙종이 그 다음 왕이 됨으로써, 숙종은 누가 뭐래도 뼛속까지 완벽한 정통성을 지닌 왕이 되었다. 거기에다 현종은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고 아들도 숙종 그 하나였으므로, 숙종만이 유일하게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었다.
그런 완벽한 정통성에 특별히 영민하기까지 했으니 숙종은 매우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그런 혈통의 자신감 덕분에 신하들을 더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 완벽한 정통성은 그로 하여금 성격적으로 다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게끔도 했다. 거기다가 숙종은 그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성격을 닮아, 좋게 말하면 매우 강건한,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인 성격이었다. 아버지 현종은 문인기질의 왕으로 온화한 성격이고, 정치에 있어서도 평온을 좋아했으나, 어머니 명성왕후는 달랐다.
왕 중에 유일하게 후궁이 없는 왕이 현종인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온화한 성격의 현종이 너무 강한 성격의 명성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후궁을 들이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왕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볼 정도로 명성왕후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온화한 현종은 숙종이 열세살 때 승하했고, 명성왕후는 그 후로 십년 가까이 더 살다가 42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어머니를 닮은데다가 후천적으로도 더 오래 산 어머니의 성격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명성왕후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알아보도록 하고, 어쨌든 강했던 어머니의 성격을 숙종 또한 그대로 물러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숙종은 어릴 적부터 병약하였지만 성격은 매우 불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격적으로 비슷했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마저도 아들을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현왕후가 쫓겨난 궁녀 장옥정을 다시 불러 들이자고 시어머니 명성왕후에게 제안했을 때도, 명성왕후는 순진한 며느리 인현왕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 내전이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이렇듯 명성왕후는 얼마나 금지옥엽이었을 외아들이지만, 그의 성격만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전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홧병 증세이다.
"이 때에 왕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훗날 숙종의 아들 영조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까지 홧병으로 고생했는데, 그것이 숙종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아무튼 숙종은 현대의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 있는, 심한 다혈질에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숙종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그는 어머니를 닮아 기질적으로도 강하고 다혈질인데다가,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왕이 되면서 더욱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매우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조선시대 왕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체로 성격이 강한 남자들이 또 감정에 충실한 경우가 많기에 크게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낳은 딸들이 죽었을 때도, 숙종의 하나뿐인 여동생 명안공주가 죽었을 때에도 숙종은 매우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숙종은 좋게 말하면 정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사랑에 쉽게 빠지고, 변덕도 심한, 그리고 오로지 자기 감정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숙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마음이 변하면 또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하게 행동했다.
지금까지 숙종에 대해서만 알아봤지만, 어쩌면 이 글의 결론이 벌써 다 밝혀진 것 같다. 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 최숙빈 모두가 저런 성격을 가진 숙종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감정에만 충실한, 전형적인 나쁜남자. 그런데 그는 카리스마가 엄청난 왕이었다. 그런 숙종 때문에 세 여인 모두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숙종은 남자이기 전에 왕이었다. 왕으로서 정치를 해나가는 데에,자신의 여자들까지 이용한, 철두철미하게 영민하고 냉혹하고, 자기 중심적인 왕이었다. 숙종이 왕비의 폐위와 복위를 반복한 것은 단순한 여자 문제가 아닌 분명한 정치 문제였다. 그의 행동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기인한 계산된 정치적 행동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숙종의 세 여인의 삶을 살펴보려면,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갈등>
광해군이 북인 위주로만 등용한 것에 대한 반발로,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인조 이후 서인이 주가 되고 남인도 함께 참여하는 정권이 계속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과 그의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었을 때, 인조의 어린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상복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은 갈등하였고, 그 싸움에서 서인이 이기면 서인 위주의 정권이, 남인이 이기면 남인 위주의 정권이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1,2차 예송논쟁인데, 그런 식으로 그다지 중요한 사안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더 차지하기 위한 갈등을 계속 했고, 그 갈등에서 누가 좀더 우세한가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서로 견제해가며 정권이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온화한 성격의 현종은 그 어느 세력도 크게 다치지 않게 정국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현종은 일찍 승하하였고, 그를 이어 열세살의 숙종이 즉위했다(1674년).
숙종이 즉위할 때에는 아버지 현종의 뜻에 따라, 두번째 예송논쟁(1674)에서 승리한 남인이 보다 우세한 정권이었다.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는 서인 집안 출신이지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남인도 서인도 특별히 더 지지하지는 않는 상황었는데, 명성왕후가 점차 남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야 했다.
서인 집안 출신인 명성왕후가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명성왕후가 시아버지 효종의 상 중에 숙종을 임신한 것을 두고 송시열에게 비난을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축복 받아야 할 임신이고 아들의 출산이었지만 송시열은 명성왕후에게 핀잔을 준 것이다.
또한 송시열은 그 유명한 예송논쟁에서, 효종이 왕이었지만 그래도 둘째아들이므로 3년상이 아닌 1년상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효종의 핏줄인 현종이나 숙종에게는 기분 나쁜 주장이었다. 그들을 장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까내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들로 숙종과 명성왕후는 송시열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 그래서 그때까지만해도 명성왕후는 서인이지만, 서인에게도 크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결정적으로 남인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남인이 왕실 종친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세력은 주로 왕실 외척, 즉 왕비 가문을 비롯한 양반가문들이었고, 남인세력은 왕실종친 및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양반들이었다.
효종에게는 현종이 유일한 아들이었고, 현종에게도 숙종이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러니 직계로는 왕권을 위협할 사람이 없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효종의 남동생 인평대군에게 아들이 세 명 있었다. 그 세 명이 삼복이라 불리는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형제였다.
우애가 좋았던 효종과 현종은 유일한 사촌지간인 삼복형제에 대해 매우 잘 대우해주었고, 그런 왕을 믿고 삼복은 아주 기세등등한 생활을 하였다. 남인 세력은 그 삼복들과 주로 어울려 다녔는데, 명성왕후의 입장에서 만약 병약한 숙종이 운명을 달리하기라도 한다면 왕위를 잇게 될 그 세 명을 중심으로, 남인이 뭉쳐다니는 것이 늘 눈엣가시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에게, 장성한 삼복과 남인이 무슨 계략이라도 꾸며 숙종을 어떻게 할까봐 명성왕후는 걱정이 많았다. 훗날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강력한 왕권을 자기마음대로 휘둘렀는지를 알면 그런 걱정을 안했을텐데, 어머니의 마음으로는 숙종이 많이 염려되었나보다.
아무튼 그래서 명성왕후는 숙종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삼복과 남인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으로 하여금 삼복이 궁녀와 내통하였다는 밀고를 하게 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홍수(궁녀)의 변"이다. 복창군과 복선군이 궁녀와 내통하여 아이를 임신하게 했다는 밀고였는데, 당시 왕의 여자인 궁녀와 내통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며 종친의 문란행위였다. 이를 통해 명성왕후는 삼복을 일시에 제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삼복의 무혐의가 드러났고, 오히려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무고죄로 처벌받게 될 지경이었다. 그때 명성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청에 나타나 통곡하며 삼복의 처벌을 주장했다. 당황한 숙종은 어머니의 체면을 생각해서 삼복을 유배보내는 걸로 그 사건을 일단락지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많은 조정대신들이 명성왕후의 처신을 문제삼았고,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다"며 명성왕후를 비난했다. 동시에 무고로 대단히 망신을 당한 김우명은 두문불출하며 끙끙 앓다가 홧병으로 곧 죽게 되었는데(1675), 이후 명성왕후는 남인을 더욱 원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명성왕후에게 기회가 온 것이 허적의 유악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는 경신환국이 일어난다. 유악은 비가 오는 날 사용하는 왕실의 천막을 말하는데, 이는 아무리 세도가 높은 양반이라도 쓸 수 없고 오직 왕만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인의 거두 허적의 잔칫날이었다. 비가 오자 숙종은 이 유악을 허적에게 내어주라고 명했는데, 벌써 가져가서 쓰고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게 된다. 영의정이던 허적의 권세가 그처럼 대단한 것에 대해 숙종은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일부 남인들이 숙청되었다. 하지만 고작 유악을 말없이 가져갔다는 것으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악 사건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 사건 이후 결정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된 것은 삼복의 변 사건이었다. 삼복은 앞서 말했던 인평대군은 세 아들을 말한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 사건으로 삼복과 남인의 핵심 세력 허적, 윤휴, 유혁연 등이 유배되고 사사되었다. 이로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니, 이를 경신환국(1680)이라 한다.
이 역모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숙종이 자기 뜻대로 정권을 구상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동안은 신하들끼리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숙종이 주도적으로 신하들을 숙청하고 등용하는 환국이 시작되는 신호탄인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시기였다.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가 한껏 절정에 올라와 있는 시기. 자칫 잘못하다가는 신권에 왕권이 묻힐 법도 했던 시기. 그런 시기에 왕으로 즉위한 숙종은 경신환국 이후로도 두 차례의 환국을 더 주도하며, 신하들이 그에게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그 두 차례의 환국에 이용된 것이 그녀의 여자들이다.
물론 희빈, 인현왕후, 숙빈이 숙종과 정치 상황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녀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치력을 만들고 그 정치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보수적인 정치판에서 그녀들은 끝내는 수동적인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녀들에 대한 판단은 숙종과 남성지배자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주체가 될 수 없는, 그 어쩔 수 없는 사회 질서가 존재했다. 그러므로 여러모로 불편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이용'이라는 단어를 썼다.
<첫번째 승리는 희빈 장씨>
인조반정을 주도하고 성공시켰던 서인에서는 "국모는 반드시 서인집안에서 낸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 그것은 잘 실현되어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도 서인 집안이었고, 숙종의 첫번째 비 인경왕후 김씨도 서인 집안이었다. 그런데 인경왕후가 스무살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게 되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해야 했다.
인경왕후가 죽기 6개월 전까지도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었는데, 앞서 말했던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고, 또다시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 간택할 수 있게 되었다(1681). 그 새로운 왕비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이다.
그런데 인형왕후가 왕비로 간택되기 전, 남인세력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들인 궁녀가 있었다. 실록에서도 유일하게 미인으로 기록되었던 그 여인에게 숙종은 이미 넘어갔으니, 그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가 될 장옥정이었다.
장옥정이 궁녀가 된 것이 스무살이 넘어서인데, 궁녀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궁녀로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옥정은 남인 세력의 거두인 조사석과 왕족 숭선군의 아들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조사석과는 친적 간인 자의대비 조씨 처소의 궁녀로 들어왔다. 당시 궁의 최고 어른이었던 자의대비에게 숙종은 자주 문안하였고, 미인인 장옥정이 숙종의 눈에 쉽게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장옥정은 남인 조사석과 궁의 최고어른 자의대비 조씨의 비호 하에 손쉽게 숙종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총명했으나, 한편으로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던 강한 성격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장옥정이 남인측에서 보낸 미인계임을 간파하고, 왕의 승은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옥정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를 서인집안에서 들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처럼 숙종입장에서는 쫒겨난 장옥정은 그리울 것이고, 어머니 손에서 간택된 인현왕후에게는 반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장옥정은 실록에서 유일하게 "미색이 뛰어나다"라고 기록된 여성인만큼 미모가 엄청나게 특출했고, 숙종보다도 두 살 연상의 한참 성숙한 스물둘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병약했다는 기록에서 발육도 늦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스무살의 숙종보다 여섯살 연하로 당시 14세였는데 22살의 장옥정에 비해 아직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을 소녀였다. 숙종은 어린 아이같은 인현왕후보다는 성숙한 장옥정에게 훨씬 더 끌렸을 것이다.
성격도 그러했을 것이다.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인 시어머니와 자신의 집안에 의해서 가만히 있다가 저절로 왕비가 되었고, 예학을 숭상하는 서인 집안에서 예법에 대한 교육만 받아온 데 비해, 장옥정은 처음부터 왕의 총애를 목적으로 들어온 궁녀였다. 그녀들의 마음가짐은 천지차이였을 것이고, 숙종을 사로잡기 위한 특별한 성교육까지 받았을법한 장옥정은 훨씬 적극적으로 숙종을 유혹했을 것이다.
외모, 성격, 거기에다가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까지, 모든 면에서 인현왕후가 아닌 장옥정이 숙종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거기다 숙종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에 매우 충실한 남자이지 않던가. 불같은 숙종의 마음은 장옥정에게 뜨겁게 불붙었다.
궁에서 쫓겨났지만 왕의 사랑을 받은 장옥정은 훗날 분명 필요가 있을 것이므로, 서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의대비 조씨의 비호를 받았다. 자의대비의 조카이자, 인조의 서자 숭선군의 부인인 신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장옥정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때는 더 빨리 찾아왔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건강한 사람이었고, 그에 비해 숙종이 병약했다. 그때도 숙종이 병이 들었는데, 평소 무당을 좋아했던 명성왕후는 자신이 물벼락을 서면 숙종의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 숙종은 후사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명성왕후는 그런 창창한 숙종을 위해 자신이 대신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았다. 그 길로 명성왕후는 심한 감기에 걸렸고,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42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게 된 것이다(1683).
아무리 강한 성격의 명성왕후라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보는 오로지 외아들 숙종을 위한 것이었다. 숙종에게 위해가 되는 삼복을 무리해서 제거코자 하여 망신을 당했고, 숙종의 앞날을 위해 장옥정을 내쫓았고, 결국 숙종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물벼락도 맞은 것이다. 명성왕후 김씨의 지나치게 강한 성격이 비호감일 수는 있지만, 그녀의 모성애를 생각하면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어쨌든 장옥정에게는 매우 다행으로, 명성왕후가 갑자기 죽게 되면서 그 '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이다. 숙종은 쫓겨난 장옥정을 궁으로 다시 데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숙종이 직접 데려온 것은 아니고, 숙종의 마음을 헤아린 인현왕후가 먼저 제의하여 장옥정이 궁으로 들어왔다. 부인의 도에 대해 충분히 교육받은 인현왕후로서는 당연한 현숙한 처신이었지만, 후일을 생각하면 인현왕후가 참 후회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제의하지 않았더라도 숙종은 어떻게든 장옥정을 다시 들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궁에 들어온 장옥정은 숙종과 그동안의 그리움을 다 불태우며 사랑을 나누었고, 곧 그녀의 세상이 되었다. 숙종은 사랑하는 여인 장옥정만을 위해 별궁 취선당을 지어줄 정도로 로맨틱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첫 아들을 장옥정을 통해 보게 되었다(1688년 10월 28일).
정이 많고 감정에 충실한 숙종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처음 안아본 그 첫아들은 분명 그에게 크나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물일곱이었는데 숙종이 "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처음 본 아들이다."라고 말한 것이 실록에 전한다. 당시의 서른은 지금과 달라, 빠르면 며느리를 보기도 했던 나이었다.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숙종은 아들이 태어난 지 3개월만(1689년 1월)에 그를 원자로 삼고자 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왕비 민씨의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후궁에서 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것은 당연한 반대였다. 이제껏 적장자도 그렇게 빨리 원자에 책봉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후궁 소생을 3개월만에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분명 성급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숙종의 이러한 성급한 행동은 단순히 원자에 대한 넘치는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장옥정이 아들을 출산했을 때, 그녀의 산후조리를 위해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입궐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있었다. 신분이 낮은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옥교를 탔다는 이유로 사헌부 관리에게 옥교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장모나 다름없는 윤씨를 능멸한 것이 왕인 자신에 대한 무시라고 여겼던 숙종은 사건의 용의자인 이익수와 이언기를 파직시켰으나, 같은 서인측의 반발로 두 사람을 곧 복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숙종은 서인에 대한 숙청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서인의 힘이 왕권을 넘어서는 것을 숙종은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건 이후 3개월도 안되어 숙종은 장옥정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무리한 주장을 했고, 당연했던 서인의 반발은 가볍게 무시하며 원자의 명호를 정했다. 그런데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명호까지 정한 원자의 책봉에 대해 다시 한번 반대했다. 숙종은 이미 왕인 내가 한 일에 대해서까지 토를 다는 송시열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삭탈관직하여 유배보냈고, 얼마 뒤 끝내 사약까지 내려 죽게 했다.
그런데 송시열이 누구냐 하면, 숙종의 아버지 현종, 할아버지 효종도 숭상하던 대문호였다. 숙종이 송시열을 유배보냈다가 국문하기 위해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을 때, 지방 곡곡에서 그를 따르는 재야 인사들이 죄인 송시열을 따르게 되었는데, 한양에 가까워지자 그 행렬이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런 송시열이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오고 있는 길에, 정읍에서 그냥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든 것이다. 숙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숭상하던 대학자도 가차없이 처단한 것이다.
그런 송시열까지 단칼에 처단한 마당에 나머지 거물 서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인 거두들은 파직되고 유배되고 사사되면서 서인의 중추세력은 완전히 몰락했고, 대신 남인이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1689).
이 사건에 희빈을 사랑하는 숙종의 사사로운 감정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즉 서인 세력을 숙청코자하는 숙종의 정치적 계산 역시 존재했다. 그처럼 숙종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희빈과 원자를 이용한 것이다. 이용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기는 하고, 희빈과 원자를 사랑했던 숙종의 진심도 맞겠지만, 숙종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음도 분명하다.
남인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미인계는 주효했다. 남인의 뜻대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남인은 자신들의 세상이 오게끔 해준 장희빈에 대해서도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남인은 그뿐이었다. 이후 장희빈이 왕비가 되는 것까지는 남인이 신경쓸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환국즈음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최고조였다. 그동안 장옥정을 위해 별궁도 지어주고, 아들까지 낳게 꾸준히 사랑해주었던 숙종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쉽게 정권을 교체한 것처럼 왕비 자리도 교체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비를 교체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새왕비가 중인 출신의 궁녀였다. 아무리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들도 보수적인 신분사회의 남성이었다. 남인들마저 장희빈이 왕비가 되는 것에는 아연실색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송시열까지 단칼에 죽인 숙종에게 어려운 일은 없다. 결국 숙종은 인현왕후의 폐비 사유를 투기로 하여 끝내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사랑하는 희빈을 앉힌다.
그렇게 희빈은 중인 출신의 궁녀에서, 원자를 낳은 어미로 정1품 희빈이 되었고, 그 얼마 뒤 당대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인 왕비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숙종이 오로지 왕권 강화만을 목적으로 했더라면, 기사환국으로도 이미 목적은 달성되었다. 기사환국까지만 보면 그의 목적이 왕권강화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리해서 희빈을 왕비 자리에까지 앉혀준 것을 보면, 숙종이 그만큼 희빈을 사랑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앞서 희빈과 원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당시 숙종의 마음은 열렬히 희빈을 사랑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희빈이 숙종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고 왕비가 되는 동안 인현왕후는 남편 숙종에게 철저히 부정당했다. 앞서 송시열이 사약을 받기 전에, 숙종은 먼저 인현왕후의 폐위코자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당연히 모든 신하들은 숙종의 생각에 반대했고, 그 반대를 미리 예상했던 숙종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송시열의 목숨으로 남인과 협상한 것이다. 처음에는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던 남인도 송시열의 사사라는 카드를 받고, 왕비 교체를 허락하였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 죄목은 투기였다. "중궁은 투기하는 버릇이 있소. 희빈이 숙원으로 있을 때 중궁이 김귀인과 한패가 되어 과인을 원망하고 숙원을 질투한 실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하루는 중궁이 꿈에 선왕 선후를 뵈었는데 그대와 귀인은 복이 많아 자손의 번창함이 선조 임금 때와 같을 것이나 숙원은 앞으로도 아들이 없고 복도 없으니 만약 궁중에 오랫동안 있으면 경신환국 후 원한을 가진 사람들과 결탁하여 망칙한 일을 꾸며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라 하셨다는 것이오. 예전에도 질투하는 왕비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감히 선왕 선후를 빙자하여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계교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숙원에게 자식이 없다면 어찌 원자를 낳았단 말이오?"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저주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지도, 어떤 모략을 꾸민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꿈에서 선왕 선후를 뵙고 들었다는 말을 전한 것을 가지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보다 더한 투기를 하였으니 폐위가 마땅하다고 말했다. 물론 인현왕후가 전혀 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정도로 폐위될 일은 아니었다. 즉 숙종은 그냥 자기 하고싶은대로 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투기가 죄목이 되어 인현왕후는 폐위되었다. 인현왕후의 생일 다음날, 숙종은 그녀를 폐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중신들은 다시 한번 폐비의 불가를 간청하였고, 재야 유림까지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그들을 모두 유배보내버리며 폐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민씨는 폐비의 절차도 없이 일반 평민이 타고 다니는 소보교를 타고 궁을 나섰다. 민씨를 따르는 사람은 상궁 한 사람과 시녀 두어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역대에 쫓겨났던 왕비들과 달리 민씨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얼굴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외가와 친가 모두 예학을 숭상했던 집안에서 자란 민씨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궁을 나섰다. 숙종은 민씨가 가례 때 받은 교명, 책보, 장복 등을 몰수하여 불태워버리고, 폐비의 출내를 태묘에 고하고 그 교지를 중위에 반포하였다.
쫓겨난 민씨는 친정 집인 안국동 감고당에서 혼자 지내며 죄인생활을 하였다. 사람들의 내왕을 일체 금하고 내외문을 닫아걸었다. 정당을 버리고 아랫채를 썼고, 문이 뚫어져도 창호지 한장 바르지 않았다. 잡초도 그대로 두어 순식간에 집이 폐옥처럼 되었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초라하게 쫓겨난 후, 숙종은 즉시 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그렇게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첫 싸움에서는 장희빈의 완벽한 승리였다. 처음부터 숙종의 마음은 희빈에게 있었고, 쫓겨났다 다시 궁에 들어온 희빈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끝내 아들까지 낳으며, 인현왕후를 내쫓고 왕비자리까지 차지했다. 인현왕후는 늘 초라했고, 장희빈은 늘 화려했다. 매순간 모두 희빈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숙종에 의해 주어졌던 희빈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두번째 승리는 인현왕후>
그렇게 장희빈이 왕비가 된지 5년여 지났고 남인 위주의 정권도 잘 유지되었다. 남인은 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특별히 잘하는 일도, 특별히 잘 못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여인에 대한 사랑이 오래가지 못한 것일까, 숙종은 슬슬 장희빈에게 질렸던 것일까.
어쩌면 그또한 당연한 일이다.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된 것이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후로 5년여가 지나 삼십대중후반에 접어드는 희빈이었다. 당시로는 그 나이면 빠르면 며느리에 손자까지 봤을 나이이다. 아무리 미색이 뛰어날지라도 젊은 여성에 비할 바는 못 되었을 것이다. 특히 희로애락이 자주 바뀐다는 숙종이 아니던가. 그가 10년 넘게 한 여자를 사랑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히 숙종은 다른 여인들도 가까이 했고, 희빈은 왕비가 되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숙종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장희빈의 질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대부분 야사로 전해지기에, 그 역시 장희빈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그 중 한 이야기가 숙빈 최씨와의 일화이다.
숙종이 잠깐 졸았는데 꿈에서 용이 나타나 울면서 "전하, 속히 저를 살려주십시오."했다. 꿈에서 깨어난 숙종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중전이었던 장희빈의 처소에 찾아갔다. 장희빈의 처소에 가보았지만 숙종은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담장 밑 큰 항아리가 엎어져있는 것이 숙종의 눈에 띄였다. 무언가 수상했던 숙종이 빈 항아리를 똑바로 세워보라 지시하니, 임신한 여성이 결박당한 채 온몸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훗날 숙빈이 되는 최씨로, 희빈은 임신한 그녀를 불러다 죽을 정도로 매질을 했는데, 마침 숙종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숙빈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서인인 이문정이 지은 <수문록>에 등장한다. 서인이 지은 책이므로 당연히 장희빈에 대해 좋은 내용일 리 없다. 이러한 야사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인 양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희빈이 왕의 자식을 임신한 후궁에 대해 죽을 정도의 매질을 한다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희빈이 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무언가 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것이 후궁에 대한 가혹한 매질이든 무엇이든, 희빈이 그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숙종의 마음이 희빈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희빈은 왕의 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지, 왕비로서의 삶을 유지할 능력은 부족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중인집안 출신인 그녀는, 왕비로서의 소양과 덕목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후궁이면 몰라도 왕비로서는 자질이 부족한 그녀를 보며 숙종은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지 모른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세력이 비대해졌고, 장희빈에게 세력이 모이는 것에 대해서도 껄끄러웠던 숙종이었다. 자신이 아닌 신하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던 숙종은 희빈에게 세력이 모이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왕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왕비로서의 삶을 유지하도록 위해 한 행동들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불러왔다. 희빈의 왕비로서 부족한 모습에 숙종의 마음이 식어갔고, 힘있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도 숙종은 불편했다. 그렇게 멀어지는 숙종을 잡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숙종의 마음은 더욱 희빈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러던 차에 서인세력이었던 숙종의 첫부인 인경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만기가 올린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보게 되었다. 숙종은 아무 잘못 없이 폐서인 되었던 인현왕후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고, 그런데도 원망없는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가 그리워졌다. 또한 서인세력이 보낸 미인계에 유혹당하니, 바로 숙빈 최씨였다.
유명한 숙빈 최씨와 숙종의 첫만남 일화이다. 숙종은 지난 날을 후회스럽게 되돌아보며 궁궐을 거닐다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무수리 최씨가 쫓겨난 민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을 드리고 있었다. 떠난 상전에 대해서도 의리를 다하는 최씨를 어여삐 여긴 숙종은 그날 최씨와 함께 밤을 보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야기처럼 정말 숙빈이 아무 의도 없이 인현왕후를 추모하다가 숙종의 사랑을 받은 것보다는, 서인이 처음부터 의도한 미인계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최씨가 당시 왕비 장희빈이 있는 상황에서 폐위된 인현왕후를 위해 생일상을 마련했다는 것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할만한 일인데,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새로이 총애를 받게 된 숙빈에게는 당연히 서인 세력이 함께 했다. 숙빈은 무수리 출신이라고도 하고, 훗날 영조 측에서는 침방 나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영조 측에서 주장하는대로 침방 나인이기보다는 무수리나 그와 비슷한 낮은 출신일 가능성이 더 높다. 숙빈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보면, 그녀가 승은을 입기 전까지 매우 가난했고, 다른 남자들과도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당시 침방 나인은 궁녀 중에서도 꽤 높은 직위여서 그렇게 가난할 수는 없었고, 무수리는 궁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출퇴근 개념이었기에 다른 남자와의 관계 가능성도 염두할 수 있었다.
또한 훗날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에 심각할정도의 컴플렉스를 가진 것, 모든 왕들이 친모에 대해 추존했는데 영조가 그러지 못한 것 역시 숙빈의 신분이 너무 낮았던 것을 추측하게 하며, 침방 나인보다는 무수리라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어쨌든 그녀의 신분이 너무 심각하게 미천했으므로 숙빈이 아무리 왕의 총애를 입는다하더라도 스스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같은 서인세력인 인현왕후를 적극 변호하며 그녀의 복위를 꾀했다. 숙빈은 인현왕후의 안타까운 소식을 숙종에게 전했고, 그것을 들은 숙종은 흔들렸다. 냉정하게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감정이 달라진 숙종은 또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구구절절 인현왕후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처음에 권간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으나, 곧 깨달아서 그 심사를 환히 알고 그 억울한 정상을 깊이 알았다. 그립고 답답한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져, 때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이 눈물을 흘리니, 깨어서 그 일을 생각하면 하루가 다하도록 안정하지 못하거니와, 이때의 정경을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어제 답찰을 보니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어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후련하여 열 번이나 펴 보고 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중략> 행여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오늘 보낸 의대도 안심하고 입고서 옥교를 타고 들어가라. 내일 다시 서로 만날 것이므로 우선 말을 다하지 않겠으나, 내 뜻을 아아서 보낸 물건을 죄다 받고 또 몇 글자로 회답하기 바란다."
숙종은 자신이 신하들의 꼬임에 넘어가 잘못 처분하였고,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다고 인현왕후에게 변명을 했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답장을 열 번이나 펴보며 좋아하고, 선물공세를 하며 인현왕후의 환심을 사려한다. 편지의 말미의 답장을 꼭 부탁한다는 말에는 숙종의 간절함까지 묻어있다. 이 편지들을 보면 숙종의 마음이 완전히 인현왕후에게 돌아선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철저히 계산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적인 남자 숙종이 그저 인현왕후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그녀를 복위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눈치만 보는 남인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인은 집권 세력으로서의 업적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전의 허적이나 윤휴와 같은 거물급 인사도 나오지 않았다. 국왕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로 소극적인 정치를 했던 남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숙빈을 중심으로 서인세력은 재기를 꿈꿨고, 숙종은 마음이 떠난 희빈이 아닌 새로운 여인 숙빈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시 서인 김춘택은 남인에게 원한을 가진 모든 서인들을 모아 정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서인 측에서는 장희재가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한다는 음모를 숙종에게 고했는데, 관련자들은 무고라며 즉시 반격했다. 숙종도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오히려 무고죄로 서인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 후 갑자기 숙종이 서인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데, 그 배후에 숙빈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실각했고 다시 조정은 서인으로 채워지니, 이를 갑술환국(1694)이라 한다. 숙종은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을 신원시켰으며,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배향당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도 사상적으로 완전히 복귀시켰다. 이렇듯 서인이 복귀하면서 인현왕후 역시 왕비로 복위된 것이다.
장희빈은 다시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왕비가 되면서 받은 희빈의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는 불태워졌고, 인현왕후가 폐비 될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왕비 옥보도 파괴되었다. 이렇게 다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관계는 원점이 되었다(1694년 4월).
그리고 그 해 숙종은 숙빈에게서, 훗날 영조가 되는 두번째 아들을 본다(1694년 9월). 두번째 싸움에서는 희빈이 모두 진 것이다. 왕비의 자리는 인현왕후에게, 남편의 사랑은 숙빈에게 모두 빼앗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은 몰라도 왕비의 자리는 기다리면 돌아올지도 몰랐다. 5년간 폐서인 생활을 하며 원래도 병약했던 인현왕후는 더욱 병약해졌다. 곧 죽을 것이라고 누구나 예측했기에 만약 희빈이 가만히 있었다면 인현왕후가 죽고 그 자리가 세자의 모후인 자기 것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늘 적극적이었던 희빈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인현왕후의 병세가 심해지자 다음 왕비를 장희빈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누구도 희빈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니 인현왕후보다 더 눈치를 봤다고 해야 맞다. 장희빈이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사실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여인 장희빈은 경거망동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병약한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이 다시 왕비가 되면 아마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여인인 숙빈이 목숨을 걸고 장희빈을 모함했다. 사실 모함인지 진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나는 장희빈이 빌미를 제공했고, 숙빈이 모함했고, 숙종이 정치적으로 그것을 승인했다고 생각한다.
희빈이 자신의 거처인, 한때 숙종이 사랑의 증표로 지어주었던 그 별궁 취선당에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사당을 만들어 저주했다고 숙빈은 숙종에게 고해바쳤다. 희빈은 자신의 아들 경종의 병 치료를 기원하는 사당이라고 말했지만, 숙종은 숙빈의 손을 들어주고 희빈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그렇게 숙빈과 희빈의 싸움은 숙빈의 승리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희빈이 이미 다 죽어가는 인현왕후를 저주할 이유가 크게 없었다. 오히려 희빈 측의 주장대로 아들의 병 구완을 기원했다는 것이 정황상 더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희빈을 사사한 것은, 그녀의 정치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을 때,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숙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당시 열네살이었던 세자 경종 역시 조정 대신들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숙종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숙종은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희빈에게 왜 사약까지 내렸을까? 물론 장희빈의 잘못도 있다. 이미 인현왕후에서 희빈으로 대세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희빈은 경거망동하며 왕비 복위를 꿈꾸며 정치적 모략을 했다. 그로 인해 오빠 장희재는 제주도까지 유배보내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말처럼 세자의 생모였으니 자비를 베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숙종이 사랑했던 희빈을 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자의 생모였기 때문이다. 희빈의 성격을 아는 숙종은 훗날 자신이 죽고 희빈이 대비가 되었을 경우, 희빈이 왕의 어머니로서 정치를 농단할 가능성을 염두했기에 희빈을 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희빈의 죽음은 숙종의 변심과 함께 훗날의 정치적 계산까지 합산된 결과였다. 희빈은 숙종이라는 한때는 사랑해마지 않던 남편에 의해 죽임 당했다. 숙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희빈으로서는 배신당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신은 희빈만 당한 것이 아니다. 뒤이어 숙빈도 숙종에게 버림받는다. 희빈처럼 사약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숙빈을 궁 밖의 거처를 마련하고, 숙빈을 염두하여 다시는 빈이 비가 되지 못하는 법도 발행한 것이다. 숙빈은 인현왕후도 희빈도 없으면 다음 왕비 자리는 자기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세 명 중 두 명은 죽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숙종의 아들을 셋이나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은 앞으로 빈이 비가 될 수 없게 하라는 엄명을 내리며, 숙빈의 욕망을 딱 잘라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에게 위해가 되지 않도록 아예 숙빈을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겨버리고 다시 찾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다섯의 인현왕후는 병으로 죽고, 그 후 두달만에 마흔셋의 희빈 장씨도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아 죽는다. 그리고 서른둘의 창창한 숙빈 역시 숙종에게 내쳐졌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새로운 왕비를 들였다. 숙종은 자신보다 27세나 어린, 16세의 새로운 왕비 인원왕후를 간택한 후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자식도 보지 않았다. 못 본 것인지 안 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극적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미 장성한 세자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아내들에게는 냉혹했지만 자식들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물론 그 다정함에도 편차가 있어서 아들에게 상처를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숙종을 사이에 둔 세 여인의 싸움에서 과연 승리자는 누구일까?
끝내는 숙종에게 구구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받으며 복위되었고, 죽어서도 숙종과 함께 묻혔으며, 후대에 현숙한 여인의 표본으로 전해지고 있는 인현왕후일까?
비록 숙종에게는 내쳐졌지만, 아들이 왕이 되고, 그 아들이 조선왕 중 가장 긴 재위기간을 보내며 많은 업적까지 남긴, 또 살아서 가장 편안한 말년을 보낸 숙빈일까?
죽은 뒤 명예도 더럽혀졌고 하나뿐인 아들의 왕으로서의 삶도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남자 숙종에게 살아생전 가장 열렬하고도 진정한 사랑을 받은 여자인 희빈일까?
사실 인현왕후나 숙빈은 승자의 반열에 들어가지만 희빈은 누가봐도 패자같다. 하지만 숙종이 평생동안 가장 열렬히 사랑한 이는 오로지 희빈이다. 희빈이 살아있을 때에도, 희빈이 죽은 뒤에도 숙종은 희빈만큼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숙종이 아무리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희빈을 사랑할 때의 마음만은 온전히 진실했던 것 같다. 중인 출신의 일개 궁녀일뿐인 희빈을 위해 별궁을 지어주고, 희빈을 사랑할 당시에는 오직 그녀만을 사랑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을 서둘러 원자로 책봉하기 위해 송시열같은 대문호에도 맞섰으며,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해서 그녀를 왕비자리에까지 올려주었다. 오로지 정권교체만이 목적이었다면,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 세력으로만 조정을 채웠을 때 이미 그 목적은 달성된 것이었다. 숙종이 남인도 반대하는 왕비 교체를 단행한 것은 희빈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변하는 법.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장옥정만을 애틋하게 사랑했던 숙종이었지만 끝내 그녀를 사사하게 되었다. 그간의 복잡한 이야기는 앞서 했으니 생략하고, 어쨌든 숙종은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까닭에 희빈을 사사한 후 후회했다고 한다. 숙종은 그전에 조정대신들을 처벌할 때도 먼저 벌을 준 후 수사에 착수할만큼 성격이 급했다. 희빈에 대해서도 일부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 후회의 결과로 장례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1품의 예로 후하게 치뤄주었으며 경종을 끝까지 지켰다고 본다.
숙종은 서오릉이라 하여 많은 여자들과 함께 묻혀있는데, 그 중에서 인현왕후와 쌍릉으로 합장되어 있고, 바로 옆에 세번째 정비인 인원왕후가 있다. 그렇게 세 명의 무덤을 삼릉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주위로 인경왕후와 장희빈이 각각 묻혀있다. 즉 서오릉에 묻힌 다섯명이 숙종과 세 명의 정비, 그리고 장희빈이다. 그에 비해 숙빈은 멀리 파주에 묻혀있다. 그것이 말년에 숙빈을 향한 숙종의 마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숙종이 세번째 정비로 간택한 인원왕후는 대표적인 소론집안이었다. 당시 세자를 지지했던 소론측 여인을 왕비로 간택한 것은, 노론 세력으로부터 끝까지 세자를 지키겠다는 숙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인원왕후는 당색을 노론으로 바꾸고 연잉군을 지지하게 된다. 이를 두고도 숙종의 마음을 따라 인원왕후도 변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나는 숙종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숙종이 죽기 3년 전에 있었던 유명한 정유독대(1717)를 두고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세자, 훗날의 경종에게서 마음이 떠났다고 해석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생각이다. 우선 왕이 신하와 '독대'하는 것은, 무조건 사관이 참관해야 한다는 법칙을 깬 것이므로, 숙종의 강력한 왕권, 나쁘게 말하면 자기 마음대로 다 하는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독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사관의 기록이 없기에 그 정유독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다. 대체로 그 정유독대에서 숙종이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 것에 기인하여 세자를 교체할 의도였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 정유독대 이후로 숙종이 죽기까지 3년의 시간이 더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세자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이었다. 숙종의 성격상 그 독대 이후 3년 동안이나 경종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숙종이 세자를 갈아치울 생각이 있었으면 3년 안에 경종이 아닌 영조로 세자를 바꾸고도 남았을 것이다. 정유독대는 훗날 영조에게 유리하도록, 숙종이 경종이 아닌 영조를 선택했다고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대를 한 신하가 노론의 이이명이었고, 독대의 내용도 그를 통해서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숙종은 마지막까지 경종을 지키고 싶어했고, 다만 후사를 보지 못했던 경종의 뒤를 이를 인물로 연잉군(영조)과 연령군을 염두해두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숙종은 연잉군보다는 연령군을 훨씬 더 총애했음도 알 수 있는데, 독대 후 얼마 뒤 연령군이 스무살의 나이로 죽게 되자 자연히 연잉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뒤에 영조 대의 왕비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영조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으로 숙종이 영조를 가장 덜 사랑해서라고 생각한다. 숙종은 첫 아들인 경종과 막내아들인 연령군을 연잉군보다 더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의 편애를 영조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숙빈이 낳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죽었을 때도 숙종은, 자신의 첫 부인인에게서 난 첫 자식들인 딸들이 죽었을 때나 희빈의 둘째아들이 죽었을 때에 비해 훨씬 더 담담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숙종이 숙빈에 대해서는 애정이 크지 않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숙종이 희빈을 사랑했다는 흔적은 매우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비록 사약을 받긴 했지만 숙종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희빈이 세 여인들의 싸움에서 승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승자일까하는 이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처음부터 당연히 없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과 두번의 왕비 교체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이 구축되자, 더이상 이용 가치가 없는 자신의 여자들을 모두 숙청했다. 세자의 모후로서 정치력이 있는 희빈은 사사시켰고, 역시 아들을 낳은 숙빈은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궐밖으로 내쳤다. 숙종이 숙빈을 가장 마지막에 선택한 이유가 그녀의 신분이 미천하여 뒷배가 되어줄 세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라고하니 숙종이 얼마나 철저히 계산적인, 영민하면서도 냉혹한 왕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세 여인은 모두 숙종에 의해, 당시 남성중심의 사회에 의해 이용당하고 희생당한 것뿐이다.
숙종이라는 절대권력을 가진 남성 앞에,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던 강신들 속에서, 왕비가 되었든 미인이 되었든,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당시 여자였다면 다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남성 중심의 조선 시대라는 사회가 참 슬프고 아플 뿐이다. 세 여인 중 그 누가 승자란 말인가. 세 여인 모두 피해자이고 희생양일 뿐이다.
<희빈 장씨>
나는 희빈 장씨에 대해 인현왕후 민씨나 숙빈 최씨보다 조금더 안타깝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장희빈=요부, 악녀"라는 이미지는 어렴풋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희빈 장씨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비극도 모자라 수백년을 그런 프레임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걸까.
먼저 희빈은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아니 희빈은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었다.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 출신으로 중인이다. 즉 그녀 역시 양반이 아닌 중인이다. 어머니 쪽이 종의 신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장옥정 역시 어머니를 따라 천인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희빈 장씨를 더 깎아내리기 위해 왜곡된 것일 수도 있고, 그녀의 어머니가 장형의 두번째 부인이라는 기록이 더 우세하므로, 그녀를 장형의 적녀라 보고 중인이라 하겠다. 하지만 장옥정의 어머니가 중인의 후처가 되었으니 높은 신분이 아님은 확실하고, 장옥정 역시 양반이 아닌 중인 이하의 신분임은 확실하다.
물론 당시 역관 집안은 나름 파워가 있는 집안이었고, 재물로만 따지면 요즘의 재벌가라 할 수 있다. 장옥정의 아버지는 일찍 죽어 그렇게 되지 못했으나, 그녀의 후원자인 5촌 당숙 장경은 가히 재벌이라 할 만했다. 당시 장경은 실록에서도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장경은 소현세자와도 친분이 있었고, 인평대군이 청나라로 가는 길을 수행하며 그와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장경은 남인들의 정치적 후원자가 될만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파워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쟁쟁한 중인 집안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아닌 희빈의 출신 성분이 뼛속까지 명문가 딸인 인현왕후와는 비교되지 않음은 당연했다.
희빈 장씨와 영원한 라이벌인 인현왕후 민씨는 양반 중에서도 명문가인 민유중의 딸이다. 민유중은 서인 세력의 거두였기에 인현왕후는 강력한 서인 세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고, 서인가 여인인 시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게도 자연히 예쁨받을 수 있었다. 즉 인현왕후 민씨는 아무런 적극성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시어머니와 친정집안의 집권성향에 따라 저절로 얻게 된 왕비자리였고, 자신을 보필해주던 서인 세력들에 의해 저절로 유지될 줄 알았던 왕비자리였다.
그에 비해 장옥정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했다. 물론 남인의 비호 하에 입궁하였고, 숙종의 총애가 이루어지도록 도움받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인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자 희빈의 왕비 책봉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렇게 지지세력인 남인까지 반대하는 상황에서 희빈이 왕비에 오르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신만 믿고 더 적극적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인현왕후에게는 든든한 친정 배경, 자신을 지켜줄 서인세력, 우호적인 시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희빈은 왕비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서야 했다. 중인이라는 출신성분, 강건한 시어머니, 당시 정권을 차지했던 서인세력, 그리고 왕비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남인세력까지, 인현왕후가 저절로 얻은 것과는 달리 희빈은 매우 어렵게 차지한 왕비자리였다.
또한 자신을 보호해줄 많은 것을 갖추었던 인현왕후는 굳이 숙종의 사랑까지 얻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믿을 것은 자신 하나 밖에 없었던 장옥정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왕의 사랑을 갈구해야 했다.
당대 여성들과 다른 희빈의 그 적극성이 처음에는 숙종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된 그 적극성에 숙종도 거북함을 느꼈다. 당대는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 훌륭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어느 순간 장희빈의 그 적극성은 왕비로서의 부덕이 되었다. 하지만 희빈의 적극성은 멈추지 않았고, 그녀보다 더 미천한 신분으로 더 적극성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숙빈이 등장하면서, 결국 희빈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희빈의 적극성은 당시 여성들에게 금기시되는 것으로, 그 시대 남성들의 시선에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이 추앙받는 시대에 희빈의 적극성은 요부, 악녀라는 글자로 읽혔다. 그런 시대에 소극적인 인현왕후는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희빈은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이다.
희빈이 악녀, 요부로 기억되는 두번째 이유는 희빈은 결국 인현왕후, 숙빈과의 싸움에서 끝내는 패자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기에 패자가 된 그녀는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 세력은 몰락했다. 그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싸우게 된다. 즉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고, 인현왕후와 숙빈의 지지세력인 서인만이 남은 상황에서 세 여인에 대한 선인과 악인의 구분은 명확해진다. 그리고 숙종대의 여자들 이야기는 권선징악, 사필귀정, 해피엔딩에 맞게 각색된 것이다.
물론 희빈이 앞서 말한 그 적극성을 온전히 다 바르게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들로, 인현왕후도 후궁 희빈을 매질했고 숙빈도 희빈을 모함했다. 희빈만이 그 모든 악행과 치부가 드러난 데에는, 그녀가 그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 민씨가 <인현왕후전>에 기록된 것처럼 온전히 현숙한 여인이 아님은 실록에 이미 잘 기록되어 있다. 숙종이 그녀를 내쫓은 명목이 투기였을 정도로, 인현왕후가 희빈을 투기하고 험담하고 매질까지 했음은 이제 꽤 알려진 사실이다. 왕이 후궁을 총애한 것에 대한 너그러움은 차라리 선조 대의 의인왕후 박씨가 정말로 후덕했다고 할 수 있지 인현왕후 민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현왕후를 예를 모르는 현숙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인현왕후는 대대로 예학을 숭상한 서인 집안 여자답게 최대한 예를 다해 현숙하게 처신하였다. 그저 남편이 첩을 볼 때 평범한 부인이 그러하듯, 인현왕후도 보통의 여인이기는 했다는 말이다. 인현왕후는 절대 선인도, 부처도 아니었다. <인현왕후전>이 인현왕후를 미화하기 위해 너무 과대포장을 한 것이다.
그것은 숙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현왕후전>이 영조 대 소론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은, 영조의 어머니 숙빈이 최대 수혜자일 것이다. 숙종 당시의 정황들을 보면, 미천한 신분의 숙빈은 도가 넘을 정도로 강하게 희빈과 대적했다. 아마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모든 상황이 희빈 쪽으로 유리한 속에서도 숙빈은 목숨을 걸고 숙종에게 희빈에 대해 밀고인지 모함인지 모를 말들을 했다. 다행히 그것들이 모두 성공했기에 훗날 숙빈은 영화를 누리고 희빈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지만, 숙빈은 당돌했고 목숨을 걸 정도의 위험한 모함을 한 것은 분명하다. 즉 인현왕후와 달리 숙빈은 그저 현숙한 여인으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숙빈의 그런 면을 알았기에 숙종도 한참 아들을 생산하던 숙빈을 멀리하여 궁밖으로 내쫓은 것이다. 하지만 숙빈의 경우 아들 영조로 인해 모든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야말로 조선시대 최하의 신분에서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고 할만하다.
<인현왕후전>은 그렇게 충실히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인현왕후와 숙빈에 대한 미화, 소론 자신들이 얼마나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했는지에 대한 매우 장황한 설명이 담긴 책이다. 그런 책에서 당연히 희빈 장씨에 대한 왜곡도 심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인현왕후전>에 바탕을 둔 사실이니, 이미 왜곡된 사실을 가지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어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만 그 책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그녀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더이상 당시 남성들의 시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시대의 눈으로 그녀들을 재평가해보아야 한다. 장희빈의 적극성과 그녀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이상 여성의 적극성을 요망함이나 악독함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하며, 장희빈이 사필귀정의 결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정치싸움에서 실패한 것 뿐임을, 남성중심의 정치 세계에서 희생당한 여성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역사를 알고, 미래를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너무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틀린 걸 진실로 알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남성중심의 조선시대에 장희빈의 인생과 죽음에 대해 모든 책임을 장희빈에게 돌렸던 것처럼, 지금 현대의 시대를 사는 나는, 장희빈, 인현왕후, 숙빈 세 여인의 불행과 그녀들의 자손들의 불행들까지 그 모든 책임을 숙종에게 묻고 싶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대한 의리조차도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나쁜 남자,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이용해버리는 냉혹하고 권력욕이 강했던 왕, 숙종 때문에 세 여인이, 그녀들의 자식들이 모두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숙종에 비해 희빈 장씨는 악인이 아니라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물론 그 적극성을 오롯이 바르게만 썼다면 더 좋았겠지만, 적극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악한 일도, 악다구니도 썼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당대 여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적극성을 실천한 여성이었다. 당대 남성들의 눈에 거슬렸던 그 적극성이 <인현왕후전>에서 더 왜곡, 과장되었고, 훗날 야사에서, 더 훗날은 드라마에서 그것들은 더더욱 왜곡, 과장되는 과정을 거치며, 어느새 희빈은 악녀, 요부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머릿속에 갖춰졌다.
하지만 아니라고, 희빈은 그렇지 않았다고, 정말 못된 사람은 숙종이라고, 그런데 심지어 벌을 받지도 않았다고.
당시 남성중심의 시대에서 여성을 한낮 수단으로, 마음에 들면 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렸던, 그런 숙종의 가벼운 처신 때문이라고, 말해보고 싶다. 숙종이 나 또한 그런 시대에 왕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억울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첨언>
나도 어릴 적에는 장희빈은 악인, 인현왕후는 선인으로 생각하고, 인현왕후에게 한없이 가여운 마음을 가졌었다. 그리고 장희빈처럼 요부가 되지 말고, 인현왕후처럼 현숙한 여인이 되겠다고 다짐도 했던 것 같다.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요구되는 순종적인 여성관을, 그들의 의도대로 아주 잘 학습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이야기의 의도를. 남성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 그들이 우리 여성들에게 요구한 것을.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다르게 해석해보아야 한다. 더이상 그들이 주입한대로 장희빈은 악녀, 인현왕후는 선인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장희빈은 그 시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인정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아쉽게 그녀는 정치 싸움에서 패자였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장희빈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으로 묘사해보고 싶다해도, 남겨진 기록들이 많지도 않고 대부분 왜곡되었기에, 구체적인 묘사가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그리고 장희빈이 아무리 능동적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그녀를 꺾을 수밖에 없었던 남성 중심의 시대 상황에 나 역시 좌절되는 느낌이다.
아직 부족한 내가 더이상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바뀐 시대 상황에서는 지금에 맞게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해 볼 필요는 있다. 더이상 장희빈에게 요부, 악녀라는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기만이라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