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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 김씨

by SOL

인목대비 김씨 역시 인수대비 한씨와 마찬가지로 인목왕후라 불리기 보다 인목대비로 더 유명하다. 그 이유가 그녀가 왕비 자리에 있었던 시간보다 대비 자리에 있었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전>, <한중록>과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계축일기>의 주인공이자, 인조반정의 가장 중요한 명목이 되었던 광해군의 폐모살제의 주요인물인 인목대비 김씨. 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효가 가장 중시되었던 시대에 아들에 의해 폐모까지 당하는 수모에도 죽지 못해 살아남았고, 그 한을 책으로 풀어낸 여인. 애통했을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까?



<선조의 두번째 왕비>


인목대비는 선조의 두번째 왕비이다. 당시 19세의 그녀가 51세의 선조와 결혼하였는데, 그러므로 인목대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51세가 될 때까지의 선조의 삶과 또 선조와 관련된 인물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선조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명종의 아들이 아닌 조카로 왕위를 이었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13살의 나이로 죽고 명종이 더는 자식을 보지 못했기에, 명종의 아버지였던 중종의 손자, 즉 명종에게는 조카가 되는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받으니, 그가 선조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아들이 없었던 명종이 왕위를 물려줄 여러 조카들을 만났는데, 조카들에게 왕이 쓰는 익선관을 써보라고 하자 다들 신기해하며 써봤는데, 하성군만이 감히 쓸 수 없다며 사양했다. 그로 인해 명종이 하성군을 영특하게 보고, 그를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명종은 죽기 직전까지도 친아들을 얻고 싶어했고, 그를 위해 무수리 출신 장씨와 지나치게 방사(房事)하다가 급격히 더 몸이 약해졌다. 결국 명종이 후사도 결정하지도 못한 채 갑자기 죽게 되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 심씨가 후사를 정하게 되었다. 인순왕후는 평소 명종이 하성군을 총애하였다하며 하성군을 후계자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하성군은 왕비 심씨 집안이 미는 인물이었다. 즉 심씨 집안의 뜻에 따라 그가 왕으로 결정된 것이다. 명종은 살아생전 하성군을 염두했던 후계자 논의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조카들에서 후계를 결정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명종이 죽기 전까지 후계구도를 확실히 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하성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순왕비 심씨 집안 외척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중종의 아홉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즉 왕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하성군은 심씨 가문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조선 개국 이래 선조 전까지는 모두 적통으로 왕위를 이었는데, 선조는 최초의 서자로, 방계로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되었. 그 컴플렉스는 선조로 하여금 더욱 적자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훗날 그의 아들들에도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왕이 될 사람이 아닌데 왕이 된 것이 당시에는 좋았겠지만, 훗날 자식들간에 서로 죽이고 죽게 되는 그 비극을 생각하면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선조의 여자들 : 의인왕후 박씨,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선조가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명종의 3년상을 치르는 것이었다. 3년상 중에는 혼인할 수 없었기에 선조의 혼인은 명종의 3년상 뒤로 미뤄졌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십대의, 당시 열여섯이었던 왕과 그 왕만을 바라보는 궁녀들이 가득한 궁에서 선조가 3년을 독수공방했을 리 없다. 그 때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가 있었으니 소주방 나인 김씨였다. 선조는 그녀에게 푹 빠졌다. 3년상을 마치고 정식 왕비로 의인왕후가 책봉되었지만, 선조는 여전히 궁녀 김씨만을 총애했다.


당시 선조가 궁녀 김씨에게 빠져있었던 것을 대비 심씨도 알았기에, 대비 심씨는 특별히 외모가 특출난 여인을 왕비로 뽑았다. 그 여인이 바로 의인왕후 박씨이다. 의인왕후의 아버지 박응순은 평소 검소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했는데, 주위에서 그를 국구(왕비의 아버지)라고 생각히지도 못할 만큼 깨끗한 삶을 살았다. 그런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의인왕후 박씨 역시 길쌈을 하는 도구조차 비축하는 일 없이 검소했고, 성품도 온화했다.


청렴한 명문가 친정집안에 훤칠한 외모와 온화한 성품까지 갖춘, 왕비로서 완벽해보이는 의인왕후 박씨였지만, 여전히 선조는 궁녀 김씨에게만 푹 빠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이라도 낳았더라면, 방계임이 컴플렉스였던 선조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을텐데, 안타깝게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그녀가 석녀임이 밝혀지자 선조는 완전히 의인왕후에게서 마음이 돌아섰고, 대비 심씨도 더이상 선조가 후궁을 가까이하는 것에 대해 어쩌지 못했다.


그 사이 선조가 총애했던 궁녀 김씨는 연달아 아들을 낳았으니, 그 두 아들이 임해군과 광해군이었다. 그 덕에 후궁 중에서 가장 높은 품계인 빈의 칭호를 받아 공빈이 된 그녀는, 안타깝게도 광해군을 낳고 겨우 두 해 지나 병으로 죽게 된다. 공빈이 죽으면서 선조에게 다른 후궁들이 자신의 죽음을 저주했다는 말을 하여, 선조는 그녀의 죽음 이후 다른 후궁들을 미워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토록 공빈에게 애틋했던 선조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사랑에 빠졌는데, 그 새로운 사랑은 공빈을 능가했다.

그런 면에서 선조는 감정에 매우 충실한 사람인 것 같다. 늘 사랑을 정열적으로 했고, 그 사랑에 빠지면 다른 사랑은 못 본 체했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다른 왕들에 비해 더 지극하게 드러나 있고,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자식 외에 다른 자식은 또 본체만체 했다. 그의 그런 감정적인 태도가 훗날의 비극까지 불러오게 된 것이다.


잠시 선조의 대단한 자식 사랑과 자식간에도 차별이 심했던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왕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조건으로 그의 아들들은 직접 전장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선조는 모든 자식을 다 전장에 내보내지 않고, 그가 덜 사랑했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만 전쟁터로 보냈다. 인빈 김씨의 두 아들은 전장터가 아닌 선조와 함께 하는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나이를 보면 임해군은 19세, 순화군은 13세, 인빈의 두 아들 신성군은 16세, 정원군은 13세였다. 무엇으로 봐도 신성군이 전장에 나갔어야했지만, 선조는 대놓고 아들들을 차별한 것이다.


전장에 나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평소 시정잡배같기로 소문난 왕자였는데,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심한 난봉질이 남았다. 그에 민심이 돌아선 결과 백성들에 의해 두 왕자는 왜군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그때 그들이 인질로 잡힌 기간만 5년이 넘었다. 당시 왜군은 두 왕자의 목숨을 빌미로 선조와 협상을 시도했는데, 선조는 두 아들을 포기하지 못한 채, 왜군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결국 5년 뒤 왜군이 물러가고 두 아들도 돌아오게 되었을 때도, 두 아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그들을 보필했던 신하들만 사형시켰다.


이 이야기에서 선조가 자식들을 심하게 차별했음을, 그리고 덜 사랑한 자식도 나라의 운명보다 더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왜군은 두 왕자의 목숨과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두고 협상을 시도했는데 선조는 끝내 왕자들의 목숨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조가 자식들을 사랑한 것처럼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다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돌아와서 선조가 새로이 사랑에 빠진 인빈 김씨는 4남 5녀의 많은 자식을 낳을 정도로, 선조가 더 특별히 총애한 여인이다. 인빈 김씨는 선조보다 한 살 연하로, 대비전의 궁녀였다가 선조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인빈 김씨는 성격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았다. 그녀의 안하무인으로 인해 내명부의 위계질서가 흔들렸고, 그녀의 아랫사람들도 그녀를 믿고 방자하게 굴었기에 사헌부에서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하지만 선조는 인빈의 말만 믿고 무엇이든 그녀에게 유리하게 처리해주었다.


인빈 김씨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했고, 선조는 인빈의 뜻대로 그녀의 첫째아들 신성군을 왕세자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발발로 급하게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고, 또 피난 중에 신성군이 죽음으로써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둘째 아들 정원군이 있었지만, 앞서 말한 임해군, 순화군과 더불어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했기에, 인빈도 정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려고 노력하진 않았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를 모해하면서 선조의 사랑을 차지했다. 세자 자리를 두고 광해군과 경쟁하기도 했다. 당연히 인빈과 광해군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일 리 없었다. 하지만 선조의 병이 심상치 않게 되자 하늘의 뜻이 광해군에 있다고 판단한 인빈은 그 후로 오히려 광해군 편이 되어 선조와 광해군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내가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서모(인빈)의 공이 컸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인빈에게 잘 대우해 주었고 망나니로 소문난 그녀의 아들 정원군도 포용해주었다.


인빈은 성격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았으나,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정치감각은 있었다. 욕망을 품되 아니다 싶으면 깨끗이 포기하고, 적합한 살길을 찾았다. 그녀의 그런 수완이 선조를 더욱 그녀의 치마폭에 매여살도록 했을 것이다.



선조가 인빈에게 푹 빠져있는 동안 의인왕후 박씨는 어떻게 지냈을까? 의인왕후는 비록 자식을 낳을 수는 없지만 일찍 죽은 공빈의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거두었고, 선조가 후궁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다 보아넘겼다. 그렇게 그녀는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당시 인빈이 온갖 행패를 다 부릴 때에도 내명부의 수장이었던 의인왕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숨죽이며 사는 수밖에. 그녀는 그저 국모로서의 역할에 만족하며 전혀 투기하지 않았으므로 죽을 때까지 왕비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 속이야 물론 썩어들어갈만큼 뭉그러졌겠지만, 살아있는 관음보살을 자처하며 선조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살아갔다.


의인왕후에 대한 선조의 박대는 임진왜란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길에 올랐을 때, 선조와 함께 한 사람은 인빈 김씨였다. 선조는 정비가 아닌 후궁 인빈 김씨를 데리고 의주로 떠났고, 의인왕후 박씨는 홀로 강계로 피난갔다. 당연히 왕과 함께 떠난 인빈은 모든 면에서 왕비 박씨보다 편안한 피난길이 되었을 것이다.


1년 반이 넘는 피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올 때에도, 선조는 인빈만 데리고 왔다. 의인왕후는 한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여전히 해주에 머물렀고, 다시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세자와 함께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7년여의 길고도 길었던 피난 생활에 의인왕후 박씨는 갖은 고생을 다 했고, 피난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몇년 뒤 4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의 마음 고생에, 피난길에서의 몸 고생까지 더해지면서 급격히 몸이 약해졌던 것이다.


그녀가 죽자 선조는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덕망높은 그녀를 칭송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칭찬인지 비꼼인지 조금 헷갈리기도 하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아들로 선조의 세자가 되었다. 정비에게서는 한 명의 자식도 보지 못했던 선조는 애첩 인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발발로 서둘러 세자를 책봉해야 하자, 그동안 조정대신들의 의견이 모아졌던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이 이루어졌다. 적자가 없으면 대신 장자를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선조의 장자였던 임해군은 난폭한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온화한 성격이면서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광해군이 세자된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처음부터 광해군이 그리 탐탁치 않았다. 그동안 세자 책봉을 미룬 것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서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조정대신들의 뜻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지만, 광해군은 선조가 마음에 두었던 세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세자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선조의 마음이 더 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세자 광해군이 그 역할을 너무 잘해내서였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에 비해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떠났고, 여차하면 요동으로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안 백성들은 선조에 대해 분노했고, 사실상 한양의 궁궐을 불 태운 것은 왜적이 아니라 백성들이라고 한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에 대한 분노였으리라. 궁을 다 태우면서 동궁(세자가 머무르는 곳)만은 불태우지 않은 것도 선조와 광해군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자연히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민심이 들끊었고,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열등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 하고 광해군은 사양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선조는 더욱 광해군이 못마땅해졌다.

7년간의 지난했던 임진왜란이 끝이 나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전위 소동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민심은 여전히 선조가 아닌 세자 광해군에 향해 있었고, 선조는 계속해서 세자에게 열등감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 열등감과 불안함의 표출로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선조가 세자로 삼고 싶어했던 신성군은 피난길에서 이미 죽은 상태였고, 인빈의 다른 아들 정원군 역시 임해군에 버금가는 시정잡배로 유명했다. 야욕이 컸던 인빈마저 신성군은 몰라도 정원군은 왕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포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이미 세자로서 많은 업적도 세웠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는 광해군이 불만스러워도 현실적으로 딱히 어쩔 도리 없이 그저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문안하는 세자 광해군을 문전박대했고, 당시 명나라 상황상 세자 승인을 받지 못한 광해군에게 명의 승인도 받지 못한 주제에 세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무시했다. 또한 세자의 약점과 잘못을 꼬투리잡아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려고도 했다. 그런 아버지 선조 밑에서 광해군은 절망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거기에 더해 점차 아버지에 대해 반발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 33년, 의인왕후가 죽게 되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친아들 삼아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 의인왕후가 죽자 광해군은 큰 지지세력을 잃은 것이다. 조정대신들은 선조에게 새 왕비를 들일 것인지 물었는데, 그것은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그대로 인정하고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과 같았다.


선조는 새 왕비를 들이겠다고 했고, 그것은 광해군을 몹시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명나라의 세자 승인도 받지 못했다. 선조가 다른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세자를 바꿀 명목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의인왕후의 3년상이 끝나자마자 선조는 새 왕비를 들이니, 그녀가 바로 인목대비 김씨이다.



선조의 두번째 왕비가 된 인목왕후


선조의 왕비간택령이 떨어지자 많은 양반가에서는 서둘러 딸을 혼인시키거나 간택단자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당연히 아무리 왕이었지만 너무 고령이었고, 더구나 그 새 왕비자리는 위태로운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세자가 장성하였는데, 대군이라도 낳게 되면 정치판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그 파장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는 위험한 왕비 자리였다.


당시 선조의 재혼을 위한 금혼령이 내려졌을 때 실록은 "대혼의 명령이 내려진 뒤로 경외의 사족 가문에서는 아들딸들을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느라 부산을 떨며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명이니 간택 단자를 내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인목대비의 나이가 18세였는데, 그 시대로는 노처녀인 셈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혼란함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살의 나이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것은 꽤나 늦은 편에 속했다. 인목대비가 그 나이까지 혼사를 치루지 못한 이유가 김제남이 여러번 혼처를 거절당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제남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실록에서는 김제남을 "성품이 유약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재물 모으기만을 좋아한다는 기록도 있다. 김제남 스스로도 고백했듯 그는 사람 사귀는 것을 어려워했고,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다.

김제남은 유명한 연안 김씨였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과거에도 합격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과거 합격이 늦어진만큼 오랜시간 가난하게 살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주위에 혼담을 넣어도 여러번 거절당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연안 김씨에 과거 합격자인데, 자존심상 아무 가문과 혼사를 정할 수도 없었기에 자식들의 혼사가 늦어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간택 단자를 내면서도 김제남은 딸이 왕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조선 왕실의 성이 이(李)씨인데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 쇠(金)와는 상극이 되는 김씨 성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선조는 김씨성을 가진 여인들과 가까웠다. 가장 먼저 총애했던 공빈도 김씨였고, 훗날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던 인빈도 김씨였으며, 그동안 왕비의 성으로 기피했던 관례를 깨고 왕비마저 김씨를 맞은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예상과 달리 김제남의 딸 김씨가 왕비로 간택되니, 그녀가 인목왕후 김씨이다. 아마 당시로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던 것도 왕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50대의 나이에 십대초중반의 부인을 들이기는 민망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조가 왕의 자리와 거리가 멀었지만 왕이 된 것처럼, 인목왕후도 왕비 자리와 거리가 멀다고 여겼지만 왕비가 되었다.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혼삿날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원래 혼인하는 날에 비가 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선조는 친영례를 그만두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7월의 장맛비가 계속되던 상황인지라 예조의 반대로 식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신부는 혼례복을 갖추어 입고 태평관에서 선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는 비를 뚫고 태평관으로 왔다. 그런데 선조가 태평관에 도착하자 비가 그쳤다. 그리고 예식이 끝나고 선조가 궁궐로 돌아가자 다시 비가 쏟아졌다. 선조가 옆에 있을 때는 해가 떴는데, 선조가 떠나자마자 다시 비가 쏟아진 것이다. 선조가 인목대비 옆에 있을 때에만 햇빛이 나고, 선조만 없으면 비가 내렸다는 그 일화처럼 인목대비의 앞으로의 삶도 그러했다.


어쨌든 19세의 인목대비는 32살 연상의 51세 선조와 혼인을 치루었고, 김씨는 새로운 왕비가 되어 많은 후궁과 양반관료들의 인사를 받았다. 세자 광해군과 세자빈 또한 계모인 인목왕후에게 인사를 올렸을 것이다. 광해군에게 새로운 어머니가 된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9세나 어렸다. 당시 인목왕후 김씨는 19세, 광해군은 28세였고, 광해군 부인 세자빈 유씨는 27세였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결혼은 광해군에게는 재앙과 같은 일이었다. 새로운 왕비가 대군을 낳고, 선조가 오래 살게 되면 세자가 바뀔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에 따라 세자 측에서는 왕비 책봉 전에 먼저 세자 책봉을 위해 명나라 사신을 보내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선조는 "왕비의 책봉을 즉시 요청해야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으니 일이 아주 잘못되었다. 먼저 국모를 바르게 세운 뒤에야 인륜의 기강이 설 것이다. 어찌 국모없는 나라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다시 세자의 승인을 미루었다. 이는 이미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에게서 멀어졌음을 의미했다.


인목대비는 선택을 해야했다. 선조의 편에서 선조가 오래 살 것을 믿고 새로운 아들을 낳을 것인지, 아니면 광해군과 타협을 할 것인지.. 인목대비는 전자를 선택했다. 재혼한 선조는 광해군을 더욱 심하게 냉대했고, 그런 상황에서 인목대비는 선조와 마찬가지로 세자를 박대하고 무시했다.


여기서 인목대비의 정치감 없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저 남편이 하는대로 따라가기만 할뿐, 스스로 상황 판단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행동할 줄 몰랐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계축일기>에서 인목대비는 자신을 늘 피해자, 희생자로 묘사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지도, 능동적으로 헤쳐나가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아홉살의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때의 그 왕비 자리는 어린 그녀에게 너무나 어려운 자리였다. 열아홉 어린 왕비의 등장에 노쇠한 후궁들은 불만이 컸다. 당시 인빈은 50세였으며 다른 선조의 후궁들도 인목왕후에게는 대체로 어머니뻘이었다. 즉 그동안 선조를 모신 후궁들이 딸뻘인 어린 정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었다. 또한 오래토록 왕비자리에 있으면서 선조의 박대까지 받았던 의인왕후의 궁녀들 역시 인목대비에게 좋은 감정일 리 없다. 인목대비는 그 모든 내명부 여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이성적인 판단력과 노련한 정치감각이 필요했다. 하지만 19살의, 천성이 유약하고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한 성격의 아버지를 둔, 인목대비로서는 그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인목대비는 정치보다는 임신을 더 잘했다. 혼인하자마자 임신을 한 인목대비는 혼인 열달 후 첫 아이를 낳았다. 인목대비의 임신 소식이 광해군 측에 전해지자, 광해군의 장인이 되는 유자신은 인목대비를 유산시키기 위해 갖은 못된 짓을 다 했다. 대궐에 돌팔매질을 하고, 궁녀를 매수해 문에 구멍을 뚫어 나무로 쑤셔대게 하기도 했으며, 대궐 밖에 화적떼가 나타났다고 하여 인목왕후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자신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목대비는 무사히 출산했고, 광해군 측에게는 매우 다행으로 딸이었다. 당시 해산소식이 잘못 전해져 대군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딸이라고 정정되었는데, 딸임을 알게되어서야 유자신은 축하 예물을 올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후 1년 뒤 인목대비는 다시 출산을 했는데, 이번에도 딸이었고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은 임신 중의 스트레스가 이유였을 것이다. 아마 유자신은 이전보다 더한 방법으로 인목대비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또 2년 뒤 인목대비는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영챵대군이다. 그때 유자신은 "집에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자나깨나 대군을 모해하려는 계책만 꾸몄다"고 한다.

선조는 물론이며 인목대비와 그녀의 친정 역시 대군을 낳아 기뻐했을 것이나, 인목대비의 올케 정씨는 "우리 집의 화가 여기에서 시작되는구나"했다고 한다.


어쨌든 선조는 그토록 바라던 적자 아들을 나이 55세에 드디어 보게 되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상속해주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라 백성들은 물론이요 왕실의 형편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도 선조는 갓난 아이에게 엄청난 재산을 주었다.


이미 적통 공주인, 인목대비가 낳은 첫딸 정명공주에게도 과할 정도의 재산을 주었는데, 영창대군에게는 더했다. 정명공주는 본래 7세는 넘어야 봉작되었던 관례를 깨고, 2살에 봉작을 받았다. 봉작은 단순히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봉작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받기에 그 의미가 컸다. 봉작이 되면 재산을 주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다른 왕들은 7세쯤 되어서야 봉작을 했는데, 선조의 자식사랑은 그만큼 대단했다. 공주에 책봉되면서 정명공주는 850결 규모의 궁방전을 받았다.


앞서 인목왕후도 왕비에 책봉되면서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 당시 왕비가 되면 대략 1천 결 정도의 왕실 토지를 받았는데, 1천 결의 토지에서 거둘 수 있는 세금은 매년 최소한 쌀 1천 여 가마 이상이었다. 물론 그녀의 재산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신 관리해주었는데, 당연히 친정아버지였다. 오랜시간 가난하게 살았던 김제남이 훗날 재산 증축을 하게 될 거대한 자본이 인목왕후로부터 들어왔고, 거기에 어린 정명공주의 재산이 더해졌다. 그리고 가장 많은 재산이 영창대군으로부터 들어온다.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난지 3개월만에 노비 200명, 전답 100여결을 하사했고, 9개월쯤 후에는 노비 250명과 전답 200여결을 더 하사했다. 게다가 선조는 영창대군을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재산을 주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평원대군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많은 재산에 평원대군의 많은 재산까지 더해져,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많은 재산을 가졌다. 그런데 그에게 아들이 없기에 그 많은 재산이 주인 없는 상태로 머무르는 중이었다. 실록에도" 제안대군의 재산이 많았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엄청난 재산이 었는데, 그것을 모두 영창대군에게 준 것이다. 그 모든 재산을 관리했던 김제남은 거기에 정당치 못한 방법까지 동원해 더욱더 재산을 늘였다. 실록에는 김제남에 대해 "재물을 긁어모으고 이자를 불렸으며, 자신의 몸만 살찌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는 그렇게 자신의 적자에게 엄청난 재물을 물려주었다. 전쟁을 겪은 터라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때, 선조는 늘 광해군에게 검소함을 강조하며 재산을 거의 주지 않았는데, 그와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선조는 아직 봉작될 나이가 아닌 대군의 봉작명까지 벌써 "영창"으로 지어주었다. 왕자라 하더라도 대개 8세 이전에 봉작하였는데, 선조는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했는지, 아기였던 대군의 봉작명을 벌써 지어준 것이다. 그런데 그 봉작명이 또 문제였다.


영창이라는 이름은 영원이 번창하다는 의미인데 그 뜻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영창이 중국에서 황제의 연호로 사용된 적이 있던 이름이었던 것이다. 중국 황제의 연호로 잘 알려진 영창을 봉작명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선조가 마음 속으로 이미 세자를 그로 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영창이라는 이름에 비해 광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강원도 춘천의 별칭이었다. 즉 광해군은 춘천에 봉해진 군이란 뜻이고 영창대군은 중국황제처럼 영원히 번창할 대군이란 의미였다. 봉작명만 보면 광해군은 강원도 춘천을 관할하는 제후이고, 영창대군은 황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봉작명에 열등감을 가졌을 것이다.


훗날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은 영창이라는 두 글자가 황제의 옥새에 새겨진 글자라고 하여 여러 차례 인목대비에게 봉작명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선왕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만 하였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봉작할 때까지, 그 봉작명에 신경을 썼다.


이처럼 영창대군의 재산과 봉작명은 모두 광해군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에 대한 사랑만이 지극히 컸다. 선조가 오래 살았다면 정말로 세자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목왕후의 복은 거기까지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선조는 자주 병환에 들었고, 결국 영창대군이 태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57세의 나이로 선조는 죽게 된다. 그 때 25세였던 젊은 왕비 인목왕후는 이제 아무런 보호막 없이 어린 두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대비가 되었다. 6세의 정명공주와 3세의 영창대군과 함께 끈 떨어진 연처럼 허울 뿐인 왕실 최고 어른이 된 것이다.



<선조의 죽음>


선조의 죽음으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입장도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아무리 다음 보위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대비라 하더라도, 당시 겨우 두 돌이 된 아들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릴 수는 없었다. 마땅히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옥새를 주게 되니, 광해군은 지난 16년간 갖은 설움을 다 견디며 지켜낸 세자 자리에 대한 보상을 드디어 얻게 되었다.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존재 그 자체가 불안했고 불만이었다. 광해군 자신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았던 재산, 대군이라는 정통성, 거기에 부왕의 유언에 따라 영창대군을 보호하는 조정대신들까지, 광해군은 여전히 영창의 존재가 거슬렸다. 광해군은 그러한 마음을 여러 차례 인목대비에게 드러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에게 문안을 가면, 자연히 함께 생활하는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만나게 되었다. 광해군은 자신의 아들보다 어린 정명공주에게는 예쁘다는 칭찬도 하고 안아도 주었지만, 더 어렸던 영창대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은 울먹이며 "형님 전하께서는 누님만 저리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않으시네. 차라리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날 것을 왜 남자로 태어났을까" 말하며, 하루종일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영창대군을 보는 것조차 싫어했던 광해군은 아예 대비전으로 문안가는 대신 자신의 처소로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만 불러 함께 식사를 할 정도였다.

인목대비가 선조의 살아생전에는 선조를 믿고 영창대군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선조는 죽었고 광해군이 왕이 된 상황이라면, 그때라도 상황 판단을 명확히 했어야 했는데 인목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인목대비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되어 돌아왔다. 그 하나가 선조가 남긴 유언장을 이용해 아들을 보호하고자 한 일이다. 인목대비는 이미 죽은 선조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광해군에게 인정으로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광해군을 더욱 비참하고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선조는 죽기 전에 인목대비에게 두 개의 유언장을 남겼다. 세자에게 전달된 유언장에는 "동기 사랑하기를 내가 살아 있었을 때처럼 하라. 참소하는 사람이 있거든 신중히 생각하고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꼭 내 뜻을 잊지 말길 바란다."였고, 대신들에게 전달된 유서에는 "영창대군이 어리고,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걱정스럽다.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인심을 헤라이기 어렵다. 만약 사설이 있다면 공들이 사랑으로 보호하여 붙들어주기를 부탁한다."라고 쓰여있었다.


인목대비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선조의 그 유언장은 광해군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첫째로 그 내용은 온통 영창대군만을 위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광해군을 전혀 신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둘째로 유언장을 몰래 광해에게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했는데, 이로써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마음을 모든 신하들이 다 알게 었다. 그 유언장으로 인해 광해군은 더욱 비참한 심경이었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선조의 유언장이 더 존재하진 않을까하는 광해군의 불안이었다. 혹시라도 영창대군이 장성한 뒤 그를 왕으로 옹립하라는 선조의 유언장이 더 나까봐 광해군은 몹시 불안해했다. 훗날 계축옥사 때 유언장이 더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매우 민감하게 진행했던 것에서, 광해군이 선조의 유언장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신경쓰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선조의 유언장으로 자신의 아들을 살리고자 했지만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인목대비는 선조가 남긴 수많은 재산으로 영창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역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광해군은 영창에 비해 매우 돈이 없었다. 임란으로 불타버린 궁궐을 지을 돈이 없어서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사정을 인목대비도 알았을 것인데, 그 돈을 광해군에게 다 줘버렸다면 광해군에게 의심과 불안도 덜 수 있고 광해군의 마음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김제남은 재산 증식에 더더욱 힘을 썼다. 광해군의 최측근 궁녀 김개시는 늘 영창의 재산을 다 가져올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목대비와 그 측근들이 얼마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태천집>에 따르면 서경주는 영창대군에 대한 광해군의 의혹과 불안을 알고 두려워하던 중에 영창대군에게 창진이 일어나자, 김제남에게 편지를 보냈다. "역병을 크게 앓는 아이에게 아무 혈에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하니 반드시 그 법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 그에 김제남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서경주를 지혜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않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소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하면서 마침내 따르지 않았다.


서경주는 광해군의 불안을 없앨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아이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정도로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광해군 측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목대비는 끊임없이 선조의 유언을 무기로 광해군에게 왕으로서 아들로서 형제로서의 도리를 다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것은 감정적인 호소일 뿐이었다. 김제남에 의해 영창대군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축되었고, 두살배기였던 영창대군도 이제 7살이 되어 봉작을 받을만큼 컸다. 그리고 이제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좋은 혼처까지 물색중이었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가문과 혼인을 시켜줄 요량이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안심시키려면 영창대군을 무력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꾸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자 시절부터 늘 불안한 삶을 살았던 광해군은 미래를 점치는 걸 좋아했는데, 마침 그때 본 점쾌가 영창대군이 혼인하면 더욱 번성한다는 것이다. 인목대비가 좋은 혼처를 찾고 있는 그때에 광해군은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더는 영창대군을 그냥 둘 수 없다고.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비록 이 궁궐에 대군 10명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너와 조카간이 아니냐? 예전에 세조께서는 단종이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렵구나. 내 반드시 영창대군을 없애고 너를 편안케 하리라."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덕목인 형제간의 우애를 왕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아끼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는 인목대비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던,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인목대비는 그만큼 정치감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선조가 총애했던 인빈 김씨는 선조의 병색을 보고 해군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달리했다. 그동안 인빈 김씨는 광해군과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이었다. 광해군의 친모인 죽은 공빈 김씨를 험담하여 선조로부터 공빈에게 마음이 멀어지도록 만들었고, 그 자리를 자신이 꿰찼다. 선조의 지극한 총애에 힘입어 자신의 아들 신성군을 왕세자로 삼고자 애썼고, 임진왜란만 아니었다면 아마 신성군이 세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공빈의 아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은 인빈 김씨를 매우 원망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험담하고 자신들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했던 서모였다. 이미 광해군과 사이가 안 좋았기에 그녀는 처음에 인목대비의 편에 서기도 했다. 선조의 많은 후궁들이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정비 인목대비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싫어할때에도 인빈은 새 왕비에게 호의적이었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는 것보다는 인목대비의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인빈 김씨는 입장을 바꾸어 광해군 편에 서게 된다. 선조의 명이 다해간다고 판단했을 때 , 인빈 김씨는 선조와 광해군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고 선조에게 광해군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훗날 광해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서모 인빈의 공이 컸다고 회고하기도 한 것이다.

인빈은 매우 욕심이 많았고, 안하무인의 성격이었다. 그녀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살얼음을 걷는 듯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그 정치판에서 그녀의 정치감각만은 인정해주어야 하겠다. 그녀는 상황파악을 이성적으로 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정확히 찾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인목대비는 유언장을 대신들 앞에서 공개하고, 그 유언장에 의지하여 광해군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영창대군의 재산을 무한히 불리고, 이제는 좋은 혼처까지 물색하는 중이었다. 인목대비도 정말 아들을 보호하고 싶었더라면 좀더 이성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광해군의 질주, 그리고 인목대비의 처절한 몰락>


인목대비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듯, 광해군 역시 자신 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은 일찍 죽었고 하나 남은 귀한 아들이었다. 영창대군보다 고작 몇해 더 형이었던 광해군의 아들에게,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보다 더욱 불편한 존재였다. 선조의 적자이고 재산이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많았는데, 거기에 명문가에서 장인까지 뒷배가 되어준다면,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세자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다.


광해군은 더이상 영창대군의 존재를 두고볼 수 없었다. 그는 오랜 시간 참아왔던 분노들을 모아 복수를 시작했다. 그 유명한 계축옥사이다.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난 그 사건의 발단은 미미했다. 그런데 광해군이 정말로 그렇게 믿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사건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순 강도사건은 어느새 역모사건으로 변해 있었다.


당연히 그 역모의 주동자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다. 그래도 아직은 자신의 어머니였던 인목대비를 바로 연관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과 그 아들이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당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가 인목대비 궁을 향해 "아무개야 왜 너는 아비와 오라버니들을 살려주지 않는 것이냐" 하고 울부짖었다는데, 인목대비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목대비는 아버지와 오빠들을 살리려고 박석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려 그것을 닦은 적삼을 광해군에게 보내기도 했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내며 영창대군을 내어줄테니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영창대군으로 말미암아 이런 화가 내 부모와 동생에게 미치다니, 어찌 듣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있겠소? 여기 내 머리털을 베어서 증표로 줄 터이니, 내 아들을 데려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리고 대신 내 아버님과 동생들을 놓아주시오. 자식으로 말미암아 부모께서 화를 당하시다니, 차마 살아서는 못 보겠소이다."


하지만 광해군에게는 차가운 회신이 돌아올 뿐이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나는 형님이신 임해군을 정성껏 대접하였는데, 형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시자 마마께서는 저를 지목하여 "형을 살해하였다."하셨다지요? 그리고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자 제가 약밥에 독을 넣었다고 하셨다지요? 또 선대의 궁녀를 알지도 못하는데 제가 아비와 형을 살해하였고 음증까지 하였다고 소문을 내셨다지요? 이런 말들이 모두 대비마마가 계신 곳에서 나왔다 하니 모름지기 원수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더 이상 글월을 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직 어린 영창대군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이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어머니에게도 글월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이 회신이 왔다.

"서양갑과 박응서의 아비가 다 서인으로서 대비마마의 아버님 되시는 분과 같은 무리이온데 어찌 모른다고 하시옵니까?일이 이렇듯 분명하니 다시는 제게 말을 붙이지 마옵소서." <계축일기>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화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제와서 인목대비가 다 내놓겠다고 아버지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해봐도, 광해군에겐 그동안 인목대비에게 쌓인 불만과 불신이 너무 컸다.

광해군은 아직 8살밖에 안된 영창이 뭘 알겠냐며, 역적을 도모한 자들을 엄벌해야한다는 이유로 인목대비의 친정 집안을 몰락시켰다. 인목대비의 방패막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영창대군의 그 수많은 재산은 광해군 소유가 되었다.


계축옥사는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역모로 마무리되며 김제남과 그의 아들은 사사당했고, 영창대군은 역적의 수괴가 되었다. 그러자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영창은 비록 나이가 어려 지각이 없지만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는 설이 누차 여러 역적들의 진술에서 나왔으니, 누가 화의 근본이라 하지 않겠는가"

영창대군이 비록 역모를 도모할 순 없었겠지만,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기에 그 역시 죄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되었고, 한달 뒤에는 인목대비로부터 영창대군을 빼앗아갔다.


계축일기에 실린 그날의 일기는 그 누구라도 눈물짓게 할만큼 애절, 아니 처절하다.


6월 21일, 영창대군을 출궁시키기로 결정한 광해군은 대비 김씨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했다.

"조정에서 대군을 내놓으라고 난리이옵니다. 끝까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만, 아우를 잠깐 문밖에만 내보내주소서."

"영창은 아직 내 슬하를 떠나지 못하는 일고여덦살 어린아이라오. 동서도 분간치 못하는 이 어린 것을 어찌하려오? 하고 거절하였다.

이후로도 수차례 편지가 오가며 답이 나오지 않자, "지금이라도 내보내주신다면 살릴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막고 보내지 않으시면 영창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이어 궁녀들까지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궁녀들은 "속히 허락하셔서 부디 소인들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다.


6월 22일, 젊은 환관과 궁녀들이 대비전에 들어와 영창을 찾느라 소란을 부렸다. 대비 김씨는 어린 영창을 차마 내보내지 못하고 한없이 통곡하며 "하늘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서럽게 하십니까"라고 울부짖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광해군이 두려웠던 궁녀들이 다그쳤다. 대비 김씨는 "너희들은 궁녀라서 어미 자식 간의 정을 모르는구나. 차마 내주지 못하겠노라"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결국 정상궁이 대비 김씨를 들쳐 업고, 주 상궁이 정명공주를, 김 상궁이 영창대군을 업었다. 겁에 질린 영창은 "어마마마와 누님이 먼저 서고, 나는 그 뒤에 설 테야"하고 소리 쳤다. 그들의 앞에는 환관 10여명이 엎드려 있었다. 대비 김씨는 그들에게 넋두리하기를 "너희도 선조대왕의 녹을 오래 먹고 살았으니 이 광경을 보고 어찌 참담하고 측은한 마음이 없겠느냐? 이 모두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죄로구나. 어린아이니라, 아직 동서도 분간 못하는 것을 잡아내려 하다니, 조정대신들이나 대간들이나 모두들 돌아가신 대왕을 생각한다면 차마 이리할 수는 없으리라" 하였다. 환관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서 내보내소서. 우리라고 어찌 모르겠나이까마는 이럴일이 아니옵니다."라고 말할 뿐 어찌하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광해군의 궁녀들이 대비 김씨와 정명공주를 업은 상궁들의 다리를 붙들고, 다른 궁녀들이 영창을 업은 상궁을 밀어내보냈다. 그 순간 대문이 닫혔다. 문밖에서는 영창이 울부짖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영창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만큼 대문을 사이에 두고 통곡소리는 높아졌다. 거처로 돌아온 대비 김씨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울부짖으며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 <계축일기>


광해군에 의해 친정 집안이 몰락했고 모진 을 견디는 이유였을 어린 아들마저 빼앗긴 인목대비는, 삶의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힘겹게 버티기도 했을 것이다.


대비전에서 출궁된 영창대군은 한 달정도 한양의 어느 집에 구금되었다가, 그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가시로 울타리 친 집에 감금)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쯤 뒤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창대군의 죽음은 매우 잔혹하였는데, 실록에는 "당시 강화부사였던 장항이 음식을 주지도 않고, 방 안에 가두고 불을 피워 뜨거워 눕지도 못하고, 영창대군이 창살을 부여잡고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소문을 들은 강화도 사람들 치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 겨우 9살이었다.


영창대군이 9살의 어린 나이로 증살이라는 잔인한 형벌로 죽었지만, 그 사실을 인목대비가 당장은 알지 못했다. 인목대비가 알고 자결이라도 할까 두려웠던 광해군은 인목대비 측근 궁녀들의 입단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꿈에 자꾸 영창대군이 나타났다. 영창대군은 "저는 이미 옥황상제를 뵈었다"고 말했다. 이에 인목대비는 주변에 사실을 고하라 했고, 결국 영창의 죽음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은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남은 딸이 있었다. 인목대비가 그때 자결이라도 한다면 그 하나 남은 딸도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목대비는 그 딸을 위해 죽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친정도 아들도 다 빼앗아간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존재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광해군의 친어머니 공빈 김씨를 정비로 추숭해야했기 때문이다.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는 과정에서 인목대비는 걸림돌이었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기도 전에 있었던 "유릉(의인왕후의 능)저주사건"에 인목대비를 연루시켜 죄를 만들어 냈다. 그때 그녀의 궁녀 30여명이 심한 고문을 받으며 죽었다. 모진 고문에 궁녀들이 거짓 자백을 하게 되자, 인목대비는 죄인이 되었고 그녀를 정비가 아닌 선조의 일개 후궁으로 전락시켰다. 1618년 인목대비는 대비의 권위를 상징하던 어보, 의장물 등을 모두 압수당하고, 서궁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인목대비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아들에게 폐모된 것이다. 그리고 서궁에 혀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서궁에 갇혀 산 세월은 정말로 죽지 못해 살았던 세월이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게 어느새 식량도 주지 않았고, 기본 물자도 제공하지 않았다. 서궁에 유폐되어 동물의 똥에서 나온 씨앗을 심어 먹을 것을 얻고, 목화씨를 얻어 옷을 해입는 삶이 5년여 지속되었다. 그 사이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유일한 삶의 끈이었을 정명공주를 내놓으라 했고, 인목대비는 이미 죽어 없다고 거짓말하며 정명공주만은 궐밖으로 끝내 내보내지 않았다.


광해군이 정말 정명공주를 찾고 싶었다면 충분히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정명공주는 광해군에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혹시나 정명까지 뺏긴 인목대비가 자결이라도 한다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와 함께 궁에서 죽은 사람으로 살아갔다.



<회복되는 명예>


그런 모진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군사들이 서궁으로 몰려왔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었던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찾으러 온 줄 알고, 정명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세력들이었다.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다시 선조의 정비로 인정하고, 새로운 왕에게 전달할 옥새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새로운 왕으로 인조를 옹립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처지는 완전히 정반대로 달라졌다.


광해군은 자신의 주위를 아첨하는 신하들로만 가득 채운 잘못이 있었다. 그의 폐모살제에 대해 민심은 그의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위는 광해군이 민심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아무리 어머니라 하더라도 왕에게 불충하면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라는 논리로 어머니를 유폐시켰지만, 민심은 충을 명분으로 효를 저버린 광해군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주위를 자신에게 동조하는 인물들인 대북파로만 가득 채우며, 정권에서 밀려난 서인세력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동안의 광해군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표출된 것이 바로 인조 반정이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년 3월 13일 한밤중에 거사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곧바로 군사들을 서궁으로 보내 대비 김씨를 모셔오도록 했다. 한밤중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뺏으러 온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보낸 군사가 아니라 광해군을 폐하는 반정군임을 알고도 한동안 인목대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나간 회한의 세월을 돌이켜보았던 것일까. 능양군(인조)이 직접 찾아와 대비 김씨에게 절한 후 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하자, 10년 간 쌓인 한을 담아 말했다.

"먼저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시오. 내가 직접 그 살점을 씹을 후에 책봉하겠소."


인목대비의 분노가 잘 드러나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폐위된 왕이라 하더라도 죽일 수는 없었기에 대신들이 만류하자 "내가 상심한 지 이미 오래되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했소.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용서하시오."하며 능양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능양군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둘째 아들 정원군의 장남이다. 풍수지리도 좋아했던 광해군은 인빈의 묘에 왕의 정기가 서려있다는 말을 듣고 이장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결국 인빈의 자손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것이다.


한편 대비로서의 모든 권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으로 옮긴 인목대비 김씨는 광해군 부자의 처단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인목대비는 과거 광해군이 자신을 폐위시키기 위해 내세운 죄목보다 훨씬 더 많은 38가지의 죄목을 나열하여 광해군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자신이 영창대군을 유배 보냈던 그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이후는 더 먼 제주도로 보내졌다. 광해군은 그곳에서 재기를 꿈꾸며 모진 목숨을 18년이나 더 유지했다.


광해군이 세자 시절, 인목대비는 텃새를 부렸다고 한다. 광해군의 막내 아들이 아팠는데, 동궁의 약재로는 치료가 어려워 대전 약재를 빌려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인목대비(인지 궁녀인지는 모르나)가 막아서 대전 약재를 쓰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그 아들이 죽게 되었다. 그 후로 광해군 부부는 더욱 인목대비를 증오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왕이 되어 그녀를 철저히 짓밟았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상황이 바뀌자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짓밟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광해군 역시 아들인 세자는 사사되었고 왕비와 세자빈은 모두 자결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인목대비는 이미 친정아버지와 오라버니, 아들도 죽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광해군과 인목대비가 달랐던 것은 광해군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최소한으로 했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어 최고의 권력을 획득하였지만, 무리하게 복수하지 않았고 자신을 곤궁에 빠뜨렸던 궁녀들에 한해 최소한의 복수를 하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죄를 만들기 위해 수백명을 고문해 죽인 것과 대조적으로 인목대비는 궁녀 12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용서했으며, 그 측근들을 연좌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권위를 되찾았지만, 명분이 부족했던 반정이었던만큼 이후로도 끊임없는 난이 일어났고, 그 중 하나의 난에 또 인목대비가 연루되었다. 아마 그럴 능력도, 여유도 없었을 인목대비는 다시 남성들의 정치에 휘말린 것이다. 하지만 인조반정의 명분이 인목대비였던만큼 인조는 그녀에게 죄를 묻지는 않았다.대신 그녀의 딸은 인목대비가 죽고 인조가 죽을 때까지 인조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살아야했다. 어쨌든 그렇게 한평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 한복판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던 인목대비는, 정묘호란까지 겪고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계축일기>에서 드러난 인목대비의 성격은 유약하고 감성적이다. 그런 성격이 그녀가 정치적인 사람이 못되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 감정이나 인정에 호소했고, 궁녀들에게까지 감정적으로 휘둘렸다. 하지만 정치적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사리사욕에 밝고, 계산적이며 약삭빠르다는 의미이다. 인목대비는 천성이 그러지 못했기에, 냉혹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자신은 물론 주위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왕비였다. 열아홉의 어린 처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왕비 자리에 갑자기 놓여졌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찾아내라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문정왕후도 세자가 있던 상황에서 중종과 재혼하였지만, 인목대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이었다. 문정왕후 때의 세자는 세돌이 되었던 아기였으나 인목대비 때의 세자는 그녀보다 9살이나 더 많은 성인이었다. 문정왕후는 세자가 성장할 때까지 차근차근 정치감을 익힐 수 있었으나 인목대비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각본이 다 짜여져 있었던 상황에서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폭풍전야의 정치 한복판에서 당연히 그녀는 중심을 잡기 어려웠을 것이었고, 그랬기에 몰아치는 그 폭풍에 휩쓸려 무너져 버렸다.



사실 나는 인목대비에 대해 쓰는 내내 너무 불편했고, 쓰는 일이 하나도 신나지 않고 힘들었다. 아마 글에서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해 글도 부끄럽다. 왕비의 삶을 중점적으로 서술해야 하는데, 자꾸 나는 다른 데에 관심이 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광해군.

광해군에 대해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전부터 나는 광해군을 좋아했다. 조선시대 왕 중에 가장 무능한 왕으로 선조와 인조를 꼽는데, 그 사이에 끼여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광해군이 나는 늘 안타까웠다. 근래에 광해군을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나는 그 전부터 광해군에 대한 영상물이 왜 제작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토록 광해군을 좋아하는 입장이다 보니, 그와 반대에 서있었던 인목대비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비의 삶을 서술하는 글에 그 왕비의 입장이 되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으로 또는 그녀의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광해군에게 더 이입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인목대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글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광해군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그녀에게는 억울한 삶이었다. 광해군과의 일에서 그녀의 처신이 부족했던 것도 맞지만, 그녀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복잡한 정치 상황에 놓여졌었다. 아버지 선조와 아들 광해군의 싸움이었고 그들과 관련된 남성들의 정치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끼어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속절없이 희생당했다. 천성이 감성적이고 유약했던, 마음씨 착했던 그녀에게 그 삶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한스러운 것임이 분명하다.


<계축일기>가 온전히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지어진 것이고, 그 정치적인 상황을 중립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그 글을 읽고 있자면 그녀의 애처로운 상황들에 심취하게 되고 어느새 눈물이 난다. 한 나라의 국모이기 전에, 어머니로서 아들을 잃은 그 절절한 심정을 누구인들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성들의 정치에 속절없이 희생당했던 인목대비 김씨.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자식을 낳아본 엄마로서 그녀의 억울하고 한스러웠을 삶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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