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허상3

그녀는 초여인, 슈퍼우먼인가

by SOL

197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 활동이 급증하면서 여성들은 가정내의 역할 뿐 아니라 사회에서 주어진 일도 책임을 다해야 했다.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한다고 해서 남성이 가정일을 나눠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제 여성은 원래 하던 가정일의 역할을 다하면서, 새로 주어진 사회일에서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슈퍼우먼, 초여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가정일과 사회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낸(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자신의 재능도 펼쳐낸) 신사임당은 그 슈퍼우먼, 초여인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하지만 과연 신사임당은 슈퍼우먼, 초여인이 맞을까.


일단 신사임당은 슈퍼우먼이나 초여인이 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앞서 말했듯 신사임당은 혼인 후 19년이 지나서야 시가에 정착했다. 즉 혼인 후 19년 동안은 친정살이를 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살았을 신사임당이 굳이 슈퍼우먼이나 초여인의 삶을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7세의 소녀가 그림에 재능이 있자 집안의 남성 어른들이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서울에서 구해서 강릉까지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딸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그처럼 지원을 해준 신사임당 친정집안의 모습에서, 신사임당이 슈퍼우먼이나 초여인처럼 살 근거를 찾기 힘들다.



또한 신사임당에게는 매우 특별한 어머니 용인 이씨가 존재했다. 나는 신사임당 연구를 하면서 현모란 신사임당이 아니라 용인 이씨라는 생각을 수차례했다.

신사임당이라는 훌륭한 딸이 탄생하기까지는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의 존재가 컸다.


율곡 역시 어머니인 신사임당보다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율곡이 열여섯에 어머니를 잃고 상심하여 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가 결혼했을 때, 마음이 불편할 때 항상 찾은 사람은 외조모였다.


율곡은 장인 노경린에 대해 네 편으로 가장 많은 글을 남겼고, 다음으로 많은 글인 세 편을 남긴 사람이 외조모 용인 이씨였다. 율곡은 외조모의 병간호를 핑계로 수차례 사직을 청했으며, 외조모가 돌아가시자 몸과 정신이 모두 황폐해졌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어쩌면 16세 때 여읜 어머니보다 율곡의 삶에서 내내 의지가 되었던 인물은 외조모였을지도 모르며, 대학자 율곡의 탄생은 그의 어머니가 아닌 외조모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즉 신사임당은 훌륭한 어머니를 가졌고, 명문가 집안에서, 혼인 후에도 19년 간 머물렀기에, 슈퍼우먼, 초여인이 될만한 상황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여성단체에서는 "신사임당의 날"을 제정하고 "신사임당상"을 선정하였다. 신사임당상은 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로 일과 가정을 성공적으로 양립하였다는 이유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상자들이 쓴 당선 수기는 그 양립이 너무도 힘든 것이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수상자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에도 대학을 나왔을만큼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유리함은 단지 출발점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은 결혼 후 직장생활, 사회활동이 친정 또는 시부모의 절대적 도움과 보조 위에서 가능했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사실상 자신이 가정과 아이를 희생시켰다고 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들은 여성으로서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병행한다는 것이 하나의 이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일과 사회일을 모두 잘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상이다. 그런데 신사임당을 슈퍼우먼, 초여인으로 형상화하며, 마치 현대의 여성들도 신사임당처럼 해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또다시 신사임당을 통해 여성들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여성 유일의 화폐 인물로 대중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는 신사임당이 슈퍼우먼이나 초여인이 아니었음을, 그것이 허상임은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현대 여성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조금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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