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양처인가
신사임당의 양처 이미지는 조선시대에는 없었고, 1930년대 들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양처의 의미는 양인과 결혼한 양반여성으로, 현재의 현명한 아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현모양처라는 용어 자체가 1900년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말로, 당시 현모양처는 남녀의 역할 분담 차원에서 만들어진 단어였다.
신사임당의 양처 이미지의 근거로 두 가지 일화가 유명하다.
하나는 남편 이원수가 친척이었던 이기와 친하지 않도록 조언해 훗날의 화를 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사임당 자신이 죽은 뒤 남편에게 (악)첩과 재혼하지 말것을 당부하는 장면이 있다.
그 일화들을 보면 신사임당이 이원수보다 한 수 위로 현명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양처의 의미가 1970년대에 들어 희생적이고 순종적인 열녀효부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신사임당의 실제와는 매우 다르다.
잘 알려진대로 신사임당은 혼인 후 19년이 지나서 시집에 정착했다. 그 19년 동안은 주근거지가 친정인 강릉 쪽이었으며, 시가인 서울은 잠시 다녀가는 정도였다. 당시 남귀여가혼의 혼인풍습이 남아있었기에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신사임당의 외가쪽 남성들도 그러했으며, 이후 신사임당의 아들들 역시 그들의 처가쪽에 터를 잡았다. 그러므로 신사임당이 유독 특별하게 친정에 오래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신사임당은 혼인 후 2년이 지나서야 처음 시어머니를 뵙고 인사를 올렸다. (그 역시 혼인 후 얼마되지 않아 친정아버지 신명화가 작고하였기에 그랬다지만, 그것을 반영하더라도 늦은 편이었다)
일찍 과부가 되어 가족이 아들인 이원수뿐이었던 시어머니 홍씨를 생각해서 조금더 일찍 합가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어찌되었든 신사임당은 혼인 후 19년이 지나서 시가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시가에 정착한 이후에도 신사임당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심보다는 친정어머니에 대한 효심만을 절절하게 기록에 남겼다.
기록에 남아있는 시어머니와의 일화는, 시어머니께 공손하지만 할말은 하는 모습이 있다.
남겨진 기록만으로 보았을 때 신사임당은 친정집안의 딸로서의 정체성이 강했지 며느리로서의 모습은 인상깊게 기록되지 않았다.
하물며 신사임당의 열녀효부로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신사임당이 열녀효부의 희생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상이 허상이라면, 이원수가 못난 남편의 대명사라는 이미지 역시 허상의 측면이 있다.
이원수는 끝내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문음으로 관직에 나갔는데,
이는 이원수의 무능의 근거로 회자되는 말이지만, 한편 이원수 집안이 그만큼 훌륭한 집안임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의 가문은 혼인에 있어 몹시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원수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등 그 가문이 많이 위축된 것은 맞지만, 강릉의 최고 명문가였던 신사임당 가문과 견주어보았을 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문만으로는 이원수 집안이 우위라고 할 정도이다.
또한 이원수는 악첩을 두어 신사임당을 상심하게 했다며 못난 남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데, 한편으로 이원수는 아내의 오랜 친정살이를 이해해주고 그녀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도 존중해주었다.
물론 시대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송시열의 경우 신사임당의 그림이 너무 전문적이라며 여성의 재능을 아예 인정해주지 않은 것과 달리, 호방한 성품을 지녔던 이원수는 아내의 예술성을 자랑스러워하며 지지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즉 신사임당 부부의 이미지가 무능하고 어리석은 남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과 헌신으로 현명하게 가정을 이끌어난 아내로 이루어져있다면, 그것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보통의 양반들과는 달리 호방한 성품을 가졌다고 기록된 남편 이원수의 성품 덕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아는 순종적인 아내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며,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딸로서의 정체성으로 한 평생을 살았을 신사임당이 1970년대에 들어 열녀효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